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0

2002.06.27

아버지·할머니 연속 살해 왜?

권위에 눌렸던 아들 분노 폭발한 듯… 상습적 폭력 혹은 무관심 부모가 원인 제공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 최영철 기자 > ftdog@dogna.com

    입력2004-10-14 15: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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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할머니 연속 살해 왜?
    월드컵 16강 진출을 가르는 경기를 앞두고 전국이 달아올랐던 6월14일 오후 3시. 경기도 분당경찰서 과학수사반에는 아버지와 친할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붙잡힌 이모씨(23·S대 영문학과 3년 휴학)가 4시간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심리분석실 요원들로부터 집중 추궁을 당하고 있었다. “왜 죽였어?” “….”

    이를 지켜보던 이씨의 어머니 우모씨(46)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든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눈가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눈물로 젖어 있었다. 자신의 남편과 시어머니가 아들 손에 죽고, 그 아들 또한 지금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서 있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왜소한 체구에 갸름한 얼굴, 항상 뭔가에 골몰하고 있는 듯한 눈빛의 이씨는 아버지와 친할머니를 단숨에 살해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방화까지 한 범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이씨에게 쏟아진 수사관과 기자들의 질문은 그를 더욱 혼돈에 빠뜨리고 있었다.

    지난 6월10일 오후 2시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한 아파트 거실에서 K대 경영학부 이모 교수(47)와 어머니 전모씨(72)가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이교수는 예리한 흉기에 목과 옆구리, 가슴을 세 차례 찔렸고, 전씨는 왼쪽 폐 부위를 찔린 채 거실 바닥에 나란히 누워 있는 상태. 이불에 덮인 시체와 거실은 불에 타 심하게 그을려 있었다.

    아버지·할머니 연속 살해 왜?
    다음날인 11일 경찰 조사결과 밝혀진 범인은 바로 이교수의 장남인 이씨였다. 이씨는 10일 오전 3시30분쯤 집에 들어가 스키폴대에 묶어놓은 2개의 흉기로 자고 있던 아버지를 수차례 찔러 살해한 뒤 비명을 듣고 거실로 나온 할머니마저 엉겁결에 찔러 숨지게 한다. 아버지와 할머니를 죽인 날 오전 6시까지 집에 있다가 서울에 사는 여자친구 김모씨(21)를 만나 그녀의 여권 발행을 도운 뒤 집으로 돌아온다. 사건현장을 은폐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이씨는 오후 1시쯤 이교수의 승용차를 몰고 서울 송파구 일대 주유소 3곳을 돌며 휘발유를 사서 아버지와 할머니의 시체와 집 안에 뿌려 불을 지른 후 친구를 만나 알리바이를 조작하려 했다.



    하지만 이씨는 너무나 쉽게 잡혔다. 집 안을 뒤지거나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전혀 없는 점을 수상히 여긴 경찰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자 순순히 범죄사실을 자백했다. 문제는 범행동기. 경찰이 밝힌 이씨의 범행동기는 명문학교를 나온 아버지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치 못한 장남 간의 갈등. 경찰조서에 나타난 이씨의 진술도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을 나온 아버지는 항상 기대에 못 미치는 저를 책망했습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의 잔소리가 싫어졌고, 아버지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 입대를 앞두고 늦은 시간에 귀가하다 보니 아버지의 잔소리는 더욱 심해졌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폭발했습니다.”

