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1

2002.07.04

‘새로운 대중’이 출현했다

‘고독한 군중’ 아닌 ‘유연적 대중’… 주체와 자율 속 ‘결속의 끈’ 묶는 시민 급증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0-18 18: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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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대중’이 출현했다
    ”대학에 입학해 동아리 선배에게서 들었던 스포츠에 대한 편견이 아직 남아 있는 나에게 ‘붉은 악마’의 등장은 변화의 징조였습니다. 과거 정권은 스포츠를 통해 국민을 눈멀게 하고, 국민을 집단적으로 이용했습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때 동원됐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미소와 붉은 악마들의 함성 사이에서 느껴지는 차이는 자율과 타율에서 오는 인간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합니다.”(프리챌 마스터스쿨 게시판 ‘붉은 악마에게 배우자’에서)

    중앙대 91학번인 김현성씨(30·금강기획 AE·프리챌 마스터스쿨 운영자)는 6월4일 한국 대 폴란드 경기가 치러지는 순간 광화문 거리응원단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곳에는 문명비평가들이 사회에 관심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지나친 개인화를 걱정하는 10대부터 30대까지 가득 모여 ‘대~한민국’을 연호하고 있었다.

    이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들은 공권력이나 금권에 의해 동원된 박수부대가 아니라 제 발로 이 흥겨운 놀이판에 모여든 ‘자율적 집단’이다. 그들에게 스포츠는 놀이이자 자기표현의 장일 뿐이다. 그곳을 정치 선전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붉은 옷을 입고 끼어든 몇몇 정치인은 오히려 야유의 대상이 됐다.

    거리응원단의 뜨거운 열기를 ‘병적 애국심’이나 ‘집단 광기’로 해석하고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지만 지나친 확대 해석인 듯하다. 최상천 전 대구효성가톨릭대 교수(역사교육)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 과거 국가동원 시스템이 주체적 참여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언론은 전쟁용어를 빌려 스포츠를 전투화하고 있지만 한국인들의 의식은 이미 하나의 놀이문화로 받아들일 만큼 성숙해졌다”고 말한다.

    “우리는 힘이 셉니다”



    ‘새로운 대중’이 출현했다
    포르투갈이 한국과의 경기에서 패하자 언론은 이름값을 하지 못한 피구 선수에게 빈정거리는 태도를 감추지 않은 반면, 포르투갈 대사관 홈페이지에는 “피구는 여전히 훌륭한 축구선수다” “2006년 월드컵에서 더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기 바란다”는 한국 네티즌들의 격려 메일이 쇄도했다. 광적인 애국심으로 매도하기에는 너무나 이성적인 태도였다.

    “월드컵은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변화의 계기가 되고 있다. 6월이 되면 자동적으로 한국전쟁을 떠올리는 50대 이상 세대에게 붉은색은 적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30대부터는 독재타도를 외치던 6월항쟁과 붉은색을 동일시한다. 당시 붉은색 깃발은 강요된 국가주의에서 비로소 벗어나기 시작한 집단과 개인의 정체성을 상징했다. 앞으로 6월이 되면 누구나 거리에 물결치던 붉은색과 ‘대~한민국’ 구호를 떠올릴 것이다. 오늘의 붉은색은 자기긍정과 민족적 에너지를 함축한다. 드디어 한국인은 자신을 긍정하고 상대도 포용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다.”(최상천)

    월드컵의 함성이 거리를 채운 6월, 우리는 달라진 한국인을 보고 있다. 그들을 정치적으로 몰역사적이며, 경제적으로 수동적이고, 문화적으로 저급하며 천박한, 익명의 다중으로 몰아세울 수 있을까. 흔히 지식인들은 대중을 산업사회에서 소외되고 획일화된 개인으로 정의하며 그들과 거리를 두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축제에서 소외당한 쪽은 대중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인들이다.

