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7

2003.06.05

“불안한 盧言, 믿고픈 盧心”

이주향 교수 “토론도 좋지만 지나친 말 앞세우기 삼가야 … 방미 발언은 차라리 듣지 말 것을”

  • 이주향/ 수원대 교수 ja1405@chol.com

    입력2003-05-28 1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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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한 盧言, 믿고픈 盧心”

    5월 11일 취임 후 첫 미국 방문길에 오르며 손을 흔드는 노무현 대통령 부부.

    대통령이 고백한다.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이러다 대통령을 못 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제목만 보고 이게 무슨 경솔한 표현인가 해서 자세히 읽어보니 웃음을 띤 채 던진 얘기였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격앙된 분노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국정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일 수도 있고, 대화로 잘 풀어보자는 호소일 수도 있겠다.

    대통령의 말이 화제다. 톡톡 튀는 솔직한 표현으로 시선을 집중시키기도 하고, 너무 솔직해서 불안해 보일 때도 있다. 물론 다듬어지지 않은 그 살아 있는 표현을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표정이 있는 정치인이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무미건조하게 시류에 휩쓸려가는 수많은 정치인 중에서, 때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는 그는 단연 돋보였다. 그는 지역주의에 저항했고, 분단체제 하에서의 기득권이기를 거부했다.

    당신은 기억하는가? ‘평검사와의 대화’ 때의 노무현 대통령을. “대통령은 토론의 달인이니 토론으로 우리를 누르려 하지 말라”는 한 평검사의 주문에 대해 그는 분명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말재주로 진실을 가리는 그런 인품으로 보지 말라”고. 정치인 노무현은 토론을 잘하기 위해 때로는 하고 싶은 것도 안 했다고. 그렇지 않겠는가. ‘정치개혁’이라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입에 담기 위해서는 개혁의 대상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거니까. 토론의 힘은 말에서 오지 않고 행위에서, 삶에서 온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삶이고 그 삶이 뿌리내리고 있는 존재의 실상이지 말재주가 아니다. 그렇게 경쾌했던 정치인 노무현의 말이 대통령이 된 후에는 왠지 불안해 보인다. 나만의 느낌일까. 어느 때는 너무 즉각적으로 표현해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대통령의 순발력이 정점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민하고 고뇌하는 과정이 노출되어서는 안 돼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부패방지위원회가 공무원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물론 사전에 청와대에 보고했단다. 그런데 대통령이 그 행동강령에 대해 사후에 이견을 낸 것이다. 청와대에서 행동강령을 만들어 천편일률적으로 할 생각이 없다고. 너무나 인간적인 의견이었지만 대통령의 말이 아닌가. 결과는 혼선이었다. 대통령이 다시 설명해야 했다. 일단 행동강령을 시행해나가면서 보완해나가자고.

    고뇌하는 과정 그대로 노출되면 일관성 없어 보여

    화물연대 파업사건 처리과정에서도 그랬고, 전교조의 반미교육 논란과정에서도 그랬다. 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도 그럴 것 같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또 말을 바꿨다”는 말을 들을까.



    나는 대통령이 입장을 바꾸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자가 아닌 이상 토론의 과정에서 입장을 바꿀 수 있는 유연함은 살아 있는 토론을 할 줄 아는 사람의 크나 큰 장점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안이 나와 치열하게 고뇌해야 하는 과정에서는 파장이 큰 사람일수록 너무 말이 앞서면 안 된다. 지도자가 여러 입장을 듣는 것은 당연하지만 고민하는 과정이 그대로 노출되면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지인들에게는 그 과정이 인간적인 고뇌요, 고독한 고민의 과정으로 비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일관성을 잃은 것으로 비친다.

