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5

2002.12.26

말(言)로는 무엇인들 못 하랴

  • 김용택 / 시인

    입력2002-12-20 1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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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言)로는 무엇인들 못 하랴
    며칠 전 온 눈이 아직도 녹지 않고 산과 들, 강가에 잔설로 남아 있다. 오늘 아침에는 산비탈 밭 가의 감나무 가지마다 서리꽃이 어찌나 환하게 피었는지 감나무가 하얀 꽃나무 같았다. 감나무뿐 아니라 아주 작은 실가지를 가진 나무들 모두 흰 서리꽃을 자욱하게 피우고 서 있었다. 파란 풀 한 포기 없는 비탈진 작은 밭에 서 있는 감나무와 작은 나무들을 보면 세상이 더없이 한가롭고 평화롭다. 강가에 다다르니, 강가 마른 풀잎에도 서리가 하얗게 서려 있고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사이로 강물이 눈부시게 흘러간다. 세상은 꿈속 같다. 내가 카메라를 가지고 차에서 내리자 수백 마리의 청둥오리 떼들이 물을 차고 해 뜨는 푸른 하늘로 날아오른다.

    대통령선거는 말의 잔치 … 진짜 말을 찾아라

    그런 경치들을 바라보다 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 2학년 교실에 들어서면 일곱 명의 해맑은 아이들이 나를 향해 “선생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세상에 거리낌없는 모습들이라니. 거기다가 오늘은 경수란 놈이 또 이런 일기를 써왔다.

    “오늘은 큰엄마, 작은엄마, 엄마께서 김장을 하시고 계셨다. 난 김장을 하는 것만 봐도 군침이 돈다. 엄마, 큰엄마, 작은엄마가 모두 힘을 모아 김장을 하고 계셔서 더 맛이 있을 것 같다. 김장을 하는데 광수형, 나, 누나, 동생이 김치 하나만으로 밥을 먹었다. 너무 맛있었다. 엄마는 마을 이웃들에게도 김치를 주셨다. 엄마는 참 착하시다. 난 김장을 하면 입에 고춧가루가 묻는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고춧가루 묻었다고 한다.”

    앞산에 잔설이 있는 어느 작은 농촌 마을의 아름답고도 정겨운 겨울날의 풍경을 그린 경수의 일기는, 지금 긴박하게 돌아가는 선거 국면과 불안한 남북 문제들이 요동을 치는 우리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먼 곳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려야 한다. 일제 식민지에 이은 분단과 전쟁, 경직된 군사독재 문화, 3김이 키워놓은 이 치욕적인 지역감정, 훼손될 대로 훼손된 민족의 자존심, 이 모든 것을 바로 세워, 저 험난한 민족통일의 새 길을 열어갈 진정한 지도자를 우린 갈망한다. 그리고 그런 지도자를 선택해야 한다. ‘졸아들’ 대로 ‘졸아든’ 우리의 가슴을 활짝 펴게 하고, 진실이 통하는 빛나는 얼굴들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붉은 물결이 세상을 덮던 지난 6월을 잊지 마라.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간 저 사람들 마음속을 흐르는 저 물결을 절대 함부로 하지 말라.

    우리 어머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말(言)로 밥을 하면 조선 사람이 다 먹고도 남는다.” 말로는 무엇인들 못 하겠는가.

    밥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밥은 쌀로 해야 한다. 김장은 경수의 입가에 묻은 고춧가루로 해야 한다. 그리고 맛있는 밥과 김치만 담그면 뭐하겠는가. 경수의 어머니처럼 김치를 이웃과 나눠 먹어야 한다. 그게 진정한 밥이요 반찬이다. 대통령후보들 중에서 누가 진짜 밥과 반찬이 되는 말을 하고 있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보고 듣자.

    교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서리 낀 풀잎들 사이를 흐르는 섬진강에 햇살이 빛난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하얀 입김을 뿜으며 뛰어논다. 푸른 하늘로 청둥오리들이 날아간다. 아이들을 불러들인다. 공부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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