    ‘새로운 대중’이 출현했다
    한국비평이론학회(회장 김우창)를 중심으로 일군의 학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대중’의 출현에 주목하고 있다(상자기사 참조). 고려대 조대엽 교수(사회학)는 “지식 정보사회에서 대중은 다양한 욕구를 표현하고 고정된 조직의 틀을 넘어 활동하는 유연적 대중”이라며 “특히 개인용 컴퓨터의 확대와 고속 통신망의 보급에 따른 인터넷의 일상화는 대중들을 ‘네트워크화된 대중’으로 변화시켰다”고 말한다. 적어도 이들은 ‘고독한 군중’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방민석씨와 박성철씨는 1971년생 돼지띠다. 이들은 8년 전 천리안 띠동호회에서 만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띠 모임이다 보니 회원들이 모두 12년 터울이잖아요. 이르면 초등학교 5, 6학년 때부터 통신을 시작하는데 이곳에서는 할아버지, 아버지뻘 되는 분도 형님 아니면 오빠로 통합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12년 터울로 친구가 된다는 게 불가능하지만 이곳에서는 가능해요. 인생의 대선배와 까마득한 후배 사이에도 공동체 의식이 생기는 것이 재미있죠.”(방민석·돼지띠동호회 시삽) 이 동호회는 철저한 회원관리로 활동이 부진하면 즉각 퇴출시키는 시스템을 가동해 300여명의 회원들이 변함없이 끈끈한 유대를 갖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에 사는 전업주부 안수진씨(30)는 4년 전 결혼하면서 천리안 주부동호회에 가입했다. 이 밖에도 안씨는 남편과 함께 천리안 ‘부부동호회’에 가입하고 요리 취미를 살려 ‘메뉴판 닷컴’ ‘요리동호회’, 다음에 개설된 강아지 키우기 카페 ‘아이 러브 시추’에서도 활동중이다. 최근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육아전문 사이트 ‘해오름’ 내 용인지역 동아리. 지역 내 모임이기 때문에 오히려 오프라인상에서 더 자주 만나는 이웃사촌들이다. 안씨의 인적 네트워크는 웬만한 직장인보다 넓다.

    안씨는 얼마 전 외며느리인 자신이 집안의 우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곳이 ‘주부동’이었다고 말한다. “회원 전용 게시판에 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는데, 그렇게 많은 격려의 글이 올라올 줄 몰랐어요. 특히 인생 선배들의 조언이 큰 도움과 위로가 됐지요.”

    “우리는 고독하지 않아요”

    언론은 주로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범죄나 포르노그래피, 게임중독 등 부정적 측면을 부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반대로 기꺼이 정보를 나누고 도와주려는 친사회적 심리 또한 발달해 있다.

    ‘인터넷 심리학’의 저자 패트리샤 월리스는 “대부분의 경우 단지 몇 명의 이웃들로 이루어진 집단과 일상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데 몰두하지만 상황이나 기회가 된다면 그 모임을 벗어나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과 소통하게 된다. 인터넷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저항 메시지를 더 많이 전달하게 하며 이런 전파만으로도 밑으로부터의 움직임을 촉진하거나 활성화한다”고 했다.

    한편 파편화된 대중사회가 가져온 부작용은 공동체의 붕괴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온라인에 커뮤니티라 불리는 수많은 ‘공동체’가 존재하지만 익명성에 의존하다 보니 일회적 관계 맺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사이버 커뮤니티에는 10대 1의 법칙이 적용되는데, 개설된 커뮤니티 10개 가운데 1개가 성공하고 회원 수가 100명이면 활동하는 회원은 10명꼴로 참여가 저조하다. 그러나 커뮤니티 컨설턴트 김현성씨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진화를 믿는다. 이미 온라인은 오프라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동시에 온-오프의 구분마저 없애고 있다. “1단계는 익명의 사람들이 친목 수준에서 느슨하게 결합하는 형태입니다. 2단계는 유용한 정보를 주고받는 수준이고, 3단계는 커뮤니티의 가치를 공유하면서 결속력이 급격히 강해져 오프라인상의 정기모임이나 각종 이벤트가 활발히 진행되죠.”

