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0

2003.09.04

돈과 인맥으로 쌓은 ‘철옹성’

권력기관 관계자들의 ‘스폰서’ 해주고 ‘보호막’ 혜택 … ‘배경’ 무기로 이권 개입·수사방해도 예사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3-08-28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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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과 인맥으로 쌓은 ‘철옹성’
    현재 대검찰청(이하 대검)에 근무하는 A검사는 김대중(DJ) 정권에서 한때 ‘외곽’으로 떠돌았다. 주변에선 그가 수사능력 등 ‘엘리트 검사’로서의 자질이 있는데도 지방을 전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가 모든 검사들이 선망하는 대검 검사로 발령받은 것은 DJ 정권 말기였다. 그는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각종 대형사건 수사에 참여,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는 DJ 정권 시절 자신의 인사와 관련해 언급하기를 꺼린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DJ 정권 시절 한직을 떠돌았던 것은 그가 당시 잘나가던 검찰 고위 간부들의 ‘X파일’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DJ 정권에서 한때 검찰총장 물망에까지 올랐으나 ‘불명예 퇴진’했던 고검장급 간부 B씨가 관심을 표명한 사건을 원칙대로 처리한 것과 관련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한 지역 유지 수첩엔 검찰 간부 연락처 ‘빼곡’

    얘기는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렵 전남의 한 지방 건설업체가 부도나자 이 업체의 채권을 가지고 있던 이 지역 ‘유지’ Y씨가 현지 조직폭력배(이하 조폭)를 동원, 이 건설업체 간부를 협박해 이 업체의 자산을 양도받은 사건이 일어났다. Y씨는 사건을 해결해주는 명목으로 돈을 받아 가로채 변호사법 위반 혐의도 받고 있었다. A검사는 사건 관련자 가운데 조폭 등 4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Y씨를 구속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시 검사장이던 B씨를 비롯해 일부 검찰 간부들이 Y씨 사건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A검사는 Y씨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받아냈고, 후임 검사가 Y씨를 체포했다. 이에 대해 B씨는 “Y씨 쪽에서 연락이 와서 Y씨 사건 수사팀에 전화를 걸어 무엇 때문에 구속하려 하는지에 대해 알아본 뒤에는 더 이상 전화하지 않았다”면서 “그 이전에도 Y씨가 내 이름을 팔고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그에게 몇 번 경고한 적이 있다”고 해명했다.



    당시 수사팀을 놀라게 한 것은 Y씨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 과정에서 확보한, Y씨 수첩에 적혀 있던 Y씨의 인맥. 당시 우연히 Y씨의 수첩을 봤다는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조금 과장하면 검찰의 경우 검찰총장만 제외하고 모든 검찰 간부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고, 군 쪽에도 폭넓은 인맥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돈과 인맥으로 쌓은 ‘철옹성’

    횡령 및 주가조작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중인 G&G구조조정 회장 이용호씨. 2000년 이씨를 불입건 조치해 검찰의 특별감찰을 받고 검찰을 떠난 임휘윤 전 부산고검장, 임양운 전 광주고검 차장, 이덕선 전 군산지청장(위부터).

    B씨는 Y씨를 알게 된 경위에 대해 “90년대 초반 재경 지청 부장검사 시절 검찰 선배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고 말했다. Y씨 주변의 한 인사는 “B씨가 검찰 내에서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검찰 후배들이 많았는데, B씨는 Y씨를 만날 때 이들 후배들을 데리고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B씨는 Y씨에게 검찰 인맥을 쌓아나갈 수 있는 창구였던 셈이다.

    1999년, 지방검찰청에 근무하는 한 중견 검사는 검찰 고위 간부의 전화를 받았다. 이 검사는 당시 채무 면탈을 위해 공장 기계류 등을 다른 곳으로 옮긴 한 기업인을 수사하고 있었는데, 검찰 간부가 그 사건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그 기업인을 구속하면 안 되겠느냐”고 의사를 타진해온 것. 이 중견 검사가 평소 그 검찰 간부를 따르는 편이어서 바로 전화를 건 것으로 짐작됐다.

    그러나 당시 그 기업인은 “공장장이 기계를 옮겼다”고 진술했고, 공장장도 이를 인정해 기업인을 구속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검찰 간부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더니 “그럼 어렵겠군. 모 정치인이 하도 부탁을 해서 말이야”라면서 그 지역 출신 현역 정치인의 이름을 언급했다. 이 검사는 “당시 이 기업의 채권을 갖고 있는 다른 기업인이 그 지역 현역 정치인에게 부탁, 검찰 고위 간부에게 전화하도록 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위의 두 사례는 웬만한 도시의 유지들이 정치인이나 군·검찰 등 권력기관 간부들과 어떻게 유착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만하다. 지역 유지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잘나가는 권력기관 관계자들의 ‘스폰서’를 도맡고, 대신 권력기관 관계자들은 ‘스폰서’의 보호막 역할을 하는 나름의 ‘윈-윈’ 게임 구조를 엿볼 수 있는 것. 때로는 이 구조에 지역 유지의 후원을 받는 정치인까지 가세하는 경우도 있다.