    하지만 살인 후 극도의 공황상태에서 한 이씨의 진술은 일관성이 없다. 경찰의 1차 진술에서 자고 있던 아버지를 미리 준비한 흉기로 살해했다며 ‘계획범죄’를 주장했던 이씨는, 12일 현장검증이 있은 후 “친구들과 술을 먹고 들어왔는데 술에 취한 아버지가 뒤통수를 때리며 2시간 동안 옛날 일을 모두 들춰내 나무라자 순간적으로 일을 저질렀다. 꾸중을 들은 뒤 방에 들어가 타이레놀 13알을 먹었지만 정신은 더욱 혼미해졌다.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아버지를 죽이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며 진술을 번복한다. 즉 우발적 범행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순간의 꾸중과 학업부진에 대한 핀잔 때문에 아버지와 할머니를 잇따라 살해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존속살인의 피의자들이 그랬듯, 이씨는 자신의 범행동기를 설명할 준비나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다만 분명한 점은 이씨를 제외한 가족들이 대부분 명문학교를 나온 수재형이라는 점과, 그가 학교생활과 사회생활 모두에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숨진 이교수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 회계학 분야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씨의 작은아버지 역시 대학교수고 할머니는 유치원 원장, 이모와 이모부도 대학교수일 만큼 엘리트 집안. 10대 초반인 두 동생은 미국 유학생활을 하며 착실히 학업에 정진하고 있고, 어머니는 미국에 체류하면서 이들의 유학생활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반면 2남1녀 중 장남인 이씨는 가족과 함께 미국에 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국내로 들어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학교를 마친 뒤 다시 미국으로 갔으나 이번에도 적응에 실패, 다시 국내로 들어와 검정고시를 하는 등 내내 열등감에 사로잡혀 지냈다.

    방황은 그 후에도 계속된다. 검정고시로 고졸 자격을 얻은 이군은 밴쿠버에서 현지 전문대학을 다니다 그만두고 한국에 들어와 세 번의 대학진학 시험에서 실패한다. 그러던 이씨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2000년. S대 영문학과에 토익성적으로 특례입학했지만 아버지와 집안으로부터는 축하받지 못했다.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이씨는 중학교 시절 완전히 다른 방식의 교육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외국을 들락거리는 사이 친구를 사귈 여유가 없었다. 친구라고 해야 잠시 만나는 정도일 뿐 마음을 터놓을 상대가 없었다고 한다. 자신의 고민이나 취미를 같이할 심리적 탈출구가 전혀 없었던 셈이다.

    어머니 우씨도 “왜 아들이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와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그게 전부였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씨는 “내가 옆에 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이씨의 구명을 호소했다. 비록 1년밖에 안 됐지만 자신이 집에 없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특히 할머니의 살인 부분은 더욱 의문이다. 살인현장을 들킨 것에 대한 방어살인이라는 게 경찰의 결론이지만 어머니 우씨가 말하는 할머니는 손자에게 너무나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장손이라 땅에 발 붙일 틈이 없을 정도로 할머니의 사랑을 받았다. 다른 곳에서 하룻밤 잘 때도 할머니가 보고 싶어 울 만큼 아이는 할머니를 좋아하고 사랑했다.”(어머니 우씨)

    그렇다면 이씨가 아버지와 친할머니를 잔인하게 살해한 진짜 이유는 뭘까. 또 과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범행 후 이성을 잃어버린 이씨와 가족들에 대한 지속적인 조사가 있어야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겠지만 전문가들은 다양한 측면에서 원인을 분석한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부자(父子)관계를 설명한 책 ‘한국의 아들과 아버지’의 저자인 김영진 원장(대전중앙신경정신과)은 “언론에 보도된 사건개요만 보더라도 우수한 아버지 대 열등한 자식, 해외유학 실패, 어머니의 부재, 장남 콤플렉스 등 사건의 원인은 복합적”이라고 말한다.

    “유소년기에는 아버지가 거대해 보이다가 어느 날부터 아버지의 어깨가 작고 초라해 보이기 시작할 때 자식은 어른이 된다. 그런데 아버지가 너무 뛰어나 늘 넘지 못한 벽이요 거대한 상으로 남아 있다면, 자식은 주눅 들어 성장하지 못한다. 게다가 아버지의 꾸중이 잦거나 지나치게 엄할 경우 분노가 조금씩 누적되다 어느 순간 용암이 분출하듯 발작을 일으킨다. 이씨가 살인을 저질렀을 당시 단순히 화가 난 게 아니라 무언가 감정적 폭발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때는 달래고 참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끝장을 보려 하기 때문에 폭력적인 상황이 벌어진다.”(김영진)

    ‘위대한 아버지와 아들의 초상’(상자기사 참조)을 번역한 안인희씨는 “역사적인 부자관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아버지가 자식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아들의 생명 일부를 파괴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라고 했다. 성공한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너무 급하게 세상의 이치를 알려주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숙해 가는 법. 아버지가 일러준 지름길로만 가다 보면 자식은 곧 한계에 부딪힌다. 대개 성공한 부모의 자식들이 겪는 불행이다.

