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1

2003.04.24

‘분권 파트너’는 립 서비스?

노대통령 국정 독점 총리 역할 ‘원 위치’ … 총리실에서도 “내년 총선 이후 지켜봐야”

  • 김기영 기자 hades@donga.com

    입력2003-04-17 11: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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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권 파트너’는 립 서비스?

    모처럼 뉴스에 등장한 고건 총리. 4월7일 국회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고총리는 의원들과 책임총리론 공방을 벌였다.

    책임총리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지난해 대선에서 여야 후보는 한결같이 ‘제왕적 대통령제’극복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이를 위해 분권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권론 가운데 노무현 후보 진영에서 내세운 것이 책임총리론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책임총리제를 거론한 것은 그가 여권의 군소후보에 불과했던 2001년 연말쯤. 당시 민주당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노후보는 자신의 통치구조 운영 방안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후보자 땐 ‘책임총리’ 당선 이후엔 ‘보통총리’

    “한국의 대통령에게는 권력이 집중돼 있다. 대통령은 각종 보고와 업무에 파묻혀 지낸다. 이 때문에 중요한 국가적 전략과제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국가의 일상적 운영, 즉 작년에도 했고 올해도 하고 내년에도 할 변함없는 국가의 일상적 관리운영, 항상 일어나는 사고 등은 총리가 감당해 나가도록 하면 권력의 집중도 막을 수 있고 대통령의 업무부담도 덜 수 있다. 대통령은 소위 국가적 전략을 기획해 10년 뒤의 한국의 모습, 10년 뒤의 동북아시아 혹은 세계와 한국의 관계 등을 내다보고 국가의 미래를 설계해 나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 또 행정개혁, 재정개혁 등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묵은 전략적 개혁과제를 집중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이런 주장을 펼치면서 노후보는 이 같은 분권의 정신이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와는 다르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보통 분권을 말할 때 대통령은 국방·외교·남북관계만 담당하고 내치는 총리에게 맡기는 방식을 많이 얘기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내정과 외치를 기능적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은 외치든 내치든 관계없이 전략적 기획과제, 즉 미래를 멀리 내다보는 전략적 과제를 맡고 일상적인 국가업무는 총리가 맡아 나가는 시스템이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 경우 국방·외교는 일상과제로, 남북관계는 전략적 과제로 봐야 한다. 남북관계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몫이라는 게 아니라 전략적 국가과제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현상유지가 아닌 한국의 운명을 새롭게 바꾸어 나가는 거대 프로젝트는 대통령의 몫으로 하자는 것이다.”

    당내 경선이 시작되면서 노후보의 분권론은 차츰 ‘책임총리제’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경선 직전 노후보는 “각부 통할권, 국무위원 제청권, 국무위원 해임건의권을 보장해 내각관리의 책임을 지는 ‘책임총리제’를 시행하겠다”는 것을 경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노후보의 책임총리제는 조금씩 달라진다. 특히 대선 직전 정몽준 의원과의 후보단일화 논란을 거치면서 큰 변화를 겪는다. 단일화의 파트너인 정몽준 후보가 집요하게 4년 단임 개헌과 대통령과 총리가 외치와 내치를 분담하는 방식의 분권형 대통령제를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노-정 두 진영은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에 합의했지만 노후보 진영에서는 “책임총리제를 실질화하면 얼마든지 분권의 정신을 살릴 수 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대통령 당선자 시절 책임총리제에 대한 노대통령의 생각은 보다 큰 변화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청와대와 내각의 역할을 나눠 명백하게 국무총리에게 위임이 가능한 업무에 대해선 청와대가 일절 관여하지 않고 헌법상 규정된 국무위원 제청권과 해임건의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제한적’책임총리제를 시행하겠다”는 것. ‘제한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에 대해 노대통령의 한 측근은 “모든 문제에 대해 궁극적으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우리 정치풍토에서 전면적인 책임총리제는 실현가능성이 없을 뿐 아니라 자칫 대통령의 책임을 국무총리에게 떠넘기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후보자에서 당선자로 신분이 바뀌자 ‘책임총리’는 조금씩 ‘보통총리’로 되돌아오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셈.

