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9

2003.08.28

남북화합 노래 ‘땡’ 없이 감동 넘쳤네

‘평양노래자랑’ 민족 동질성 확인 드라마 … 숱한 우여곡절 끝 방송 성공 ‘기쁨 두 배’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입력2003-08-21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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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화합 노래 ‘땡’ 없이 감동 넘쳤네

    ‘평양노래자랑’을 마치고 손을 흔드는 출연진들.

    ”평야앙~~”(북측 방송원 전성희) “노래자랑~”(남측 사회자 송해)

    8월15일 광복절 저녁 7시30분. 시청자들은 특이한, 그리고도 감동적인 ‘드라마’ 한 편을 보았다. 무대는 평양 모란봉공원 야외무대. 주연은 20명의 북측 출연자들과 송해, 전성희씨, 그리고 모란봉공원을 메운 3000여명의 평양 시민들과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이었다. 드라마 제목은 ‘평양노래자랑’. 시청자들은 “난생 처음 들어본 북한가요들이 참 신선했다” “평양이 생각보다 멀지 않더라”라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날 무대가 ‘땡’ 혹은 ‘딩동댕’ 하는 실로폰 소리로 합격, 불합격을 알리는 ‘전국노래자랑’ 진행방식을 따르지 않은 데에 실망했다는 시청자들도 있다.

    사실 이 무대에는 주역들말고도 숨은 ‘조연’들이 있다. 이문태 KBS 예능국장, 유창욱 ‘전국노래자랑’ 총괄 PD, 박원기 KBS 남북교류협력단장 등이 그들이다. 평양 모란봉공원에서 녹화가 이뤄진 11일, 무대 뒤편과 중계차에서는 이 조연들이 가슴 두근거리며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감격해서? 아니 그보다는 녹화 1시간 전까지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던 탓에 ‘녹화가 끝까지 무사히 이뤄질까’ 하는 조마조마함 때문이었다.

    “시원섭섭하지만 만족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북측과의 이견 때문에 실랑이를 벌였는데 방송되고 나니 그런 갈등들은 다 잊어버리게 되네요. 시청률도 서울 27%, 전국 29%를 기록해서 ‘전국노래자랑’ 평소 시청률의 두 배 정도 됐습니다.” 방송 후 유창욱 PD가 밝힌 소감이다. 높은 시청률 덕분인지 그의 목소리는 밝았다. 그러나 이번 ‘평양노래자랑’ 제작진은 단 한 번의 방송을 위해 1년 가까이 줄다리기를 거듭해야 했다.

    평소보다 두 배 높은 29% 시청률



    남북화합 노래 ‘땡’ 없이 감동 넘쳤네

    출연자 중 최고령자인 이춘봉 노인에게 큰절을 하는 사회자 송해씨. 8월13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송씨는 “고향집에 소식만이라도 전했더라면…” 하고 말하다 눈물을 흘렸다(원 안 사진).

    ‘평양노래자랑’은 KBS 남북교류협력단이 지난해부터 ‘8도 노래자랑’을 목표로 추진해온 프로젝트다. 6월 말에 1차 협의팀이 방북해 열흘 가량 체류하면서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됐고 이후 7월 중순 이문태 국장, 박원기 남북교류협력단장 등이 방북해 ‘평양노래자랑’의 실무협의가 이루어졌다. 송해 송대관 주현미씨 등 출연진과 스태프들은 8월3일 평양에 도착해 9박10일간 머물렀다.

    KBS는 이 전례 없는 노래자랑을 성사시키기 위해 무수히 많은 협상과 협의, 그리고 설득과 싸움을 반복했다. 가장 먼저 부딪친 문제는 사회자였다. 북측은 KBS가 제시한 ‘남녀 공동 사회’ 안을 “우리측 행사에서는 사회자를 두 명 쓴 전례가 없다”며 거부했다.

    간신히 이 문제에 대한 우리측 안을 관철시키자 이번에는 “송해씨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전국노래자랑’의 베테랑 사회자인 송씨는 황해도 재령이 고향인 월남민이다. 이 같은 전력 때문에 송씨는 1998년 금강산관광을 가서도 북측이 입국을 거부, 홀로 배에 남아 있어야 했다. “월남한 전력이 있는 송씨를 평양 한가운데 있는 야외공원에서 사회를 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북측의 주장이었고, KBS측은 “송씨가 사회를 안 보면 이 프로젝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맞서 실랑이가 커졌다. 우여곡절 끝에 송씨가 사회를 보기로 했지만 혹시 나중에 딴소리를 할까봐 KBS측이 합의서에 ‘남측 사회자: 송해’라고 명기할 정도였다고.

