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5

..

프랑스, 반전 함성이 한숨으로

美 보복 위협 점차 현실로 … 미국인 관광객 줄고 나토에서도 왕따 說 무성

  • 박제균/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 phark@donga.com

    입력2003-05-14 16:4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프랑스, 반전 함성이 한숨으로

    4월29일 브뤼셀에서 열린 4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한 융커 룩셈부르크 총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슈뢰더 독일 총리, 베르호프슈타트 벨기에 총리(왼쪽부터). 프랑스는 프랑스 포도주 소비 1위 국가인 미국이 경제 보복을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미·영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했다.’

    4월 말, 프랑스 전역의 신문 가판대에 이런 1면 머릿기사 제목을 단 신문이 좍 깔렸다. 미국이 이라크전에 반대한 자크 시라크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프랑스를 무력 침공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 신문의 이름은 더 몽드(The Monde). 프랑스 최고 일간지 르 몽드(Le Monde)를 패러디한 신문이다.

    기사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먼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프랑스를 침공하는 목적이 ‘프랑스 해방’이라고 연설한다. 미군은 뾰족한 탑이 있는 중세 수도원 몽생미셸을 레이더 기지로 착각해 폭격을 퍼붓고 루브르 박물관을 파리 시청으로 오인해 포위한다.

    시라크 대통령은 대(對)국민 TV연설에 나서 “미국인들에게 격렬하게 항거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고 사담 후세인처럼 말한 뒤 “비브 라 프랑스(Vive La France·프랑스 만세)!”를 외친다. 그러나 연설을 끝내자마자 대통령궁인 엘리제 궁의 지하 터널을 통해 도망간다.

    젊은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다. 하지만 노르망디 폭격 후 귀환하다 미군의 오인사격으로 추락한다. 미·영 연합군 사령관의 이름은 토미 프릭스(Freaks·마약중독자).



    미국에서 프랑스 상품 소비 감소

    미국의 문화에 대한 무지와 노회한 시라크 대통령의 이중성, ‘미국의 나팔수’ 역할에 충실한 블레어 총리를 한꺼번에 꼬집은 것이다. 그러나 신문을 본 프랑스인들은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이라크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미국의 보복 위협에 시달리는 프랑스의 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미국의 경제 보복조치는 가시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프랑스인들이 느끼는 ‘체감 보복’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프랑스 입국 관광객 수 1위, 프랑스 포도주 소비 1위 국가로 프랑스 산업의 주요 소비국이다. 공식 통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포도주 등 미국인이 즐겼던 프랑스 상품의 소비가 줄고 있다고 프랑스 언론은 전한다. 프랑스 어느 관광지에서나 왁자지껄하던 미국식 영어도 점점 듣기 어려워지고 있다. 보다 못한 프랑스 경제인연합회는 미국 신문에 “프랑스와 미국은 미국 독립전쟁 때부터 우정을 지켜온 200년 친구”라는 광고를 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국의 위협은 끊이지 않는다. 미국이 이라크전에서 승리하자마자 매파인 폴 월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은 “프랑스는 반전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이후 각종 미국 언론과 정부 당국자의 입을 빌린 보복 위협이 난무하고 있다. 5월7일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프랑스와 독일이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인질로 삼았었다”고 비난했다.

    라이스 보좌관의 이 발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월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전쟁이 발발할 경우 이라크의 접경국이자 NATO 회원국인 터키의 안보가 불안해진다며 터키를 군사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NATO에 대한 이라크전 개입 요청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독일 등은 거부권을 행사, 미국의 요구를 무산시켰다.

