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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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권노갑 부메랑’ 여의도 살 떨린다

“당 위해 헌신 처벌은 부당” 동교동계 격앙 … ‘배신자 응징’ 칼 뽑아 들까 정치권 전전긍긍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김기영 기자 hades@donga.com

    입력2003-08-21 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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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난 ‘권노갑 부메랑’ 여의도 살 떨린다
    권노갑 전 민주당 상임고문은 8월14일 김근태 의원의 정치자금 관련 재판이 마무리되면 미국에 있는 둘째 손자를 보러 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7월2일, 진승현 게이트 관련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조용히 정치적 복권을 준비한 것도 권 전 고문의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일과였다. 측근 P씨는 “신당 창당 등 정치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2004년 총선에서 목포 출마를 고려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또다시 검찰과의 악연을 확인한 권 전 고문은 이 모든 계획을 접어야 하는 위기에 처했다. “모든 것이 조작됐다”며 항변하지만 고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으로부터 200억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알선수재)와 관련, 검찰이 던진 올가미에서 빠져나오기는 어려워 보인다.

    뒤 전 고문이 현대 돈을 받은 2000년 2월, 당시 그의 정치인생은 ‘황금기’였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묵인 아래 4월 총선의 총기획자와 코디네이터로 활동했다.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에다 공천권과 자금을 한 손에 쥔 그는 누가 보더라도 권력의 2인자로 손색이 없었다. 그의 주변은 연일 공천과 선거자금을 지원받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 박지원 대통령정책기획수석, 남궁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등도 수시로 권 전 고문과 회합했고 이인제, 한화갑, 김근태, 정동영 의원 등 차세대 주자들 역시 ‘권심(權心)’을 사기 위해 수시로 그의 곁을 맴돌았다. 공천을 노린 386 그룹과 낙천의 위기 속에 정부 관공서 진출 등을 노리는 재기파들도 눈도장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대책회의 내용 공개 땐 정치권 쑥대밭”

    성난 ‘권노갑 부메랑’ 여의도 살 떨린다

    8월15일 새벽 구속영장이 발부된 권노갑 전 고문(가운데)이 서울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권 전 고문이 구속된 8월15일 이후, 동교동계 주변에서는 당시 권 전 고문의 역할과 활동공간을 되살리는 작업들이 한창이다. “그때 권 전 고문을 졸졸 따라다니던 ×들이 안부전화 한번 하지 않는다”는 배신감이 동교동계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이 배신감이 “밝힐 것은 밝혀야 한다”는 ‘코란’식 응징론으로 이어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권 전 고문이 구속된 이후 폭발할 것 같던 동교동계의 분노는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지금도 이들을 관통하는 하드코어는 “당을 위해 심부름한 사람만 처벌받을 수는 없다”는 반발이다. 동교동계 L의원은 “결국 이번 일이 신주류에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권 전 고문의 측근 P씨는 “동교동계 대책회의 때 나온 얘기들을 공개하면 아마도 정치권이 쑥대밭이 될 것”이라며 분기탱천한 동교동계 분위기를 전달했다.

    동교동계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들의 분노의 표적은 노무현 대통령과 민주당 내 386으로 모아진다. 노대통령의 경우 고의로 검찰수사를 방치하며 신당 창당을 측면지원하고 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386에 대한 적개심은 최근 문제가 된 권 전 고문의 총선지원금 가운데 상당액이 그들에게 총선용 실탄으로 지급됐기 때문으로 동교동계 인사들은 설명한다. 따라서 총선 당시 권 전 고문 주변을 맴돌던 386에 대한 얘기들이 쏟아진다. 권 전 고문의 한 측근은 “2000년 총선 당시 386 인사들의 발탁과 공천에 관여했던 C의원을 주목하라”고 얘기했다. 그는 권 전 고문의 지휘에 따라 총선 전략집단인 ‘386’의 발굴과 추천에 전념했던 인물로 당내 386의 정계 진입 및 총선 과정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와의 인연과 역할에 대한 386 인사들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민주당 386 그룹의 회고다.



    “당시 386 출마 희망자들 사이에 ‘C의원 눈 밖에 나면 공천이 어렵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공천을 앞두고 당사나 의원회관은 C의원을 만나려는 386들로 늘 북적였다. 그가 움직일 때면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386 정치 지망생들로 작은 소동이 일 정도였다.”