    얼마 전 국무회의에서의 토론과정이 신문에 실렸다. NEIS 도입 여부가 도화선이었다고 한다. 노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단다. “일개 교원단체인 전교조가 국가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정부의 굴복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다”고. 그러자 어떤 장관이 대통령의 입장에 대해 “전교조 지도자가 80년대식 권위주의 투쟁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고 동조한 모양이다. 물론 다른 목소리를 내는 장관들도 있었다. 어떤 장관은 전교조의 순기능을 지적하면서 처벌 위주로 흐르면 비조합원들도 덩달아 집단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했고, 또 어떤 장관은 전교조는 80년대식 정서를 갖고 있지도 않고 참여정부에 대한 기대가 높은 만큼 파트너십을 가져야 한다고도 했단다. 최종적으로 대통령은 어떤 결단을 내릴까. 다양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국무회의는 희망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먼저 의견을 피력하기보다 모든 의견을 듣고 사후에 최종적인 입장을 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중심은 부동해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가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뚝심을 얘기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반미면 왜 안 되느냐”고 되물을 수 있는 정치인 노무현에게서 뚝심을 보았었다. 그래서 믿었다.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중재하겠다는 뚝심 있는 말을. 그렇지만 미국에 간 노대통령이 보여준 태도는, 적어도 언론에 보도된 것이 전부라면, 차마 듣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이었다.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나는 정치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라니, 개인의 자격이 아닌 국가의 중심인데 어떻게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을까. 국가의 품격이 훼손되는 대목이었다. 차라리 보지 말고 듣지 말 것을! 심하게 가슴이 떨렸다. 우리의 중심은 덧없이 가벼워서 우리는 우왕좌왕 어지러웠다. 그러한 태도로는 미국 편을 들 수는 있어도 미국과 북한의 싸움을 중재할 수는 없어 보인다. 노대통령의 그런 변화가 한반도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략이라고 이해하고도 싶었다. 그렇지만 문득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악몽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좌충우돌 상황은 지나친 의욕 탓으로 믿고파”

    집권 초기 YS의 인기는 90%를 상회했다. 그는 북한이 굶주린다는 말을 듣고 외국에서 쌀을 사다가라도 줄 것이라고 했다. 어떠한 동맹국과의 관계도 민족문제보다 우선할 수 없다며 김일성을 만나겠다고도 했다. 그랬던 그가 그 후 ‘미국의 침’을 맞았는지 민족문제를 외면한 채 한미공조체제 유지에만 열중, 미국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우방(?)이 된 것이다. 민족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없이 민족문제를 유행의 차원에서 접근한 이의 분명한 한계였다.

    그렇게도 YS가 미국의 충실한 충견 노릇을 했건만, 미국은 우리 정부와 상의도 없이, 귀띔도 없이 민족적 재앙이 될 것이 분명한 북폭을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이해관계를 계산하고 있었다. 94년이었다. 하긴 충견과 상의하는 주인은 없을 테니까.

    노무현 코드는 이회창 코드가 아니다.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지 않고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국민통합인가?

    나는 아직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얘기했던 노무현을 믿고 싶다. 노무현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지지세력들은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도 않겠지만, 쉽게 외면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능력보다는 의욕이 커서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상황은 집권 초기라 그런 거라고 이해해주고 싶다. 그래서 그가 후보 시절 내내 강조했던 노선이나 철학에서 이탈할 경우 다시 그를 견인해내는 비판 과정이 필요하다. 비판에 능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비판의 의미를 잘 새길 테니까.

    “불안한 盧言, 믿고픈 盧心”
    “노무현 정부가 보여준 노골적인 대미(對美) 저자세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전망 부재가 국민을 실망시켰다”는 시민단체의 논평에 대해, 남북 교류협력과 북핵을 연계한 것은 민족 내부의 문제에까지 미국의 개입을 인정한 반민족적 행위라는 입장에 대해 노무현 정부는 충분히 숙고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수직적 관계였던 한미관계를 하루아침에 수평적 관계로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서 ‘과제’ 아닌가. 한미관계를 수직에서 수평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갈등을 감내해야 하는, 그 쉽지 않은 일에 부동하는 중심이 될 것 같아 노무현에게 표를 던진 젊은 표심(票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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