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3

2003.10.02

“오직 개혁만이 경제 살릴 처방전”

고려대 장하성 교수 참여정부에 쓴소리 … “인식 대전환, 역량 있는 주도세력 구성 절실”

  • 장하성 교수

    입력2003-09-24 15: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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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대 장하성 교수(경영학)가 참여정부의 경제정책과 경제 관련 인사(人事)를 통렬히 비판한 글을 발표해 파문이 예상된다. 장교수가 계간 ‘철학과 현실’ 가을호(9월 말 발간 예정)에 기고한 글 ‘개혁만이 안정과 성장을 달성하는 길’(가제)의 주내용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요약 소개한다.<편집자>
    “오직 개혁만이 경제 살릴 처방전”


    개혁의 기치를 내건 노무현 정권의 ‘돌연한 창출’은 기득권적 보수세력에게는 충격을 넘어선 절망이었다. 더 이상 개혁과 변화에 저항할 명분과 대안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보수세력은 와해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노정권이 출범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상황의 반전이 이루어졌다. 절망감에 휩싸인 기득권층은 다시 희망과 재도전의 기회를 갖게 됐고, 한국사회의 변혁을 꿈꾸던 개혁적 진보세력은 실망과 혼란에 휘말려 있다. 상황 반전의 계기를 제공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노정권 자신이다.

    경제정책에 국한할 때에 노정권의 정체성은 정권 출범 6개월 만에 ‘개혁’에서 ‘안정’, 다시 ‘성장’으로 급격한 변신을 보였다. 이는 보수세력의 압력 때문이라기보다 노정권 스스로 선택하고 추진한 것이기에, 그를 지지했던 국민들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경제개혁 현안 처리 ‘과거로의 회귀’

    ‘개혁’에서 ‘안정’으로의 변신은 정권 출범 이전 이미 시작되었다. 당선 직후 구성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개혁과 안정의 대립적 논란으로 내부갈등을 표출했고, 정부 출범 시점에서는 경제 관련 인선과 정책 시행에 있어 ‘개혁→안정’의 무게중심 이동이 이루어졌다. 또 경제개혁의 핵심과제인 재벌개혁에 대한 속도조절론이 제기됐다.



    “오직 개혁만이 경제 살릴 처방전”

    8월 화물연대 파업으로 멈춰선 트럭들

    경제정책에서의 개혁의지 퇴색은 다른 사회 분야에서의 개혁 추진과는 크게 대비되는 것이어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각료뿐 아니라 청와대 경제팀까지도 개혁성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 주를 이루었고 재벌개혁이나 금융개혁과 관련된 현안을 처리하는 데에서는 속도조절을 넘어 과거로 회귀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노정권 출범 후 첫 경제 현안이던 SK그룹의 부실과 카드회사 채권문제는 경제현안을 통해 재벌개혁과 금융개혁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은 오히려 안정 논리로 개혁을 실종시킨 대표적 사례가 됐다. 정부는 부실채권 급증으로 신용카드사들의 부실 위험이 높아져 카드사가 발행한 채권이 시장에서 인수되기 어려워지자, 금융사 대표들을 소집해 반강제로 자금을 갹출했다. 그렇게 조성한 자금으로 카드회사가 발행한 채권을 무차별 인수토록 했다. 정부의 이러한 직접적 시장 개입은 과거 정부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 전형적 관치금융의 부활이다.

    SK그룹의 처리도 온당치 않았다. SK글로벌은 이미 오래 전 파산상태에 이른 회사다. 이를 분식회계로 은폐해온 만큼 퇴출시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채권은행들은 다른 건강한 SK 계열사를 동원해 회생시키기로 결정했다. 계열사들에 향후 수년간 SK글로벌에 일정한 현금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이에 필요한 부당거래를 공개적으로 강요하는 대담성까지 보였다.

    “오직 개혁만이 경제 살릴 처방전”

    SK㈜노조원들이 SK글로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자력 회생이 불가능한 부실회사를 퇴출시키는 것은 재벌개혁과 금융개혁의 핵심이다. 또한 계열사의 부당거래를 전제로 한 회생은 개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다. 하나 금융감독권자이자 채권은행들의 대주주인 정부는 채권은행단의 이런 반개혁적인 부당행위 요구를 방치했다.

    재벌개혁에서도 개혁의 후퇴는 현안들을 통해 현실화했다. 정권 출범 직후 재벌그룹의 불공정거래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예정된 조사가 연기됐다. 이어 재벌 총수들이 정부의 경기부양책에 부응키 위해 투자예정금액을 적어내는 개발경제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희극도 연출됐다. 총수들의 투자선언 이후 최소 300조원이 넘는 시중 유동자금이 부동산 투기에서 실물경제 투자로 이전되었다는 소식은 아직 들은 바 없다.

