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9

2002.06.20

‘광고 간판’ 걸쳐 입은 로마 황제

  • < 노성두/ 미술사가·서울대 미학과 강사 > nohshin@kornet.net

    입력2004-10-13 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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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고 간판’ 걸쳐 입은 로마 황제
    1863년 4월20일 로마 북쪽 프리마포르타 인근에서 리비아의 전원별장 폐허를 발굴하던 이탈리아 고고학팀은 갈대 숲 무성한 늪지에서 진귀한 보물을 하나 건진다. 리비아의 둘째 남편이자 로마의 첫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근사한 대리석 조각이었다. 진흙을 털어내자 갑옷을 차려입은 황제가 미끈한 자태를 드러냈다. 대리석 입상은 키가 2m도 넘는 데다 오른쪽 손가락이 하나 떨어져 나간 것만 빼면 거짓말처럼 완전한 상태였다.

    먼저 얼굴 생김새와 머리 모양을 살펴보니 틀림없는 아우구스투스였다. 그런데 황제의 갑옷 차림새가 너무 생소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소탈하고 검약하기로 소문난 통치자다. 원로원이 독재관 칭호를 붙여준대도 싫다며 첫째 시민 ‘프린켑스’(Princeps)라는 이름으로 만족하고, 바깥나들이 할 때도 대문 자물쇠조차 채우지 않을 만큼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는 서민형 정치지도자가 아닌가? 더구나 그때까지 알려진 아우구스투스의 공식 초상 조각은 로마시대 시민 정장인 토가투스 차림이거나 머리 위로 토가투스의 옷자락을 끌어올린 대제사장 복식이 전부였다.

    ‘광고 간판’ 걸쳐 입은 로마 황제
    그런데 웬 땀냄새 전 군복 차림? 100년 넘게 피로 범벅된 내전을 종식하고 ‘아우구스투스식 평화’(Pax Augusta)의 도래를 선언한 게 겨우 엊그제인데,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야전사령관 군복을 입다니? 이것은 무엇보다 공공 전시 조각을 통해 전쟁 승리자보다 평화 수호자로 이미지 업그레이드를 시도했던 아우구스투스의 통치전략과도 안 맞는 일이었다. 또 웃도리는 제대로 걸쳤는데 투구와 군화는 어디 갔는지, 짧게 친 군인머리에다 맨발을 하고 있으니 궁금증이 더 깊어졌다. 또 황제의 다리께에 찰싹 붙어 있는 꼬마의 정체도 수수께끼였다.

    꼬마는 날개를 달고 있어 큐피트로 밝혀졌다. 큐피트가 올라탄 돌고래는 원래 비너스를 섬겨야 자연스러운데 아들이 타겠다니 잠시 대여해 준 모양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와 큐피트는 무슨 관계일까? 2000년 전 로마 사람들한테 묻는다면 “아, 그거 상관 있지”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것이다. 사실 여기엔 좀 낯뜨거운 사연이 있다.

    옛날에 사랑의 여신 비너스가 봄바람이 나서 트로야의 미남자 안키세스와 정분난 일이 있었다. 그때 덜컥 임신을 해 낳은 아들이 로마의 단군 할아버지 아에네이스다. 그가 불타는 트로야 도성에서 도망칠 때 데리고 나왔다가 나중에 왕위를 물려준 아들이 아스카니우스, 로마인들이 율루스라고 불렀던 인물이다. 율리우스 씨족이 바로 자기네 할아버지라고 우겼던 인물이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율리우스 가문의 핏줄은 비너스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억지 논리이긴 해도 비너스의 돌고래에 큐피트가 올라타고 황제의 공식 초상 옆에 따라붙은 것은 아우구스투스야말로 카이사르의 적통을 이어받은 율리우스 가문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속뜻이 숨어 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에게 비너스의 피는 한 방울도 안 섞였지만.

    그렇다면 맨발은? 이건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상징이다. 신들은 원래 신발을 신지 않는 법이다. 다만 후대의 황제들은 하나같이 죽고 나서 신격화되었는데, 아우구스투스만 생전에 서둘러 자신의 신격화를 허용했다는 것이 좀 별스럽기는 하다.

    그러면 투구는 왜 벗었나? 이건 전쟁 종결의 선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투구뿐만 아니라 권위와 영광을 상징하는 왕관 같은 것도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굳이 써야 할 때는 떡갈나무 잎관이나 올리브 잎관으로 대신했다. 겸손을 가장한 황제의 ‘왕관 안 쓰기 전통’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져 후대 로마 황제들에게서도 왕관 쓴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물론 고대 로마 황제의 권위를 흉내낸 게르만의 신성로마 황제들은 보석을 주렁주렁 붙인 누런 금관을 꼬박꼬박 챙겨 썼지만.

    ‘광고 간판’ 걸쳐 입은 로마 황제
    프리마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에서 가장 눈길 끄는 것은 단연 흉곽이다. 대개 쇠를 얇게 두드리거나 가죽을 무두질해 만든 장식 갑옷은 황제나 원정사령관이 걸치는 공식 전투 복장이다. 다른 흉곽들을 보면 아무것도 없이 밋밋하거나 기껏 메두사 머리를 가슴 복판에 하나 붙이는 게 고작인데, 여기서는 자리가 비좁다고 부조 그림을 빽빽하게 새겨 넣었다. 무슨 사연일까?

