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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로 돌아본 올림픽 도전

1976년 몬트리올대회 첫 금메달, 신문 호외 발간…2008년 베이징대회 수영, 야구 신화

  • 김도헌 스포츠동아 기자 dohoney@donga.com

    입력2016-08-12 16: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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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1회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이 한창이다. 120년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남미에서 열리는 리우올림픽은 206개국, 1만여 선수가 참가해 17일간 28개 종목에서 306개 금메달을 놓고 열띤 경쟁을 벌인다.

    대한민국 선수단은 개막 이틀째인 8월  7일 김우진-구본찬-이승윤이 호흡을 맞춘 양궁 남자 단체전에서 첫 번째 금메달을 수확했고 이튿날 기보배-장혜진-최미선이 양궁 여자 단체전에서 다시 시상대 맨 위에 서는 등 ‘10-10’(금메달 10개 이상 획득, 종합순위 10위권 진입) 목표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만약 이번에도 종합순위 10위권에 진입하면 한국은  2004 아테네(9위)→2008 베이징(7위)→2012 런던(5위)에 이어 ‘올림픽 4회 연속 톱10’ 진입이라는 의미 있는 역사에 입맞춤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십수 년 전부터 올림픽에서 다수 금메달을 수확해 감흥이 줄었지만, 한때 금메달은커녕 동메달 하나에도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다. 리우올림픽을 맞아 한국의 올림픽 도전사를 되짚어본다.



    아픔으로 남은 손기정의 금메달

    우리나라가 올림픽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정확히 80년 전인 1936년 베를린대회(11회) 때였다. 고(故) 손기정 옹과 남승룡 옹이 마라톤에서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에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달려 있었다. 일제강점기였던 탓이다. 일본 선수단의 일원으로 독일로 떠난 두 영웅은 일장기를 단 채 베를린 시내를 역주했다. 1위와 3위로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그들의 역사적 쾌거는 여전히 일본의 성과로 남아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아직도 당시 수상자를 일본식 공식 등록명인 기테이 손(Kitei SON)과 쇼류 난(Shoryu NAN)으로 기록하고 있다. 손 옹은 나라를 잃은 탓에 시상대에서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고, 독일 나치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마라톤 영웅의 상징인 월계관을 수여할 때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가 대회가 끝난 뒤 서울에 있는 지인에게 보낸 엽서에는 한글로 딱 세 자가 적혀 있었다. ‘슬푸다.’

    한국이 ‘KOREA’라는 이름으로 올림픽 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광복 직후인 1948 런던대회였다. 역도 김성집과 복싱 한수안이 나란히 동메달을 획득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52년에도 올림픽에 출전했다. 핀란드 헬싱키대회에서 김성집과 복싱 강준호가 동메달을 땄다. 이어 1956 멜버른올림픽(은 1, 동 1) 때 복싱에서 송순천이 첫 은메달의 낭보를 전했고, 1964 도쿄올림픽(은 2, 동 1), 1968 멕시코시티올림픽(은 1, 동 1), 1972 뮌헨올림픽(은 1)에서 꾸준히 메달을 추가했다. 1960 로마올림픽에서만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메달 획득 종목의 다양함이다. 그동안 복싱과 역도에 국한됐지만 1964 도쿄올림픽을 기점으로 다른 종목으로 확산됐다. 처음으로 레슬링(은 1)과 유도(동 1)에서 메달을 획득했다.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탄생한 것은 1976 몬트리올올림픽이었다. 몬트리올올림픽 폐막일이던 8월   1일, 주인공 양정모는 레슬링 자유형 62kg급에서 금메달을 따 시상대 맨 위에 섰다. 올림픽 무대에서 태극기가 가장 높이 올라가고, 애국가가 처음 울려 퍼졌다. 당시 한국 신문들은 호외를 발간하며 올림픽 첫 금메달의 낭보를 시민들에게 신속하게 전달했다. 귀국 후 양정모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운동하면서 공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이는 이듬해 3월 한국체육대 개교로 이어졌다. 몬트리올대회가 한국 올림픽 역사에서 갖는 또 다른 의미는 구기 단체종목에서 첫 메달이 나왔다는 점이다. 이순복, 정순옥, 마금자, 변경자 등이 나선 배구 여자 대표팀이 동메달을 획득해 개인 종목이 아닌 단체 종목에서 한국 선수단 첫 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동서냉전이 극에 달하던 시절 1980 모스크바올림픽에 미국 등과 보조를 맞춰 불참한 뒤 1984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로 종합순위 10위에 오르며 첫 ‘톱10’에 진입했다. 당시 양궁 여자 대표팀 막내였던 서향순은 ‘금메달 0순위’로 꼽히던 선배 김진호(동메달)를 따돌리고 개인전 시상대 맨 위에 서며 한국 올림픽 사상 첫 여자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남겼다.



    1988년 서울 4위…2012년 런던 5위

    1988 서울올림픽은 큰 의미를 갖는다. 냉전을 딛고 동서 진영이 모두 참가한 ‘화합의 올림픽’으로 기록된 서울대회에서 한국은 개최국 어드밴티지와 편파 판정 등 잡음 속에서도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따내며 역대 최고 성적을 거뒀다. 레슬링(2개), 유도(2개), 양궁(3개), 탁구(2개), 복싱(2개), 핸드볼(1개) 등 6개 종목에서 금메달을 수확해 소련(금 55), 동독(금 37), 미국(금 36)에 이어 종합순위 4위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한국은 스포츠 강국으로서 꾸준히 명성을 쌓아갔다. 1992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선 서울올림픽 때와 동일한 금메달 12개(은 5, 동 12)를 땄고, 1996 애틀랜타올림픽에선 금메달 7개, 은메달 15개, 동메달 5개라는 성적을 거뒀다. 2000 시드니올림픽에서 금메달 8개(은 10, 동 10)를 획득하는 감격을 누린 뒤 2004 아테네올림픽에선 서울올림픽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메달 30개 이상(금 9, 은 12, 동 9)을 챙겼다.

    2008 베이징올림픽에선 ‘깜짝 스타’가 탄생했다. 수영 박태환이 그 주인공이다. 박태환은 자신의 두 번째 올림픽 무대인 베이징대회 남자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한국 수영 역사상 첫 금메달 주인공이 됐다. 김경문 감독이 이끄는 야구 대표팀은 9전 전승 신화를 쓰며 금메달을 따내 그해 8월을 더 뜨겁게 달궈놓았다. 베이징올림픽에서 획득한 총 32개 메달(금 13, 은 10, 동 9)은 서울올림픽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수였다.

    한국은 4년 전 런던올림픽에서도 빼어난 성적을 거뒀다. 베이징올림픽에서처럼 금메달 13개를 획득했고, 종합순위 5위로 서울올림픽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종합순위를 기록했다. 그동안 한 번도 올림픽 금메달을 따지 못했던 펜싱이 여자 사브르 개인(김지연)과 남자 사브르 단체(구본길-김정환-원우영-오은석)에서 1위에 오르는 등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수확하며 ‘효자 종목’으로 떠올랐다. 당시 홍명보 감독이 이끌던 축구 남자 올림픽 대표팀은 3·4위 결정전에서 숙적 일본을 2-0으로 통쾌하게 따돌리고 올림픽 첫 메달(동메달)이라는 값진 열매로 한국 축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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