    지난해 12월 말 노대통령은 민주당 선거대책위 당직자 연수에서 자신의 임기를 내년 4월 총선을 기준으로 1기와 2기로 나눠 개헌일정과 연계하겠다며 “1기에는 순수 대통령제에 가깝게 운용하겠다”고 말해 대선 후보로 나선 이후 줄곧 주장해온 책임총리제 시행을 상당기간 유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무렵 책임총리제 실시의 시기와 폭을 두고 정치권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대통령의 발언이 책임총리제의 전면 연기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책임총리제를 시행하되 강도를 조절하겠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올 1월18일, 당선 후 첫 TV토론회에 나선 노대통령은 “당정분리를 통해 대통령이 정당을 지배하지 않으면서 1단계로 분권하고, 2단계로 총선이 끝난 뒤 헌법대로 총리에게 권한을 주면서 분권을 한 번 더 하겠다”며 ‘2단계 권력분점 방안’을 공개했다. 노대통령은 2단계 분점의 전제조건으로 “중·대선거구제를 하든, (권역별) 비례대표 수를 늘리든 한 지역에서 특정정당이 70~80% 이상 석권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줘야 한다”고도 말했다. “국회다수당에 권력을 나눠줄 테니 정치권은 정당을 개혁하고 선거제도를 개편해 현재의 지역당 구도를 타파해달라”는 것이었다.

    ‘분권 파트너’는 립 서비스?

    고건 총리의 위상이 애매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그의 입지가 크게 줄었다. 노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고 있는 고총리.

    비로소 드러난 노대통령의 책임총리제는 후보 시절 구상해온 책임총리제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였다. 노대통령은 4월2일 한 취임 후 첫 국회 국정연설에서도 같은 주장을 펼쳤는데 이런 발언들은 ‘노무현 집권=권력분점시대 개막’으로 이해되던 초기의 적극적 책임총리제 도입 의지가 집권에 성공한 뒤 상당부분 희석됐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노대통령의 발언만 놓고 보면 문제는 간단하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첫 총리에 지명된 고건 총리가 등장하면서 국민과 정치권은 다시 헷갈리기 시작한다. 2월 말 국회의 총리인준을 거친 뒤 고총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책임총리제 구현방안을 묻는 질문에 “헌법에 규정된 총리의 권한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어 “각료제청권도 실질적으로 행사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전에 실질적인 인사협의를 하는 것이다. 이번 조각에서 두 차례 이상 실질적인 인사협의를 거쳤다”고 말했다.

    노대통령도 2월27일 조각 인선 발표를 하면서 “모든 행정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총리와 각부 장관에게 맡기려 한다”며 “이번 정부에선 장관이 책임과 권한을 갖고 일하기를 바라며 ‘수석 시어머니’는 없고 총리가 시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말해 책임총리제가 다시 대세가 된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그러나 이런 대통령의 발언과 총리의 의지 표명은 정권 초기 반짝 세리머니로 드러나고 있다. 그 후 고총리는 과거 총리와 다르지 않은 위치로 돌아왔고 대통령이 사실상 모든 쟁점의 중심에 서서 국정을 독점, 운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때 더 이상 ‘대독총리’, ‘방탄총리’는 없다며 책임총리제 실현에 강한 기대감을 나타내던 총리실도 최근 들어 “본격적인 책임총리는 내년 총선 이후에나 가능하지 않겠느냐”며 풀죽은 모습이다.

    우리나라 국무총리제도는 모호하다. 1948년 헌법 제정 당시 한민당의 내각책임제 안과 이승만의 대통령중심제 주장을 혼합해 타협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대통령제 하에서 국무총리를 두는 기형적 통치구조가 탄생했다. 이런 한계에도 노대통령은 국무총리를 ‘분권의 시대’의 파트너로 격상하고자 했다. 고총리도 한때 상당한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책임총리제의 본래 취지는 퇴색하고 있다.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전제로, 국회 다수당에게 총리임명권을 주겠다는 노대통령의 말은 뒤집어보면 중·대선거구제 등 지역구도를 타파할 획기적 제도가 도입되지 않으면 총리임명권을 다수당에 넘기지 않을 것이며 책임총리제도 유보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현 상황에서 중·대선거구제 개헌은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개헌은 어디까지나 국회의 소관이다. 여야 정치권이 노대통령의 문제의식에 공감하지 않으면 개헌은 불가능하다. 중·대선거구제 개헌을 요구하는 노대통령 자신도 이 문제에 크게 집착하지는 않는 것 같다. 대통령이 당장 신경 써야 할 국정 현안도 산더미 같은데 권력분점을 위한 개헌에 정열을 쏟을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간다면 책임총리제는 물 건너가는 것 아닐까. 아니 책임총리는 애당초 불가능한 수사(修辭)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분권의 시대를 열겠다던 노대통령의 공약은 또 어떻게 되는가. 뉴스에서 사라진 고총리를 보면서 국민들 사이에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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