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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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다! 23인 전사여… 그리고 4700만이여”

한민족 자긍심 일깨운 ‘6월의 축제’ … “가슴 벅찬 이 감동 영원하기를”

  • < 최영미/ 시인 >

    입력2004-10-18 17: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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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하다! 23인 전사여… 그리고 4700만이여”
    사랑해요, 히딩크!

    당신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어요.당신이 그렇게 강한 줄 몰랐어요.사랑한다. 김남일. 사랑한다. 지성, 설기현, 송종국, 이영표, 홍명보, 황선홍, 유상철, 이운재, 최진철, 김태영, 이을용, 안정환, 이천수, 차두리…. 얼어붙은 줄 알았던 내 가슴에 불을 지핀 당신. 우리의 한 맺힌 응어리를 풀어준 당신.지루한 일상의 굴레를 벗고, 오래된 고독과 고통을 털어버리고 그리하여 우리를 우리이게 한 그대들.

    감격에 겨워 나는 그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감격에 겨워 나는 문장을 만들지 못한다. 문장을 포기하고 느낌표만 찍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이름들, 나를 사로잡았던 얼굴들을 그리며잊지 못할 장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마냥 환희에 도취하고프다.월드컵 4강 진출의 신화를 목격한 저녁, 어떻게 내가 제정신으로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마지막 공이 아슬아슬하게 그물망에 걸리는 순간, 텔레비전을 보던 나는 소리를 질렀다. 침대 위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메마른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드디어 해냈구나. 편파 판정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물리치고 당당히 우리의 실력을 입증한 쾌거라 더 기뻤다.

    4강이라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내 눈이 의심스러운 나는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한다. 아슬아슬한 승부차기 장면을 보고 또 본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았다. 앞으로 백 번을 보아도 처음처럼 신나고 흐뭇하리라.



    그동안 우리 청년들이 흘렸던 땀과 피는 헛되지 않았다. 온갖 설움과 역경을 극복한 그들의 인간승리에 박수를 보내며, 나는 단지 우리의 태극전사들이 스페인을 이기고 4강 진출에 성공해 기뻤던 건만은 아니다.

    평소 나는 애국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오사카에서 런던에서 뉴욕에서… 초록색 여권을 들고 공항의 출입국 심사대 앞에 서면 왠지 오그라들던 나였다. 내가 나고 자란 조국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는 부끄러워한 적이 더 많았다. 기회만 있다면 쓰라린 상처와 환멸로만 기억되는 이 땅을 떠나 외국에 나가 살 꿈을 꾸었던 내가, 한국인이기 전에 세계시민임을 강조하던 내가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다니…. 나는 나에게 감동했던 것이다. 나의 아버지, 나의 조국과 화해하는 순간이었다.

    만일 이 기세로 결승까지 올라간다면, 태극기가 요코하마경기장에 거대한 파도처럼 펄럭이는 그날은 제2의 광복절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일본열도를 뒤흔드는 함성이 우리를 진정으로 해방시키리라. 나라를 잃고 언어를 잃고 자존심을 빼앗겼던 굴욕의 세월들, 전후세대인 우리는 잊었지만 우리의 실핏줄 어딘가에 아직도 도사린 찜찜한 식민지 백성의 콤플렉스를 한방에 날려보내리라.

    생각만 해도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바짝 현실로 다가온 꿈을 걷어내며,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창문을 연다. 귀에 익은 리드미컬한 경적소리, 소리는 소리를 부른다. 우리 동과 마주보는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 아이들이 나와 손뼉을 치고 함성을 지른다. 서로 화답하는 소리들과 거리를 질주하는 붉은 티셔츠들. 조용하던 신도시가 깨어난다.

    나는 나를 이기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간다. 백화점 앞 공터에 젊은이들이 모여 노래하며 춤을 춘다. 그래 실컷 즐겨라. 입시지옥에 갇혀, 먹고살기 바빠… 애들은 애들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삶의 여유를 누리지 못했던 불쌍한 한국인들. 언제 우리가 이렇게 마음껏 풀어헤치고 논 적이 있던가. 유럽의 도시에서나 봄직한 풍경이 내 눈앞에서 전개된다는 게 신기하고 뿌듯했다. 이제 유럽 어디를 다녀도 부럽지 않겠구나. 2002년 6월부터 대한민국이 바뀌는구나.

    감회에 젖어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저 높이 빌딩에 걸린 붉은 황혼이 보였다. 영원히 잊지 못할 저녁의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열광하는 군중들에 묻혀 다니다 가방을 잃어버렸다. 하나밖에 없는 배낭이지만 아깝지 않았다.

    잠 못 이룬 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에 나는 냉정히 되짚어본다. 열광은 짧다. 보여주기 위한 거품은 걷히고, 잔치는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뛰어난 외국 감독을 영입해 1년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세계적인 팀으로 거듭난 한국 축구는 외자를 유치해 단기간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한국 경제와 닮은꼴이 아닌가. 빠른 스피드와 체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 축구는, ‘빨리 빨리’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 IMF라는 암초에 걸린 한국 경제처럼 언제 허점을 내보일지 모른다. 월드컵이 끝나면, 히딩크가 사라지면 우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지 모른다.

    이런 나의 걱정이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일말의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 진정한 세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우리의 축제가 계속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뜨거운 6월이 지난 뒤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그리고 꼭 하나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다. 월드컵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자.

    우리 선수들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늘 보게 되는 어색한 장면이 나를 슬프게 한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선수들의 긴장된 모습을 배경으로 어깨에 붉은 스카프를 두른 신사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힌다. 대한축구협회 정몽준 회장이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화동들의 얼굴을 한 번씩 매만진다. 악수 한 번에 얼굴 한 번… 반복되는 기계적인 동작이 자연스럽지 않았다(스페인과의 경기를 앞두고는 화동들의 얼굴과 어깨를 교대로 어루만져 변화를 꾀했다).

    4700만 우리 국민과 마찬가지로 나는 월드컵을 유치해 우리에게 크나큰 기쁨을 선사한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다.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그가 계속 축구인으로 남는다면, 그는 내가 존경하는 최초의 재벌2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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