    미국이 승전한 직후부터 유럽에서는 그때 일로 앙심을 품은 미국이 NATO에서 프랑스를 ‘왕따’시킬 것이란 관측이 무성하다. NATO 회원국인 프랑스를 ‘왕따’시킬 방법은 있다. NATO 내에서 유일하게 프랑스만 가입하지 않은 군사기획위원회를 통해 NATO를 운영하면 된다. 따라서 유럽 전문가들 가운데는 라이스의 발언을 NATO에서의 대(對)프랑스 보복의 전주곡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프랑스만 잡으면 독일은 저절로 꼬리를 내릴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아직도 두 차례 세계대전의 업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독일은 적어도 국제정치 무대에서는 혼자서 목소리를 키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와 독일도 팔짱을 끼고만 있지는 않았다. 시라크 대통령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기 베르호프슈타트 벨기에 총리, 장 클로드 융커 룩셈부르크 총리 등 유럽 4개국 정상은 4월29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이른바 ‘유럽연합(EU) 미니 방위 정상회담’.

    방위비 부족해 홀로서기도 곤란

    이라크전쟁에 반대했던 이들 4개국 정상은 이 회담에서 유럽 방위를 독자적으로 추진할 유럽안보방위연합(ESDU) 창설에 합의했다. 사실상 미국의 손 안에 있는 NATO에서 벗어나 유럽 방위를 위한 ‘홀로서기’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미국에 ‘왕따’당하기 전에 미국을 유럽에서 ‘왕따’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이들 정상은 5월2, 3일 그리스에서 열린 EU 외무장관 회의에서 이날 합의를 제시하고 보다 많은 EU 국가의 참여를 유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는 실패로 끝났다. 미국에 ‘역습’을 당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5월2일 ‘전후 이라크 평화유지 구상’을 발표했다. 이라크 전역을 미국 영국 폴란드 3개국이 관할하는 3개 권역으로 분할, 평화유지 활동을 벌이는 방안이다. 미국은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게 평화유지 활동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 물론 프랑스 독일 등 반전을 주장한 4개국은 제외했다. 유럽 독자 방위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기대됐던 EU 외무장관 회의는 미국의 이라크 평화유지 구상을 논의하는 회의로 바뀌었다.

    프랑스의 도미니크 드 빌팽 외무장관과 독일의 요시카 피셔 외무장관의 표정은 어땠을까. 두 장관은 대세에 밀려 미국의 평화유지 구상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다만 “다국적 평화유지 구상은 참가국 숫자만 늘리는 것”(빌팽) “사실상 유엔 역할을 강조한 독일 주장과 같다(피셔)”고 한 마디씩을 회의록에 남겼을 뿐이다.

    왜 유럽은 이처럼 미국 앞에만 서면 작아지고 쪼개질까. 유럽 공동의 외교정책은 결국 군사적 힘이 뒷받침될 때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2001년 벨기에 라켄에서 열린 EU 정상회의 때부터 독자 방위는 유럽의 숙제였다.

    하지만 언제나 돈이 문제다. 입으로는 독자 방위를 외치면서도 막상 주머니를 여는 것은 꺼리는 게 유럽의 현실. EU 국가는 한 해 평균 국내총생산(GDP)의 1.9%를 국방비로 쓴다. GDP의 3%인 3500억 달러(약 437조5000억원)를 쏟아 부으며 한 해 EU 15개 회원국 국방비의 3배, 미국을 제외한 NATO 18개 회원국 국방비의 2배를 쓰는 미국과는 게임이 되지 않는다. 유럽 방위의 ‘홀로서기’가 요원한 만큼 ‘하나의 유럽’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전쟁 전 기세 좋던 시라크 대통령도 풀이 죽었다. 그는 최근 50회 생일을 맞은 블레어 총리에게 세계 최고급 와인의 하나인 샤토 무통 로칠드를 선물로 보냈다. 블레어 총리는 지난해 10월 EU 정상회의에서 농업 보조금 문제로 시라크와 이견을 보이다가 다른 정상들이 보는 앞에서 시라크로부터 “무례하다”고 면박을 당했었다. 최고급 프랑스 와인을 마시며 전쟁에 승리한 기쁨을 누리고 있을 블레어와 쓰라린 심정으로 그에게 보낼 선물을 챙겼을 시라크. 이라크전쟁은 불과 반 년 만에 이웃한 두 나라 정상의 처지를 뒤바꿔놓았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