    양길승 전 대통령 제1부속실장의 ‘청주 향응 술자리’ 파문으로 불거진 청주 지역 토호세력과 청주지검의 유착 의혹이 수그러들지 않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지방 유지들의 이런 커넥션을 잘 알고 있는 시민단체 등은 김도훈 전 청주지검 검사가 폭로한 청주지검 고위 간부들과 양 전 실장의 ‘향응 술자리’에 참석한 K나이트클럽 소유주 이원호씨(구속)의 유착 의혹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지방 명문고 출신들 유착구조에 폭넓게 관여

    물론 현재로선 “유착 의혹은 사실과 다르다”는 대검 감찰부(검사장 유성수)의 감찰 결과를 뒤엎을 만한 폭로 내용은 없다. 검찰 일각에선 “유착 가능성으로 본다면 오히려 청주지역 명문고 출신인 김도훈 전 검사가 더 높은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김도훈 전 검사의 변호인단은 “이원호씨 비리를 내사하던 김 전 검사가 청주지검 윗선으로부터 받은 외압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돈과 인맥으로 쌓은 ‘철옹성’

    감찰 조사를 위해 청주지검에 내려온 유성수 대검 감찰부장을 취재하기 위해 기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김 전 검사의 폭로가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해 4월 뇌물수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사퇴한 김영세 전 충북교육감 사건을 통해 이 지역 유지들이 끈끈한 관계를 과시한 것과도 무관치 않다. 김 전 교육감의 비리 의혹은 이미 1999년 11월 그가 민선 3기 교육감 선거에 재선되면서부터 조금씩 얘기가 나오다 2000년 들어 김 전 교육감이 수의계약을 통해 뇌물을 챙겼다는 구체적인 제보가 시민단체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시민단체 등이 이 문제를 공론화했지만 김 전 교육감은 끄떡없었다. 이 지역 재야단체와 일부 지역 언론까지 가세했지만 김 전 교육감은 코방귀도 뀌지 않았다. 당시 이 지역 언론사의 한 기자는 “일부 언론인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이나 검찰, 경찰 관계자 등 김 전 교육감에게 ‘은혜’를 입지 않은 지역 유지가 거의 없는데 누가 김영세를 건드릴 수 있겠느냐”면서 “청주는 ‘김영세 왕국’이나 다름없었다”고 귀띔했다. 김 전 교육감은 이 지역 유지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 C고 출신들뿐만 아니라 교육감으로 있는 동안 형성해놓은 각계 인사들과의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막강한 아성을 구축해놓았다는 얘기였다.

    2001년 초 당시 김 전 교육감의 비리에 대한 물밑 수사를 진행하고 있던 청주지검 한 검사는 “김 전 교육감에 대한 내사가 지역 토호들의 방해와 비협조적 태도 때문에 전혀 진전이 없다. 언론의 도움이 필요한데 언론조차 입을 다물고 있어 사실상 수사가 어려운 상황이다. 토호들의 텃세가 심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정권 핵심과 선 닿는 업자들엔 권력기관원들 몰려

    이후 김 전 교육감의 비리 의혹은 덮어지는 듯했으나 인사비리가 불거져 나오면서 검찰의 불구속 기소를 피할 수 없게 됐다. 2001년 12월 1심에서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도 교육감직에서 물러나지 않던 그는 지난해 4월 항소심 재판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겨우’ 사퇴했다. 그러나 김 전 교육감은 아직도 충북 교육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교육감 사건의 경우에서 보듯 지방 유지들과 권력기관 관계자들의 유착구조의 핵심에는 지방 명문고 출신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대개 그 지역의 경제권을 쥐고 있어 순환보직제를 통해 지방 근무를 하게 되는 검찰이나 경찰, 국정원 등 권력기관 관계자들과 각종 모임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나는 기회가 많은 것. 이를 통해 서로를 ‘밀어주고 돌봐주는’ 관계가 형성되는 셈이다.

    지방 유지들이 권력기관 관계자들에게 접근하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경기도를 근거로 아파트 건설업을 하고 있는 건설업자 이모씨는 “특히 건설업의 경우 사고나 민원이 많기 때문에 든든한 보호막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면서 “DJ 정권 시절 문제가 됐던 ‘이용호 게이트’의 주인공 이용호 G&G구조조정 회장이 신승남 당시 검찰총장 동생 승환씨를 영입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지방 유지들이 최종 목표로 삼는 것은 물론 정권 실세들일 것이다. 박정희 정권 이래 정권 실세의 줄을 잡으면 사업의 성공이 보장됐기 때문이다. DJ 정권에서 호남에 기반을 둔 일부 건설업체가 한때 약진을 거듭한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당시 서울의 대형 건설업체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정권 핵심인사들이 호남 출신인 데다 권력기관이나 발주처의 고위 공직자들이 호남 출신인 경우가 많아 호남 기업이 아니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는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권력 핵심과 줄을 대고 있는 지역 업자들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권력기관 관계자들이 몰려든다. 권력기관 관계자들의 최우선 관심사인 인사청탁을 하기 위해서다. 국정원 관계자는 “과거 국정원에는 이런 식으로 인사상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는 인사들이 있었다”면서 “이들이 과연 자신이 취득한 정보를 이들에게 유출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유착구조는 최근 들어 서서히 동요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권력기관의 힘이 과거에 비해 훨씬 약화된 데다 사회 전체의 투명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DJ 정권 당시 지방검찰청 지청장을 역임한 한 변호사는 “지역 유지들이 참여하는 기관장 모임에 참석하려 해도 당장 지청 사무과장이 ‘지역 유지들 가운데는 뒤끝이 좋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굳이 어울릴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충고해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자제했다”고 털어놓았다.

    과거 한때 문제가 됐던 일부 권력기관 간부들과 지방 조폭들과의 유착 의혹도 대폭 줄어들고 있는 상태. 수도권의 한 검찰 간부는 “DJ 정권에서 조폭 관련 사건에 연루된 일부 검찰 간부들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돼 줄줄이 옷을 벗으면서 검사들 사이에서는 외부인사를 만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생겨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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