    자본시장 개혁의 핵심과제인 증권집단소송제도 집권여당이 주도하여 실종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집권여당이 돌연 ‘자산 2조원 이하 회사에 대해서는 실시하지 말자’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증권거래소와 코스닥시장에 상장 또는 등록된 기업 중 자산규모가 2조원 이상인 회사는 5%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재벌·금융개혁에서뿐 아니라 노동개혁에서도 노정권은 큰 혼란을 빚고 있다. 두산중공업의 불법 파업에 대해서는 사측이 노조의 요구를 수용토록 개입했고, 현대자동차의 합법적 파업에 대해서는 직권중재를 하겠다고 나섰다. 조흥은행 파업 때는 막판에 이르러 고용안정 및 근로조건 이상의 문제까지 노조에게 양보했고, 철도노조 파업의 경우에는 노조에 대해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고 대규모 징계를 하는 강경책을 고수했다. 화물연대 2차 파업에 대해서는 1차 파업때의 정부 실수를 만회라도 하겠다는 듯 강경대응 일변도로 밀어붙였다. 노동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국민여론에 편승해 일관성 없는 임기응변적 대응책들만 내놓고 있는 것이다.

    개혁 후퇴와 정체성 혼란에 대한 비판과 관련해 소수당 정부로서의 어려움을 이해해줘야 한다는 정치적 변명과 정권 출범 후 채 반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더 참고 기다리면 달라질 것이라는 반론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우호적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는 또 한 번의 ‘변신’이 태동했다. 정부가 갑작스레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열자’는 성장론을 제기한 것이다.

    성장을 위한 정책과제나 실천전략에 대해 구체적 대안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총량적 지표로써 ‘국민소득 2만불’이 먼저 제시되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 아직 시행도 안 된 기존 국정과제와 개혁과제들을 재점검하겠다고 선언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대통령이 “시장에서 권력을 가진 기업의 정책에 따라 정부 정책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발언까지 한 것도 2만불 성장론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를 가중시켰다.

    노정권이 겪고 있는 정체성 혼란은 기득권 보수세력의 극렬한 저항, 개혁적 진보세력의 지나친 요구 등 외적요인보다는 권력 실세들의 개혁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기인한 바가 더 큰 것으로 판단된다. 노정권은 개혁을 안정과 성장의 대립적 개념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기득권 보수세력의 왜곡된 주장과 일치한다. 이는 곧 대통령과 권력 실세들이 지향하는 가치와 비전이 무엇인지에 대한 회의와 정권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정체성의 혼란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스스로 약화시키고 보수세력으로부터 새로운 지지도 얻어내지 못하는 원인이 돼 정권 출범 6개월 만에 정권유지에 대한 위기감이 제기될 정도로 국민의 지지도가 하락하는 정치적 추락을 자초했다.

    정권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야기된 것은 정권 실세들의 개혁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경제개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으로 인식되는 인물이나 세력이 없는 것과 무관치 않다. 권력 실세로 알려진 인물들은 경제전문가로서의 역량이 부족하고, 경제정책을 다루는 인물들은 대부분 개혁과는 거리가 멀다. 개혁적으로 인식되는 소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보다 오히려 견제받고 수세에 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노정권에서 경제정책을 주도하는 세력의 대부분이 소위 개혁과는 ‘코드’가 맞지 않고 개혁역량도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경기침체는 현정부의 책임만은 아니다. 미국경제를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의 위축, 이라크전쟁, 북핵 문제 등 외적요인과 김대중 정부에서 이전된 신용불량자의 대량양산으로 인한 소비 위축 등이 주원인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경기침체만으로 노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해 부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문제는 오히려 미래의 불확실성이다. 재벌, 금융산업, 노동시장을 개혁하지 않으면 외적요인이 제거된 후에도 국내수요와 투자가 활성화되지 않아 지속적 성장구조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1995년에 1만불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7년 동안 제자리걸음하고 있고, 1989년에 1000을 돌파한 주가지수도 경제 규모가 2배 이상 성장한 지금까지 700선에 머물고 있다. 이는 우리 경제의 성장 정체가 외적요인이 아닌 국내의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개발경제시대에 만들어진 지금의 재벌구조와 금융구조를 유지하면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지난 10여년간 해온 실수를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참여정부 5년을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창조적 전환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경제개혁에 대한 정권 내부의 인식 대전환과 경제개혁을 주도할 새 세력의 구성이 절실하다. 안정과 지속 가능한 성장은 오직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할 역량 있는 인물들로 경제개혁의 주도세력을 구성해야 한다.

    개혁은 갑자기 세상을 몽땅 바꾸는 것이 아니다. 경제현안을 개혁의 원칙에 따라 처리하고 재벌개혁, 금융개혁, 노동개혁, 공공개혁 등 이미 정해진 개혁과제를 결단력 있게 실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구체적 실천 정책 또한 이미 충분한 논의를 거쳐서 정리되어 있다.

    정권 초기이니 기다려달라는 인내의 요구도, 언론의 비판도, 기득권의 저항도 더 이상 국민을 설득할 명분이 될 수 없다. 개혁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 및 새로운 개혁 주도세력의 형성과 개혁의 실천을 통한 안정과 성장의 달성이 노무현 정부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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