    먼저 흉곽 한복판에 투구 쓴 로마 장교와 맨머리의 야만인 장수가 마주 서 있다. 야만인이 독수리 장식이 붙은 깃발을 건네준다. 이 사건은 파르티아가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로부터 탈취했던 로마 군단기를 기원전 22년 티베리우스를 통해 돌려주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동방 제국이 먼저 로마에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한 것이다. 그런데 로마 장교는 누구일까? 군단기를 회수하러 갔던 티베리우스다, 로마를 상징하는 로물루스다, 또 아우구스투스가 양부 카이사르의 암살자에 대해 복수를 서원했던 ‘복수의 마르스신’ 마르스 울토르(Mars Ultor)다, 여러 말이 많지만 그냥 로마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보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군단기 회수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로마는 지금껏 무수한 대외 원정과 무력을 통한 정복정책을 고수해 왔다. 그런데 페르시아의 ‘강성 제국’ 파르티아가 먼저 ‘햇볕정책’을 꺼내들고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로마 정복사를 통틀어 가장 수치스럽게 빼앗겼던 로마의 독수리 군단기를 아무 대가 없이 돌려주면서! 이 일은 곧 로마 안에서 비상한 화젯거리로 떠오른다. 항상 제국의 동쪽 경계 다뉴브강 건너쪽에 근심이 많았던 아우구스투스로서도 손 안 대고 코를 풀었으니 얼마나 개운했을까? 꾀쟁이 황제가 군단기 회수 사건을 아우구스투스식 평화선언과 연결지을 생각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흉곽 부조 좌우에는 여인들이 앉아 있다. 로마에 굴복한 서쪽 켈트족과 동쪽 게르만족은 조공을 바치거나 무장해제된 모습으로 흉곽의 옆구리에 붙었다. 또 군단기 회수 장면 아래쪽에 앉은 여인은 대지의 여신으로 보인다. 이삭을 엮은 두툼한 관을 머리에 두른 대지의 여신 텔루스는 양쪽 가슴을 푸짐하게 풀어놓고 아기 둘에게 젖을 먹이는 참이다. 또 과일을 가득 채운 큼직한 원뿔 보퉁이를 세워서 붙들고 있는데 이것은 대지의 품에서 쏟아낸 풍요를 뜻한다. 호라티우스의 시구 “황금의 풍요(Aurea Copia)가 원뿔 보퉁이를 흔들어 차고 넘치는 열매를 이탈리아에 흡족히 쏟아놓네”가 절로 떠오른다(호라티우스, epist. I, 12, 25~29). 대지의 여신 텔루스가 들고 있는 풍요의 원뿔은 틀림없이 금색으로 칠해졌을 것이다.

    옆구리의 야만족 켈트와 게르마니아 아래쪽에는 그리핀을 올라탄 아폴론과 암사슴을 부리는 디아나가 달려온다. 모처럼의 화해와 평화를 축하하려고 서두르나 보다. 흉곽 위쪽에는 하늘 천막을 활짝 펼쳐든 하늘의 신 카일루스(Caelus)가 왼쪽으로부터 날아오르는 태양신 솔(Sol)의 네 마리 천마를 보듬고, 맞은편에는 달의 여신 루나(Luna)가 이슬 물병을 들고 날개를 펼친 새벽 여명의 여신 아우로라(Aurora)의 등에 업혀 뒷걸음질친다.

    흉곽의 어깨 장식에는 스핑크스가 암수로 짝을 맞추어 두 마리나 붙었다. 수놈은 이집트산, 암놈은 그리스산이다. 스핑크스는 원래 파수꾼 역할이니, 비로소 도래한 로마의 황금 시대의 문턱을 지키려고 온 모양이다.

    군단기 하나 돌려받은 일을 두고 천지신명과 일월광명이 떼지어 축복했다는 식이니 못 말리는 뻥튀기 수준이다. 그러나 로마의 역사에 신들이 참견하기 시작하면서 정복사는 구원사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다.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로마의 금빛 평화도 영원히 바래지 말라는 황제의 바람이 흉곽 부조의 빛나는 표상으로 새겨진 것이다.

    프리마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는 치세의 업적과 평화의 상징을 덕지덕지 붙이고 공공 조각으로 등장했다. 맨발에다 투구까지 벗었다. 돌고래에 올라탄 아기 큐피트도 덤으로 붙여놓았다. 한마디로 걸어다니는 광고 간판이다. 오랜 내전에 지친 로마인들에게 평화는 황금보다 더 절실했을 것이다. 숙원했던 평화의 세기를 연 아우구스투스에게 이보다 더 자랑스러운 치적이 있을까? 그랬기에 다소의 면구스러움을 무릅쓰고 로마제국 9시 뉴스 톱 타이틀 광고 간판을 걸쳐 입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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