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1

2003.04.24

강남 병원가 “명의를 모셔라”

불황 탈출 위해 소문난 의사 영입 경쟁 … 대학교수들 주 표적 ‘귀하신 몸’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3-04-17 14: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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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 병원가  “명의를 모셔라”

    환자수가 급감해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 강남의 의료타운.

    ”오로지 의사의 실력만이 병원을 살아남게 하는 비결이지요.”

    서울 강남에서 J성형외과를 운영하는 이모 원장(39)은 지난 몇 개월이 ‘생사의 기로에 선 시기’였다고 토로한다. 지난해 11월부터 환자 수가 급감하면서 직원 월급조차 은행에서 빌려서 줄 정도였다는 게 그의 고백. 이원장은 2001년 봄 서울 강남에서 성형외과 개업 붐이 일 때 의원 문을 열었다. 인테리어에만 2억원 이상이 들었고 임대보증금을 합해 10억원 가량의 자금이 투입됐다. 2년여간 호황을 누리다 환자 수가 줄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말. 각종 성형수술의 부작용과 강남 의료계의 지나친 상술에 대한 비판이 언론과 인터넷에 넘쳐나면서였다.

    의료기기 리스 비용도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가 된 이원장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더 이상 광고나 고급 인테리어 같은 겉포장만으론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환자들은 족집게처럼 실력 있는 의사를 선별한다. 결국 실력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이원장이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병원 포화상태 … 경영난에 허덕

    그는 바로 모교인 H대 의대를 찾았다. 국내는 물론 해외 학회에서까지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은사를 의원의 공동원장으로 모셔오기 위해서였다. 몇 번 고사하던 스승은 이원장이 의원 지분 양도와 환자 수에 따른 수익배분 원칙을 약속하자 얼마 후 자리를 옮겼다. 스승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자신의 병원을 세운 셈.



    ‘실력만이 살길’이라는 이원장의 생각은 적중했다. 스승을 모셔온 지 한 달여가 지나면서 환자들이 거짓말처럼 다시 찾아들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간단한 약력만 올려놓았을 뿐인데 환자들은 의료계 노(老)교수의 이동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렸던 것이다.

    최근 서울 강남 의료타운에 대대적인 구조조정 태풍이 불어닥치면서 ‘명의(名醫) 모시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초까지 의료계의 개원 붐을 주도하며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강남불패’ 신화를 창조했던 강남지역 의사들은 지난해 말부터 각 병원 컨설팅 회사에 자신의 병원과 의원, 의료기기를 헐값에 투매하기 시작했다. 강남구 한 지역에만 30~40개의 의원이 매물로 나왔지만 매매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 피부과 성형외과 안과 등 소위 비보험 진료과 의원 매물이 특히 많다. 1990년대 중반까지 피부과 체인의원의 대명사 격이었던 이지함 피부과는 지난해 12월 말 7개 체인의원 중 압구정점을 폐쇄한 데 이어 현재 일부 분점의 통폐합을 준비중이다. 고운세상피부과도 6개 체인 중 한 곳을 공개매물로 내놓았을 정도. 지난해 서울 명동에서 강남지역으로 옮겼던 L피부과는 올 초 강남 병원을 정리하고 다시 명동으로 돌아갔다. 이 피부과 김모 원장은 “강남은 이미 의료소비에 한계가 왔다”며 “이제는 경쟁이 덜한 강북지역과 동네의원이 수익 면에서 오히려 더 낫다”고 말했다.

    사실 강남 의료타운의 구조조정은 의약분업 시작 후인 2001년 초 개업 붐이 일어날 때 이미 예견됐다. 강남구 1개 구에 개원의 숫자만 579명으로, 서울 25개 구 전체 개원의사 5050명의 11%에 이른다. 강남, 서초, 강동, 송파 등 이른바 ‘강남’으로 통칭되는 4개 구의 개원의사 수는 서울시내 총 개원의의 28%를 차지할 정도다. 특히 성형외과의 경우 전국 성형외과의 절반이 강남에 있다. 병·의원 전문 H컨설팅 하모 사장은 “이미 강남의 의료소비 수요가 포화단계에 이른 상태에서 이라크전과 북핵 문제 등으로 경기불안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비보험 진료, 즉 생명에 지장이 없는 진료를 소비자가 미루거나 포기했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발생했다”며 “강남지역 의료계의 구조조정은 빈익빈 부익부가 그 특징”이라고 말했다.

