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5

2002.10.17

“나는 위증일 때 미국 벌 받겠다”

이희호 여사 미국 연방법원 ‘선서진술서’ 자필 서명 … 국가 자존심 훼손 논란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2-10-11 15: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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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위증일 때 미국 벌 받겠다”
    "나는 위의 진술이 사실이고 정확하며 (만약 위증일 경우) 미합중국 법에 따른 위증의 벌을 받을 것임을 맹세한다.”(I declare under penalty of perjury, under the law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at the foregoing is true and correct.)

    2001년 12월10일 손해배상청구소송 피고인이 미국 연방법원에 제출한 ‘선서진술서’ 마지막 부분이다. 이 선서진술서에 자필서명한 사람은 이희호 여사였다. 대한민국 대통령 부인이 미국 형사법에 따른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맹세를 한 것이다. 미국에선 한국과 달리 민사소송 피고인의 위증은 형사법 처벌 대상이다.

    한나라당 이신범 전 의원은 금명 발간되는 ‘DJ일가 호화생활 추적기(도서출판 우도)’에서 영부인이 이러한 선서를 했다는 부분을 처음 공개할 예정이다. 영부인이 청와대 직원에게 대리서명케 하는 등 본인의 자필서명을 회피하다가 결국 자필서명하게 된 과정도 공개됐다. 한국 대통령 부인으로선 처음 있는 일이어서 그 경위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전 의원이 내놓은 재판기록에 따르면 이 전 의원은 2001년 7월 이희호 여사, 김대중 대통령의 3남 홍걸씨 등을 상대로 ‘계약위반에 따른 50만 달러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미국연방법원에 제기했다. ‘홍걸씨의 미국 호화생활 폭로 문제’와 관련된 분쟁 끝에, 홍걸씨와 홍걸씨 어머니 이여사측이 이 전 의원에게 소송비용을 변상해주기로 합의서까지 쓴 상태에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원고측 소송사유였다.

    처음엔 영부인 비서실장이 서명



    2001년 9월 청와대에 이여사가 미 법원에 피소된 사실이 통보됐다. 이여사는 피고인 선서진술서를 미 법원에 보냈다. 그러나 이 선서진술서엔 성인숙 대통령 부인 비서실장이 서명했다. 성실장은 “이여사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내가 대신 이여사의 선서진술서에 서명했으니 양해해달라”는 취지의 자신 명의의 ‘선서진술서’와 함께 이여사의 선서진술서를 미 법원에 보냈다. 그러나 미 법원에서 본인이 직접 서명하지 않은 선서진술서는 법적 효력이 없다는 논란이 일자, 이여사는 같은 내용의 선서진술서에 이번엔 본인이 직접 서명해 2001년 12월10일 미 법원에 다시 제출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부인으로서 면책특권이 있으니 자신을 상대로 제기된 민사소송은 기각해달라는 요지였다. 미 법원은 이여사의 면책특권 주장을 받아들여, 2001년 12월17일 이 전 의원 소송중 이여사 관련 부분만 기각했다.

    당시 이여사는 미국에 자신 소유의 어떠한 사유재산도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미 법원은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여사를 상대로 판결을 집행할 수단도 사실상 없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이여사는 미 법원 민사소송에 피고로 제소됐다고 하더라도 재판부나 원고측 요구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여사는 선서진술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 행동을 취했다.

    “나는 위증일 때 미국 벌 받겠다”

    한나라당 이신범 전 의원. 그는 곧 발간되는 자신의 저서에서 대통령 부인의 선서진술서 마지막 문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의혹을 제기했다.

    이 전 의원은 “아들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판 과정에서 당시 미국에 거주중이었던 또 다른 피고인 홍걸씨는 미국이민법위반, 대출서류조작 의혹이 불거지는 등 승소를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여사가 재판에 무대응으로 일관했을 경우 재판이 남은 피고인인 홍걸씨에게 불리하게 흐를 수 있었다는 것. 다음은 이 전 의원의 말. “나는 소송을 제기했을 때 이여사가 피고인 선서진술서까지 제출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여사는 이 행위만큼은 피해야 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미국 부시 대통령 부인이 한국 법원에 법정진술하고 위증 처벌 감수 선서를 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나. 처음엔 대통령 부인 비서실장이 대신 서명하도록 한 사실만 보더라도 청와대 역시 이여사의 선서 행위를 불명예스럽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로펌에서 1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는 헌법 분야 전문 임광규 변호사는 이여사의 선서진술에 대해 “미국 민사소송에서 선서진술은 관례적 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국가의 자주권을 대표하는 대통령의 부인이 외국 형사법으로 처벌받아도 좋다는 선서를 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변호사는 또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공적인 권한을 끌어들여 민사소송 면책이라는 사적 이익을 보려 한 것도 문제의 소지가 있으며, 특히 대통령 부인 비서실장이라는 ‘한국 정부가 임명한 고위공무원’이 외국 법원에다 외국 형법에 따른 처벌을 감수하겠다고 선서한 것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이희호 여사와 성인숙 실장측은 선서진술서와 관련된 질문에 대해 일체 답변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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