주간동아 404

2003.10.09

“YS, 고마 고해성사 하이소”

한나라당, ‘安風’ 관련 진실 밝히도록 압박 … ‘안기부 예산’ 아닌 ‘YS 정치자금’ 쪽에 무게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3-10-01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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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S, 고마 고해성사 하이소”

    9월26일 국회법사위 국정감사에서 홍준표 의원은 “안풍의 본질은 김영삼 후보의 대선잔금이 안기부 계좌로 들어가 세탁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의 국회의원회관 사무실에는 ‘大道無門(대도무문)’이라는 휘호가 걸려 있다. 2001년 10월, 홍의원이 서울 동대문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후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선물한 글이다. 1996년 YS를 통해 정계에 입문한 홍의원은 요즘도 때만 되면 상도동을 방문하는 등 예(禮)를 갖추는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국회 재정경제위 소속이던 홍의원은 국정감사 4일 전인 9월18일, 홍사덕 원내총무로부터 “법사위로 가라”는 오더를 받았다. “병풍(兵風), 기양건설 자금 및 20만 달러 수수 의혹 등 3대 대선 의혹과 관련해 대여 공세를 펼쳐달라”는 것이 당 지도부의 주문이었다. 홍의원이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이하 안기부) 예산 전용 의혹과 관련, “YS가 나서 문제를 풀라”며 악역을 맡은 것은 계획에 없었던 것이다. 진퇴양난에 빠진 한나라당이 그만큼 급했음을 말해준다.

    안기부 예산 전용과 관련해 한나라당은 몸통에 대한 심증을 가지고 있다. 물증이 없는 이 심증의 중심에는 YS가 자리잡고 있다.

    YS “안기부 예산 아니다” 2001년 밝혀

    사건의 조기 수습과 파장의 최소화가 ‘YS의 고해성사’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 당 주변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닫힌 YS의 입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최병렬 대표가 첫 포문을 연 것도 이 같은 분위기 때문이다. 최대표는 9월24일 돈의 출처 및 성격에 대해 “최소 5~6명의 당 밖 인사들이 진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YS와 측근들을 동시에 겨냥한 뼈 있는 말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관련 사실을 부인한다. YS의 한 측근은 27일 “유구무언이다. 지금 무슨 말을 하겠는가”며 최대표의 예봉을 피했고, YS의 차남 김현철씨 역시 같은 날 한 통화에서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며 관련설을 부인했다. 이원종 전 정무수석은 통화가 되지 않았다.

    “YS, 고마 고해성사 하이소”

    1996년 총선 때 신한국당 후보들은 안기부 계좌에서 나온 돈을 선거자금으로 활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사진은 당시 유세장 풍경.

    특히 상도동은 “정치적 사건은 정치적으로 해결하라”고 매정하게 선을 긋고 나서 한나라당을 곤혹스럽게 한다. 굳이 나서기를 거부하는 YS를 무리하게 견인할 수단도 마땅치 않다. 당내에는 아직 YS와 직·간접적 연을 맺고 있는 인사들이 있고, 무엇보다 YS를 압박할 경우 신당이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부산의 정서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가 없다.



    최대표의 발언에 별다른 반응이 없자 홍준표 의원이 2차 공세에 나섰다. 홍의원은 26일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 “본질은 1992년 김영삼 후보의 대선잔금이 안기부 계좌로 들어가 세탁된 것”이라고 상도동을 압박했다.

    2001년 1월 김영일 전 사무총장도 홍의원과 같은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강삼재 의원 고문 변호사로 활동했던 김의원은 “강의원이 검찰 소환을 받던 날,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YS를 물고 들어가야 하는데 선거자금을 관리한 사람으로서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며 고민하더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의원은 상도동의 거센 반발에 이런 주장을 사견으로 돌렸다.

    안기부 예산과 관련 ‘천기(天氣)’를 처음 공개한 것은 사실 YS 본인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천기를 처음 통보받은 사람은 이회창 전 총재였다. 2001년 1월, 안기부 예산 전용 문제가 커지자 한나라당은 연일 대책회의를 열었다. 잘못하면 부도덕한 정당의 후보로 대선에 임해야 할 위기에 빠진 이 전 총재의 고민도 컸다. 측근들은 “상도동을 찾아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결국 이 전 총재는 ‘3김 청산’이란 이슈를 뒤로 한 채 1월28일 상도동을 방문했다. 이날 회동에 관여한 이 전 총재의 한 측근은 최근 “이 자리에서 YS는 ‘안기부 예산이 강삼재 의원에게 흘러 들어가 총선자금으로 사용됐다는 검찰 주장은 말도 되지 않는다’면서 안기부 예산이 아니라고 확인해주었다”고 말했다. YS는 이 자금 성격을 “재벌들이 지원한 정치자금”이라고 규정지었다고 한다.

    “YS, 고마 고해성사 하이소”

    안기부 예산 전용과 관련 구속 수감된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왼쪽).퇴임 후 일본 출국길에 나선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환송인사를 하는 강삼재 의원(오른쪽 사진 오른쪽).