    남북화합 노래 ‘땡’ 없이 감동 넘쳤네

    북측 여성 출연자들은 최근 평양에서 유행하고 있는 붉은색 계통 한복에 긴 파마 머리를 묶고 등장했다(위).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송해씨(아래 왼쪽)와 북측 방송원인 전성희씨.

    세부사항까지 합의한 후에도 북측의 태도는 시시각각 바뀌었다. “자고 일어나면 대본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우리 작가가 모두 다섯 번 대본을 새로 써야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녹화 전날 리허설하러 가보니, 대본이 또 완전히 바뀌어 있는 거예요. 차라리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유창욱 PD의 말이다. 실제로 KBS는 “최악의 경우 녹화를 못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 대체 프로그램을 편성해두었다.

    사실 북측의 주장 중에서는 KBS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았다. 북측은 출연진들의 노래 중에 노골적으로 체제를 선전하는 내용을 담은 노래를 편성하려 했고, 합격, 불합격을 즉시 가리는 ‘전국노래자랑’의 형식에 대해 “우리 인민에 대한 모욕이다”라며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또 북측은 출연진을 모두 ‘전국근로자노래자랑’등 북한의 각 노래대회 우승자들로 구성했다. “‘땡’ 하는 실로폰 소리로 불합격을 알리는 방식이 안 된다면 1, 2, 3등이라도 뽑자”는 KBS측 주장에 대해서도 북측은 “우리 출연자들은 모두 ‘평등한’ 각 대회 우승자 출신인데 어떻게 1, 2, 3등을 가리느냐”며 거부했다.

    ‘평양노래자랑’이 북한에서는 거의 없는 대형 야외무대에서 이뤄진다는 점도 KBS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KBS는 관객들의 편의를 생각해 이동식 간이화장실까지 가져 갔다. 아니나 다를까, 모란봉공원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KBS는 가져 갔던 화장실 3개를 모두 모란봉공원측에 기증하고 왔다고.

    KBS측이 가장 아쉬워하는 점은 송해씨가 ‘전국노래자랑’에서처럼 출연자들과 정감 어린 인터뷰를 하지 못한 것. 북측은 녹화 중 송씨의 애드리브에 대해 “대본은 한 줄인데 왜 송선생이 서너 줄씩 이야기하느냐”고 제동을 걸었다. 이 같은 북측 태도 때문에 송씨와 출연진 인터뷰는 극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송씨가 녹화 중 77세의 최고령 출연자인 이춘봉 노인에게 “고향도 인근이고 나이도 한 살 많으시니 우리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며 넉살 좋게 넙죽 큰절을 하자 북측도 만류하지 못했다.

    “출연진들과 개별적인 이야기, 예를 들면 고향이나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녹화 중간 중간에 말을 붙이고 싶어도 다들 노래연습하느라 얼마나 바쁘던지….” 이문태 KBS 예능국장의 말이다. 이국장은 “이번 ‘평양노래자랑’을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우리가 프로그램을 통해 남북의 동질성을 확인하려 했던 반면, 북한은 체제 선전의 기회로 삼으려 해 모든 부분에서 이견이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스태프들이 프로그램 성공의 ‘일등공신’으로 꼽는 사회자 송해씨는 이번 방북으로 만감이 교차한 듯했다. “이춘봉 노인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는데, 이노인이 내 옆으로 오려고만 하면 안내원이 ‘아바이 선생님, 저리 가 계세요’ 하고 자꾸 제지하는 거야. 녹화를 마치고 다들 돌아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난 미련이 남아서 미적거렸지. 그런데 북측 사회자인 전성희씨가 내게 막 뛰어오는 거야. 성희씨 고향도 황해도랬는데, 마음 같아서는 내 주소를 주고 가족들이 잘 있는지 확인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어. 하지만 차마 말을 못 하고 그저 쳐다만 봤지. 눈빛을 보니 성희씨도 내 마음을 아는 것 같아. 내 손을 꼭 잡더니 ‘아버지, 건강하시라요’ 하더라고….”

    말을 못 잇고 눈물을 훔치던 송씨는 이내 “개성 송악소주에 단고기 한 점 먹으니 세상이 다 내 것 같더라. 개인적으로 20년 묵은 소원을 풀었다”고 여한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갖가지 난관을 뚫고 결국 ‘평양노래자랑’을 성사시킨 KBS 관계자들은 모두 송씨처럼 “최선을 다해서 후회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유창욱 PD는 “이번 방북 기간 중에 남북한 출연자들이 반반씩 출연하는 ‘남북노래자랑’에 대해 구체적으로 협의하고 왔다. 아마 내년 설이나 추석 즈음에는 금강산에서 남북 출연자들이 나란히 노래하는 ‘남북노래자랑’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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