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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중년들 가슴 떨리게 하는 ‘그때 그 목소리’

명아나운서 임택근·이광재씨 30년 만의 해후 “한국팀 선전에 신바람… 말이 술술 풀렸죠”

중년들 가슴 떨리게 하는 ‘그때 그 목소리’

중년들 가슴 떨리게 하는 ‘그때 그 목소리’
40대 이상 중년들의 가슴을 여전히 떨리게 하는 목소리가 있다. 바로 1950∼60년대 라디오시대를 풍미했던 임택근(71) 이광재(69) 아나운서. 그들이 돌아왔다. 40여년 전 KBS 선후배 아나운서로 만나 1964년 임씨가 MBC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두 방송사의 양대 산맥으로 온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이들이 월드컵을 계기로 다시 중계석에 앉은 것.

임씨는 이미 MBC 라디오를 통해 개막전과 우리 국가대표팀의 대(對) 폴란드전을 중계했고, 이씨는 미국전과 포르투갈전의 중계를 맡는다. 1970년 이씨가 미국으로 떠난 이후 32년 만에 만난 왕년의 스타급 아나운서들이 추억의 순간들을 뒤돌아보았다.



“10대 0 지는 게임 중계하며 혼쭐”

임택근: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본 이광재씨는 굉장히 정열적인 사람이었어요.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열정적인 방송을 해서 대중의 인기를 끌었죠.



이광재: 선배도 같은 열정이 있었지만 한 톤 낮게 장내 묘사를 정확히 했지요. 애드리브가 뛰어났어요.

임: 이광재씨가 대학교 2학년 때 입사했나요? 나는 1학년 때 들어왔어요. 우리가 대학생 아나운서의 효시였지요. 내가 몇 년 먼저 시작했지만 그때 중계하러 같이 다녔잖아요. 내가 전반 맡으면 이광재씨가 후반전 중계하고. 그때 참 많이 했어요. 복싱 농구 배구, 그러다 아시아경기대회 가면 럭비도 했다가 육상도 했다가 마라톤도 하고….

중년들 가슴 떨리게 하는 ‘그때 그 목소리’
이: 도쿄올림픽 기억나세요? 역도장에서 관중들 모두 숨죽이고 있고 선수들이 호흡 가다듬으며 ‘얏’ 하고 들어올리는데, 그 조용한 중계석에서 낭랑하게 들려오는 건 임택근 아나운서와 제 목소리뿐이었지요.

임: 그래요. 내 목소리도 왕방울 소리처럼 크지만 이광재 아나운서는 나보다 더 컸어요. 나중에는 본부석에서 중계석 좀 조용히 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으니까. 이광재 아나운서는 멘트가 굉장히 열정적이죠. ‘대한의 건아, 화랑의 아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하면 청취자들로부터 “와∼” 하는 함성이 나왔어요.

이: 그때 라디오 중계 인기가 대단했지요. 다방에서는 텔레비전 틀어놓고 입장료 받았어요. 한번 들어오면 경기 끝날 때까지 다른 손님을 받을 수 없으니까요. 도쿄올림픽 때 우리가 축구 예선에서 10대 0으로 진 거 기억나세요?

중년들 가슴 떨리게 하는 ‘그때 그 목소리’
임: 내가 그거 중계하면서 아주 혼쭐났어요. 우리가 전·후반 나눠서 했지요? 10대 0으로 이집트한테 지는데 맥이 빠지더군요. 중계방송 끝나는 대로 짐 싸서 집에 가고 싶었어요.

이: 경기에 지면 우리도 도매금으로 같이 넘어가죠. 그때 10대 0으로 지니까 내가 “이건 축구 스코어가 아니라 농구 스코어입니다” 이렇게 말했어요. 다음날 그 멘트가 신문에 대서특필 됐었지요.

임: 이광재씨가 복싱경기로 데뷔했지요?

이: 예. 아마추어 복싱선수권대회였어요. 원래 임택근 아나운서와 같이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임택근 아나운서가 포항으로 출장을 갔어요. 아나운서 실장이 “혼자 할 수 있겠냐?”며 묻더군요. 제가 어리벙벙하니까 염려가 됐던 거죠. 근데 한번 해보래요. 하다가 영 횡설수설하고 안 되겠다 싶으면 “현장 상태가 좋지 않아 중계를 마치겠습니다” 하고 끊을 테니 마음놓으라면서요. 근데 끊기지 않고 한 시간 반을 했지요.

