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6

2002.08.08

“외국 산 경험 없어도 영자신문 만들어요”

대전 어은초등학교 4년 전부터 연 2회 발행 … 직접 쓴 시·산문 등 엮어 8쪽짜리 신문 ‘척척’

  •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입력2004-10-11 15: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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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 산 경험 없어도 영자신문 만들어요”
    요즈음 학부모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뭐니뭐니 해도 자녀들의 영어공부다. 방학마다 영어 연수를 위해 아이들 손을 잡고 비행기를 타는가 하면, 아예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의 ‘베이비 유학’을 감행하기도 한다. 유학까지는 아니더라도 학원 학습지 개인교사 등을 통해 별도의 영어과외를 하지 않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학부모들의 고민은 어떤 방식으로 영어를 가르쳐도 부모의 기대만큼 아이들의 영어실력이 시원스럽게 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전 어은초등학교 학생들이 이 같은 부모들의 고민에 대해 약간의 해답을 줄 수 있을까? 어은초등학교 학생들은 4년 전부터 매년 2회씩 영자신문 ‘한빛’을 발간해 오고 있다. 올 여름에도 여덟 번째 영자신문이 발행되었다. 8페이지에 9명의 학생들이 시, 기행문, 산문, 만화 등을 실은 간단한 형식의 신문이지만 내용은 결코 만만치 않다. 이 학교의 이기석 교감은 “영어 전담 교사들이 학생들의 작문을 검토한 후 미국인에게 교정을 부탁했으나 고칠 것이 거의 없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대덕단지 위치 … 유학파 부모 많아

    실제로 영자신문에 실린 아이들의 영어 표현도 세련되기 그지없다. ‘붉은 악마의 힘과 한국의 미래(The Power of the Red Devils and Korea’s future)’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4학년 정유진 학생은 ‘외국인들은 한국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발견했다. 이 변화는 곧 한국 상품의 판매에 도움을 줄 것이다(They discovered how Korea was changing. The things that are made in Korea can be sold more than before)’ 같은 영어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외국 산 경험 없어도 영자신문 만들어요”
    어은초등학교는 충남대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사이, 즉 대덕연구단지에 위치하고 있다. 소위 ‘박사동네’에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재학생 1800여명 중 55%가 연구원 또는 교수의 자녀들이며 13%는 해외 거주 경험이 있다.



    그러나 영자신문을 제작한 모든 학생들이 해외에 거주했던 것은 아니다. ‘놀라운 태국(Amazing Thailand)’이라는 영어 기행문을 쓴 6학년 이윤석 학생은 외국에서 산 경험이 없다. 그러나 윤석이는 ‘대부분의 건물들이 금과 보석들로 덮여 있었다(Almost all buildings are covered with gold and jewels)’ 같은 문장을 막힘없이 쓰고 있다. 영어 일기를 쓰고 외국인 선생님에게 영작문을 배우기도 했다는 윤석이는 “영어로 말하는 건 확실히 미국에서 살다 온 아이들과 차이가 나요. 하지만 말 외에 문법이나 작문은 한국에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번 기행문 역시 4월에 가족과 함께 태국 여행 때 썼던 영어 일기를 다듬은 것.

    ‘우리 할머니(Dear Grandma)’라는 영어 작문을 쓴 4학년 박규리 학생도 외국에서 살다 온 경험이 없다. 규리는 학교에서 처음 영어를 배운 후 학원에 다녔다. 규리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문법. 이번 작문도 직접 쓴 후 학원 선생님이 문법적으로 틀린 부분을 약간 고쳐주었다. 규리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영어 공부법은 외국인과 직접 대화하거나 영어 테이프 듣기. 자신이 쓴 작문을 읽는 규리의 발음은 어색한 부분이 거의 없었다.