    ‘빈익빈 부익부’, 다시 말해 ‘잘 되는’ 병원은 더 잘 되고, ‘안 되는’ 병원은 결국 망한다는 이야기다. 기존의 강남에서 잘나가는 병원의 필요조건이 공격적 홍보와 내부 치장이었다면 이젠 의사의 실력과 임상경험이 병원 생존의 충분조건이 된 것이다. 아무리 자본이 많은 병원도 실력 있는 의사가 없으면 소비자에게 외면당하는 시대가 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강남지역 의사들은 자신의 출신 대학을 중심으로 명의 모시기에 혈안이 돼 있다. 세계 피부학회에서 흉터복원술의 대가로 주목받는 이정복 원장이 서초 이지함 피부과로 옮긴 것을 비롯해 무릎관절 치료로 유명한 한양대 의대 정형기 교수(정형외과)도 올 초 강남의 제일정형외과로 자리를 옮겼다. 이들은 모두 스승과 제자 사이. 정교수는 “어느 날 학회에 갔는데 후배이자 제자인 원장이 찾아와 도와달라고 사정해 옮기게 됐다”고 말했다.

    강남 병원가  “명의를 모셔라”

    수술 부작용이 널리 알려지면서 수술 희망자가 급속하게 줄고 있는 라식수술. 강남의 라식 전문 안과들은 노인시력 교정 쪽으로 빠르게 방향을 틀고 있다(위).강남 의료타운에서도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피부과. 유명 체인의원들의 몸집 줄이기가 한창이다(아래).

    이와 함께 임상사례를 늘리고 싶어하는 대학교수들과 개원의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병원을 옮긴 경우도 있다. 세계적인 대장복강경 수술의 대가인 고려대 의대 김선한 교수가 그런 경우. 대장암 수술 사망률 0%의 신화를 창조한 김교수는 “대학병원에 있다 보면 강의도 해야 하고 잡일도 많아 수술 사례가 늘 기회가 없지만 개원가에서는 수술과 진료에만 전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김교수가 서울 송파구 한솔병원으로 옮긴 이후 이 병원에는 대장복강경 수술환자가 몰려들고 있다.

    심지어 K대학 안과의 경우 과 전체가 공동개업을 하는 바람에 대학병원의 기능이 마비되기도 했다. K대학 안과는 이후 모자란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또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A의대 피부과 김모 교수는 제자들이 서로 모셔가려고 다투는 바람에 난처한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 김교수는 “어느 한 곳으로 가면 제자들 사이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아 결국 대학 석좌교수로 남기로 했다”며 “늙은 교수를 서로 데려가려고 해 기분 나쁘지는 않았지만 의료계에도 법조계와 같은 전관예우가 생기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고 말했다.

    수술 부작용 사례의 증가와 급격한 소비심리 위축으로 된서리를 맞고 있는 강남의 라식 전문 안과들도 요즘 한 대에 10억원씩 하는 라식수술 기계를 놀려둔 채 백내장이나 노인시력 교정 전문 교수들을 찾아다니느라 혈안이 돼 있다. 강남 S안과의 경우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최근 노인시력 교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중견교수를 공동원장으로 영입했다. S안과 김모 원장은 “이제 라식 열풍도 사그라들어 전통적인 안과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 경우 라식기계 리스 비용을 지불하지 못해 파산하는 안과가 속출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명 의사를 확보하지 못한 개원의들이 자신의 실력을 쌓기 위해 직접 유명 개원의에게 사사하는 풍경도 이제는 강남 개원가에서 흔한 모습이 됐다.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 병원의 한 관계자는 “유명 교수 한 사람이 빠져나갈 때마다 대학병원 전체 재정상황이 휘청거릴 정도지만 워낙 개원가의 로비가 교묘해 어쩔 도리가 없다”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개인병원을 가질 수 있는데 왜 가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렇듯 강남 ‘의료왕국’의 구조조정은 의료계에 실력 위주의 새바람을 몰고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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