    성난 ‘권노갑 부메랑’ 여의도 살 떨린다

    여야 386세대 정치인들이 2000년 5월17일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고 있다(왼쪽). 권노갑 전 민주당 상임고문이 민주당 및 동교동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C의원이 설정한 1차 관문을 통과한 386 명단은 권 전 고문에게 넘겨져 2차 테스트를 거쳤다. 당시 권 전 고문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젊은 친구 30명만 당선시키면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며 ‘젊은 피’ 발탁에 열과 성을 다했다. 차기 대통령 후보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는 발판을 만들기 위한 세 확산 작업과도 무관치 않았다.

    권 전 고문의 ‘장학생’으로 발탁된 386 그룹은 권 전 고문의 특별관리 하에 선거를 치른 것이 정설로 통한다. 한 당직자는 “자신이 추천한 인물에 대한 당연한 책임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권 전 고문의 측근들에 따르면 1, 2차 테스트를 통과한 386들은 권 전 고문이 직접 불러 격려하는 ‘친전’식에 초대됐다고 한다. 권 전 고문의 측근 K씨는 “‘앞으로는 당신들이 주역이다’는 격려와 ‘봉투’를 전달하는 자리로 기억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측근은 “권 전 고문이 이들을 당의 중추세력으로 키워 2002년 대선과 당의 세대교체 주역으로 활용하려 했다”며 ‘권노갑 플랜’의 일단을 소개했다. 이 측근은 “그때 누구보다 감격한 목소리로 충성서약을 했던 한 386 인사는 2001년 ‘영감’의 정계은퇴를 앞장서 주장하더라”고 덧붙였다.

    권 전 고문은 정치자금과 관련, 결벽에 가까운 ‘완전범죄’(?)를 지향한다. 따라서 ‘실탄’을 직접 지급해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권 전 고문이 은밀한 장소로 후보를 불러 전달하거나 ‘권노갑 파이프’를 통해 수혜자들에게 전달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권 전 고문의 심부름꾼으로는 민주당의 재정국과 조직국 당직자들이 주로 활용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당직자는 “평소 에는 조직국과 재정국 당직자들의 선발에 제한이 없다. 그러나 선거국면에 들어가면 사실상 선거를 총지휘하는 쪽에서 두 부서의 실무자들을 철저히 자기 사람 위주로 선발한다”며 “2000년 총선의 경우 동교동계 구파의 ‘진골’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당직자들이 조직국과 재정국에 포진해 선거를 치렀다”고 말했다.

    2000년 총선 때 조직국에서 일한 한 당직자는 “당에서 공식적으로 내려가는 돈 외에 당시 권고문과 김옥두 사무총장, 그리고 금고지기인 윤철상 사무부총장이 서명한 별도의 지출결의서가 있어야 지출되는 별도의 선거자금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돈을 일선 후보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이들이 바로 조직국에서 일한 동교동계 당직자들이었다”며 “선거가 끝난 뒤 세 사람의 서명이 담긴 A4용지 크기의 비밀지출결의서와 지출내역이 담긴 파일만 모아 따로 관리됐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권 전 고문은 일부 386 그룹에 대해서는 자금뿐만 아니라 조직원을 선거 캠프에 파견, 직접 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권 전 고문이 발탁, 지원한 386 인사에게 패한 한나라당 한 중진의원은 “결국 권 전 고문과의 싸움에서 진 것”으로 패인을 분석, 눈길을 끌었다. 그의 말이다.

    “선거 당시 권 전 고문의 핵심측근인 J씨와 Y씨가 지역에 파견됐다. J씨는 지역 내 R호텔에, Y씨는 K여관에 베이스 캠프를 차려놓고 우리 당 당직자들을 만나 회유 공작에 나섰다. 두 사람을 만난 당직자들은 그대로 종적을 감추거나 상대편으로 넘어갔다. 자금 여력이 없던 우리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권 전 고문의 직·간접 지원을 통해 등원한 인사들 가운데에는 개혁적 정치이념에도 불구하고 신당 창당 등에 대한 입장이 모호해 “총선 때 (동교동계로부터) 신세를 너무 진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는 의원들이 꽤 된다.