    YS는 이 자리에서 당시 안기부 예산 전용 문제가 터진 배경을 DJ의 정치공작이라고 규정했다고 한다. 교섭단체 구성이 어려워진 자민련을 돕기 위해 ‘의원 꿔주기’를 하자 민심이 나빠졌고 이를 되돌리기 위해 DJ가 정치자금 문제를 꺼냈다는 것. 이런 판단에 따라 YS는 이 전 총재에게 “좀더 강하게 대여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상도동식 해법도 제시했다고 한다. 이 전 총재의 측근에 따르면 당시 YS의 대응책은 최근 내놓은 ‘정치적 투쟁’과 비슷했다고 한다.

    “‘김태정 전 검찰총장이 조사하던 DJ 비자금 문제를 내가 중지시켰다. 그쪽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 내가 그쪽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등의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 발언은 박종웅 의원에 의해서도 확인됐다. 이 전 총재와 YS의 회동 후 박의원은 “그쪽(DJ)에서 다섯, 일곱을 말하면 내가 여섯, 여덟을 말하겠다고 YS가 경고했다”고 말했다. 당시 상도동은 YS의 기자회견, DJ 비자금 파일 공개 등을 통한 대응전략을 논의했었다는 게 상도동 한 관계자의 전언이다. 당시 당에서는 이 전 총재에게 ‘YS의 해명을 요구하라’는 강한 메시지를 줬으나, 상도동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이 전 총재는 YS의 이 말을 듣고 그냥 상도동을 나왔다는 것.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결국 당시 자금의 성격에 대해 분명하게 선을 그었어야 했다”며 발등에 불이 떨어진 후 호들갑을 떠는 당 지도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한나라당이 안기부 예산을 YS와 연결해보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한나라당은 2001년 당시 돈의 성격과 조성 과정, 흐름 등에 대해 중요한 맥을 짚는 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YS와 김기섭 및 또 다른 YS 측근들의 움직임을 체크했고, 안기부 예산 전용의 진원지가 ‘상도동’ 인근임을 확인했다는 것. 한나라당은 이 돈의 성격을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한다. 1992년 대선잔금(상자기사 참조), 대선 후 기업체로부터 관행적으로 받은 당선축하금, 95년 지방선거와 96년 총선을 위해 별도로 조성한 선거자금이다. 경우에 따라 이 세 가지가 한데 뒤섞여 있을 가능성도 물론 있다. 정치적 성격을 띤 이 돈을 쓰기 위해서는 세탁을 해야 했고, 당시 세탁창구였던 김기섭씨에게 돈이 맡겨졌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결국 ‘무늬만’ 안기부 예산일 뿐 국민 혈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한나라당의 주장이다. 97년 대선 당시 선거대책위원회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김기섭이 쥐고 있던 수십 개의 계좌는 사실상 여러 용도로 쓰였다”며 “그때까지 그런 돈(정치자금)을 세탁하는 데 김기섭 계좌가 활용되던 시기”라고 말했다.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이 재판 과정에서 “안기부 국고수표는 자금추적을 하지 않더라”고 말한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상도동 자백 안 할 땐 공개질의 가능성도

    이와 관련,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2001년 7월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안기부 예산을 그렇게 많이 들어내 다른 데 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만약 예산을 불법 전용했다면 그만큼 펑크가 나 우리가 쩔쩔맸을 텐데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전 원장은 사견임을 전제로 “아마 예산을 빼간 만큼 어디선가 채워넣었거나 정치자금 세탁창구로 안기부 계좌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해 한나라당의 추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만약 이 돈이 안기부 예산이 아니고 YS의 정치자금이었다면 사건의 성격은 달라진다. 물론 특정 정당이나 개인의 돈을 국가기관인 안기부를 통해 세탁했다면 이 또한 지탄을 피할 수 없지만 법률적 책임에서는 지금보다 한결 자유로울 수 있다. 무엇보다 국민세금으로 선거를 치렀다는 족쇄가 풀려 총선 행보가 훨씬 가벼워질 수 있다. 반면 “재임 중 단 한 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해온 YS의 입장은 곤궁해질 수밖에 없다. 상도동으로서는 무엇보다 이 점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나라당이 상도동의 반발에도 이런 효과를 노리며 YS를 압박하고 있다.

    상도동을 압박하는 한나라당의 대응 수순은 1차적으로 ‘실체적 진실’에 대한 고해성사다. YS가 자발적으로 언론에 나서달라는 것이 한나라당의 주문이다. 그러나 상도동이 이 제의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공개적인 질의 등을 통해 압박을 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남경필 의원은 “YS는 자신이 만든 신한국당 후신인 한나라당과 정치후계자들이 이 문제 때문에 내년 총선을 치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라며 “YS가 해결을 위해 나서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경우에 따라 법정에서 YS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강의원의 변호인단 가운데 누군가가 이미 한나라당으로부터 몇 가지 ‘팩트’에 가까운 자료를 얻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YS는 재임기간 중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역사 바로 세우기’란 명분을 내세워 법정에 세웠다. 당시 문제가 됐던 것은 수천억원에 달한 정치자금이었다. 입장이 바뀐 YS는 이제 수세에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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