임: 그때 성공적인 데뷔를 했어요. 대개 첫 데뷔에서 소질 없는 사람은 죽을 쑤는데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권투중계를 처음 맡았는데 “탁!탁!탁! 여러분이 지금 듣고 계신 이 소리는 두 선수가 치고받는 소리입니다” 하고 끝낸 적도 있어요. 자유당 때 이야기인데, 빨리 말하는 연습 한답시고 서대문에서 동대문까지 전차 타고 좌우 양쪽에 있는 간판을 빼놓지 않고 중얼중얼 외웠어요. 그러니까 전차 탄 친구들이 정신병자라고 손가락질했어요. 내가 알기로는 이광재씨도 연습벌레였지.

이: 다른 업무 제쳐두고 나가서 스포츠중계를 연습할 수는 없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맡은 일 다 하고 남들 집에 가서 쉴 때 나는 체육관으로 향했어요. 딱 들어가면 사범이 알아봐요. “중계 연습하러 왔구나” 하고. 그리고 두 사람을 붙여주죠. 그러면 그 둘을 보며 “레프트 스트라이크, 라이트 강타” 하며 연습했어요.

임: 이광재씨가 미국 간 게 언제죠?

이: 1970년에 미 국무부 요청으로 2년 예정으로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에 파견을 나갔는데 돌아오지 못했지요.

임: 그때는 아나운서 실장들은 다들 한 번씩 다녀왔어요. 나야 MBC로 옮기면서 가지 않았지만.

이: 2년 임기가 3주쯤 남았을 때 정부에서 미국에 계속 남아 교포들을 상대로 방송해 달라고 했어요. 돌아오고 싶었지만 그때는 그럴 수 없는 시대였지요. 미국과 박정희 정권이 갈등을 빚으면서 미 국회 청문회에 서는 어려움도 겪었어요.

임: 나는 미국의 소리에 파견 간 것만 알았지 자세한 내막은 몰랐어요. 마음 고생이 많았겠는데….

이: 그때 종교가 큰 위안이 되었지요.

임: 내가 이 나이 되도록 평소에도 후배들이 중계하는 것 보면 막 피가 끓어오르고 당장 뛰어나가 후배들하고 같이 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이번 MBC에서 연락이 왔을 때도 흔쾌히 수락했는데 그 다음날부터 잠이 안 와요. 삼십 몇 년간의 공백이 있었으니까.

이: 저도 미국 생활 삼십 몇 년에 선수들 이름도 그렇고 백넘버 외우는 게 쉽지 않아요.

임: 그런데 우리가 이기니까 신바람나서 혀가 절로 술술 풀리더라고. 폴란드전 때는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까지 흘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방송을 다시 들어보니까 유상철 선수가 골 넣었을 때 “슛 골인, 유상철 골인됐습니다” 하니까 사람들이 환호하잖아요. 그때 “4500만 동포 여러분, 이 승리의 함성이 들리십니까” 이랬더라고. 이게 임택근 이광재 식의 중계인데 그게 어김없이 나오더군. 아마 이광재씨는 더했을 거야.

이: 미국에서는 축구에 관심이 없어서 축구 중계를 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특히 한국 선수들의 경기를 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요.

임: 그래도 워낙 오랜 경륜이 있어서 옛날 가락이 절로 나올 거요. 안 그래도 우리 둘이 라디오 중계 맡는다니까 40대 이상 되는 사람들은 나한테 전화해요. “눈으로는 텔레비전을 보더라도 선생님 중계를 듣겠습니다” 하고.

이: 이제 우리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데 둘 다 말년에 멋있게 봉사하며 깨끗하게 살다 갔으면 좋겠어요.

임: 인생은 50∼60이 한창 꽃봉오리고 70∼80은 한창 일할 때예요. 90에 죽음이 찾아오면 100에 다시 오라며 돌려보내야지. 우리 이렇게 건강하니까 그만큼 열심히 일하고 보답해야죠. 이광재씨는 목회자로서(이광재씨는 2000년 목사 안수를 받고 현재 LA에서 목회 활동중), 나는 나대로 동문회(임택근씨는 연세대 총동문회 사무총장으로 재직중)에서 봉사하면서 후배나 후손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참 멋있게 살았다. 후회 없이 살았다’ 할 수 있게 여생을 보냅시다.



주간동아 2002.06.20 339호 (p58~59)

  • < 정리〓구미화 기자 > mhk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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