    민주당 주변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민주당의 수도권 후보에게 개별적으로 전달된 돈은 대략 7억~10억원 정도라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일부 386 그룹의 경우 이보다 훨씬 덩치큰 자금이 전해졌다는 얘기도 나온다. 선거 직후 수도권 남부지역에 선거자금 감찰을 나갔다는 한 당직자는 “당 중앙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한 선거자금이 평균 2억5000만원이었다. 이 돈은 후보진영 자금 담당자의 통장에 온라인으로 송금하는 돈이니까 말하자면 공개된 선거지원금인 셈인데, 공개된 돈이 이 정도라면 적어도 그 몇 배의 현찰이 살포됐다고 보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인사의 말은 곧 시중에 ‘권노갑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떠돌고 있는 총선자금 지원대상자 명단이 실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권 전 고문의 일부 인사와 386에 대한 지원은 총선 후에도 이어졌다. 권 전 고문의 마포 사무실은 사랑방 구실을 하며 ‘나눔의 장소’로 활용됐다(상자기사 참조). 흥분한 일부 동교동 관계자는 당시 상황을 언급하며 “있는 대로 까발려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권 전 고문의 입이다. 올해 74살인 권 전 고문은 사회통념상 더 이상 ‘내일’에 대한 설계가 불가능한 나이다. 그때문에 권 전 고문이 국면 반전용 ‘칼’을 빼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훈평 의원은 “2000년 총선 때 서울과 부산 등 박빙의 승부가 펼쳐진 30여곳에 지원금이 내려갔다”는 묘한 말을 흘렸다. 다른 측근은 “신주류의 정점은 노대통령”이라고 동교동계의 타깃을 구체화했다. 여차하면 노대통령까지 걸고 들어갈 수도 있다는 의미다.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가 구속수감되는 것을 지켜본 권 전 고문의 측근 B씨는 “이제 정치권 인사 가운데 누구도 권 전 고문의 배려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며 ‘동교동계의 저주’를 예고했다.

    몇몇 정치인 출국금지 … 권 전 고문측 계속 압박

    동교동계는 권 전 고문이 처한 현재 상황이 누구의 사정을 봐줄 만큼 여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DJ가 빌려서 선거자금에 쓰라고 했다”거나 “DJ에게 공천에 대해 보고했다”는 등의 발언으로 침묵중인 DJ를 고난의 길로 끌어들인 것도 여유 없는 동교동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계를 은퇴했지만 DJ 뒤에는 호남 민심이 있는 만큼 이를 등에 업고 노무현 정부의 검찰과 맞서겠다는 고도의 전략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2000년 마포 사무실을 중심으로 벌어진 각종 정치적 딜의 핵심내용도 상황에 따라 꺼내 쓸 카드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권노갑 부메랑’이 만만치 않을 수 있다는 서늘한 경고나 다름없다.

    그러나 당사자로 지목된 386 인사들은 한결같이 ‘권노갑의 지원’을 부인한다. “그를 만난 적도 없다”는 해명과 “지원받았더라도 당의 공식창구를 통해 받은 합법적인 자금”이란 주장이다. 권 전 고문이 구속되던 8월15일, 검찰청을 나서는 권 전 고문 앞에는 20여명의 당직자 외에 찾아온 사람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동교동계 한 인사는 “그들(386)이 말하는 개혁과 새정치는 결국 배신과 동의어에 지나지 않는다”며 울분을 토로했다.

    권노갑과의 일전에 나선 검찰은 동교동계의 이런 정치적 행보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권 전 고문의 금품수수와는 별도로 현대 비자금을 받은 정치인들을 출국금지시키고 소환키로 하는 엇박자로 권 전 고문측을 압박하고 있다. 검찰 한 관계자는 “단순히 정치자금 명목으로 받은 돈이라면 굳이 출국금지까지 시켰겠느냐”며 직위를 이용한 현대 돈 뜯어먹기 행위였음을 은연중 시사했다. 이 관계자는 “대가성을 입증할 수 있는 몇몇 팩트가 확인됐다”며 이들에 대한 소환이 또 다른 ‘화약고’가 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노대통령은 이런 혼란 속에 자신의 분신들을 ‘부산’으로 집결시키며 신당 창당에 대한 변함없는 의지를 선보였다. ‘권노갑 부메랑’은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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