    반면 ‘비만(Obesity)’이라는 제목의 산문을 쓴 6학년 김민종 학생은 여섯 살 때 1년간 미국 뉴저지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다. 미국 유치원에서 영어 말하기를 배운 민종이는 한국에 와서도 세 살 위의 누나와 영어로 계속 말하려고 애를 썼다. 공부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세계어인 영어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민종이는 미국에서 잠깐이나마 살다 온 것이 영어학습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경험이 중요한 것 같아요. 하지만 한국 와서도 영어 테이프를 많이 듣고 비디오도 꼭 영어로 된 것만 봤어요. 자꾸 보고 들으면 영어는 확실히 늘어요. 엄마는 책도 많이 읽으라고 하시는데 저는 재미있는 영어 만화책 같은 것만 봤어요.”

    “외국 산 경험 없어도 영자신문 만들어요”
    각기 9년, 4년간 미국에서 살다가 온 양재형(6학년), 홍서령(6학년)은 위의 학생들보다 상대적으로 영어에 수월하게 접근한 경우가 분명하다. 미국 미시간에서 태어나 3학년까지 다니다 어은초등학교로 전학온 재형이는 “영어로 글 쓰기가 쉽고 빨라서 일기도 영어로 쓰고 싶은데 엄마가 자꾸 한글로 쓰라고 하신다”고 했다. 과학을 좋아하는 재형이는 ‘로봇(Robot)’이라는 영어 작문을 쓰면서 생각부터 영어로 했다. 영어를 잘하려면 듣고 말하는 것 못지않게 문법이 중요하다는 게 재형이의 생각이다.

    남다른 교육열에 영어실력 뛰어난 편

    영화 ‘스피릿(Spirit)’의 감상문을 쓴 서령이는 미국에서 유치원과 1학년을 잠깐 다니다가 일곱 살 때 한국에 왔다. 한국 학교에 다니면서 영어 공부를 하지 않다가 3학년 때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다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서령이는 특히 영어책 읽기를 좋아한다. 해리 포터는 물론이고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미국에서 발간된 ‘낸시 드류’ 시리즈 같은 것은 빼놓지 않고 읽었다. 서령이는 따로 영어학원에 다니지는 않고 방학 때만 영어 문법을 배우는 정도지만 미국 영화나 만화 비디오를 보면 다 알아듣는다. ‘영어를 잘하려면 꼭 외국에서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서령이는 “이보영 선생님 같은 분은 외국 유학도 안 가셨지만 영어를 잘하시잖아요. 영어를 계속 듣고 책을 소리 내서 읽으면 쉽게 영어를 배울 수 있어요”라고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어은초등학교의 윤동원 교장은 “영자신문 외에도 영어 말하기 대회, 영어연극 등으로 다양한 영어학습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외국에서 살다 온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간의 실력 차이는 있지요.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그것이 더 자극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학교 학생들보다 어른스럽고 자부심도 커요.”

    어은초등학교 학생들이 이처럼 영어를 잘하는 데는 남다른 동네와 교육열 높은 학부모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아이들은 ‘학원에 가야 한다’는 엄마의 독촉전화를 받았다. 학급에서 영어연극을 하면 부모들이 대본을 써주기도 한다. 어은초등학교에 두 자녀를 보내고 있다는 한 연구원은 “학생들간의 실력 차이가 거의 없다 보니 시험에서 한 문제만 더 틀려도 등수가 순식간에 떨어진다. 그런 점 때문에 아이나 부모나 스트레스를 받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영자신문을 만든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해보았다. “서울대학교와 미국의 대학 중 한 군데에 갈 수 있다면 어디를 가고 싶니?” 아이들은 입을 모아 ‘미국의 대학’이라고 대답했다. 다시 “그러면 중학교 갈 때 부모님이 미국 유학을 보내주신다면 갈 거니?”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미국 학교가 한국 학교보다 공부는 덜 시켜요. 하지만 엄마 아빠와 떨어져 사는 것도 싫고요, 저는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한국 학교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유학은 나중에 대학 다닐 때 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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