    이미 국내 주요 포털사이트에 개설된 커뮤니티 수가 300만개에 이르고,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커뮤니티에서 중복 활동하고 있는 만큼 ‘네트워크화된 대중’의 힘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한 예로 지난해 6월 방송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 폐지운동을 벌여온 서태지 팬클럽과 시민단체는 서태지를 광고모델로 기용한 기업에 압력을 가해,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 내보내던 광고를 중단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글동호회는 97년 ‘아래아한글’ 개발 포기선언이 있었을 때 ‘아래아한글 살리기 국민운동’을 위해 만들어진 한글사랑회를 모체로 태어났다. 국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한컴사가 다시 개발을 결정하면서 98년 네티앙에 온라인 ‘한글동호회’가 설립됐다. 웹디자인이나 출판에 종사하는 전문가 그룹을 주축으로 10대 중학생부터 교사, 60대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사용자층이 참여하고 있다. 특정 회사 제품을 적극 지지하는 만큼 이들의 목소리는 높다.

    “한글워디안이 출시되기 전 한글동호회 회원들과 한컴 개발자들이 만나 프로그램의 장단점과 기능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고, 신제품의 베타버전이 출시되면 한글사랑회와 동호회 회원들이 먼저 테스트해 보고 오류나 기능상의 개선점 등을 제안하죠. 특히 워디안과 아래아한글 2002를 거치면서 회원들의 제안이 상당부분 제품에 반영됐어요.”(한글동호회 시삽 안수혁)

    이런 현상은 대중이 대량생산 체제에서 대중매체의 일방적 정보를 수용하고 소비자라는 지위에 만족한다는 정의에도 수정을 요구한다. 오히려 이들은 제품의 생산과 판매 전 단계에 영향을 끼치는 무서운 소비자(프로슈머)로 변해가고 있다.

    배타적 아파트에서 새로운 싹

    새로운 대중의 출현과 공동체 만들기 실험은 현실세계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역설적으로 아파트라는 가장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주거공간에서 새로운 공동체 문화의 싹이 트고 있다. 지난해 말 서울시 종합평가에서 최우수 아파트 단지로 선정된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성원아파트의 경우, 입주자대표회의 이성권 회장(60)을 중심으로 487가구 주민들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과 투명한 의사결정 방식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모든 의사결정은 입주자대표회의와 부녀회의 만장일치로 이루어진다. 결과적으로 가구당 월 4만~5만원의 관리비 절감과 부동산 가격 상승 등 경제적 혜택이 컸을 뿐만 아니라 1등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주민들을 똘똘 뭉치게 했다. “아무도 이사 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아예 매물이 없어요.”(이성권 회장)

    참여연대에서 ‘아파트시민학교’를 진행하고 있는 심현천씨(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 아파트 팀장)는 “1980년대 후반 지어진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하자 보수에 대한 불만 때문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아파트 공동체가 이제 도시 속의 ‘마을공동체’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인다”고 말한다. “아파트 공동체는 작은 정부예요. 입주자 대표 3년 하면 지방의원 3년 한 것과 마찬가집니다.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기초의회에 진출하면 자연스럽게 아래로부터의 자치가 이뤄지는 것이죠.”

    “요즘 젊은이들은 비정치적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가장 정치적이죠. 이들은 과거처럼 정권 타도나 통일, 민중과 같은 거대담론 대신 부당한 세금이나 환경문제와 같은 우리 생활 속의 문제에 입장을 분명히 할 뿐입니다.”(김현성)

    ‘붉은 악마’를 중심으로 월드컵 기간 내내 펼쳐진 거리응원전은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대중’을 발견하게 했다. 이제 그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어디에 쓸 것인지가 우리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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