    김영진 원장은 “이씨가 외국을 오가며 제대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존재의 불안감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부모는 자식의 장래를 위해 유학을 보냈겠지만 이 경우 자식은 부모로부터 거부당했다는, 일종의 추방으로 받아들인다. 어디에도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는 불안감에다 군 입대는 더더욱 심리적 압박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입대를 열흘 앞둔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권위적인 아버지의 그늘에 있던 자식에게 군대는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으로 겹쳐 두려움을 가중시킨다. 이씨가 평소 온순한 성격이었다면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겉으로는 시키는 대로 다 하는 ‘병적 순응주의’였을 것이다. 그것은 노예심리와 비슷하다. 과잉 복종하는 듯하다가 기회만 있으면 폭도로 변한다.”

    이번 교수 모자 살해사건은 94년 부모를 죽이고 불을 지른 박한상(범행 당시 23세로 이군과 동갑) 사건이나 95년 김성복 교수의 살부(殺父)사건, 2000년 이은석(당시 25세)의 부모 토막살해사건보다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월드컵 축구대회 탓도 있지만 잇따른 존속 살해사건에 대해 우리 사회가 그만큼 무감각해진 탓인지 모른다. 그러나 국가적 차원에서 사건의 원인을 철저히 밝혀내고 예방책을 마련하지 않는 한,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가정에서 용광로처럼 끓던 분노가 어느 날 갑자기 분출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이 문제를 우려하고 있다.

    “요즘 소아정신과에는 부모에게 폭력을 가해 찾아오는 아이들이 많다. 초등학교 5, 6학년 정도의 아이가 갑자기 어머니에게 ‘미친×’라고 욕을 하거나 실제 때리지는 않아도 주먹을 휘두르면, 그냥 야단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 부모 자식 간의 뒤틀린 관계를 의심하고 치료를 해야 한다. 아이의 주먹질은 ‘전조 증상’이다. 그런 분노가 누적됐을 때 이번과 같은 끔찍한 사건이 벌어질 수도 있다.”

    소아정신과 전문의 신의진 교수(연세대)는 아이의 폭력 뒤에는 반드시 원인 제공자가 있다고 말한다. “폭력을 휘둘러 정신과에 온 아이들과 상담해 보면 그들도 폭력의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부모의 손찌검 같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어도 가정에서 상습적인 언어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부모로부터 가장 자주 듣는 말이 ‘죽어라’ ‘너 같은 놈이 살아서 뭐 하냐’ ‘같이 죽자’라고 한다.”

    김영진 원장도 최근 교사를 폭행해 퇴학 위기에 몰린 남학생(고 2)과의 상담에서 원만치 않은 부자관계가 원인이었음을 발견했다. “수업 도중 교사로부터 꾸지람을 듣자 이 학생은 친구들이 말릴 새도 없이 뛰쳐나가 선생님을 마구 때렸다. 순간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는 매우 이성적이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 ‘눈 밖에 난 자식’을 야단치거나 때리는 대신 무관심으로 대했다. 아이가 분노를 표출한 담임선생님은 대체적 아버지였던 셈이다.”

    김원장은 냉정하고 애정표현을 거부하는 아버지가 자식을 극단적으로 내향적이고 불안정하며 적극성이 결여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냉정함 혹은 무관심은 아들에 대한 일종의 ‘거부’ 표현이다.

    단지 유산상속을 위해 부모를 살해한 박한상씨(사형)를 제외하고 살인자 이전에 가정폭력의 희생자였던 김성복 이은석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은석씨 사건을 맡았던 최용근 변호사는 “자식이 부모를 폭행했을 때는 돈 아니면 반드시 다른 이유가 있다. 이번 사건도 돈이 원인이 아니라면 양쪽(아버지와 아들) 모두 원인 제공자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씨에게 아버지와 할머니를 죽일 수밖에 없는 ‘다른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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