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9

2002.06.20

옛 전쟁터서 중국-터키 ‘6·13 격돌’

한국전 참전 50여년 만에 역사적 만남 … 14일엔 D·H조 마지막 예선 ‘아시아 축구’ 희망 담아

  • < 장원재/ 축구칼럼니스트 > wjang50594@freechal.com

    입력2004-10-13 1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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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둘째 주, 의외의 승부가 끊이지 않는 월드컵을 보는 세계 축구팬들의 가슴이 한없이 타들어 가고 있다. 우승 후보팀의 부진은 한국과 일본의 장마를 피해 통상적인 관례보다 대회 개막일을 일주일 이상 앞당긴 것이 이유라는 분석도 있다. 유럽리그에 전념하느라 강팀 선수들이 제대로 손발을 맞춰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는 것. 또한 기후나 잔디의 품질 등이 유럽의 것과 달라 실력 발휘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진단도 나온다.

    그러나 좀더 중요한 점은 각 참가국들의 축구 실력이 상당히 평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대 독일전의 0대 8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경기가 두 골 차 이내에서 승부를 갈랐다. 긴장의 끈을 조금만 늦추면 곧바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이야기다.

    긴장의 끈 늦추면 곧바로 ‘이변’

    월드컵은 한 달 이상을 두고 거행되는 긴 대회다. 그래서 각 팀은 컨디션의 정점을 어느 시점에 두느냐를 놓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다. 16강 진출이 확실한 경우 처음부터 8강 이후의 일정에 팀의 역량을 집중한다. 포르투갈은 가장 늦게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남들이 잔디 적응과 현지적응 훈련에 치중하는 사이, 마카오에 훈련 캠프를 설치하고 컨디션 사이클을 조절했다. 결과론이지만 이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현대 월드컵에서는 쉬어갈 구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몰락은 또 어떤가. 98년 월드컵, 유로2000, 2000 컨페더레이션스컵을 연이어 석권한 절대 강자가 초반 두 경기를 무득점으로 헤매며 비틀거릴 줄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거대한 성공은 거대한 실패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이번 주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경기는 6월13일 오후 3시30분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중국과 터키의 일전이다. 주지하다시피 터키는 한국전쟁 때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전투병력을 파견한 우방이다. 터키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터키가 국제사회에 공헌한 사례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경우라 하여, 초·중·고 교과서에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 50여년 전 도움을 준 나라가 잿더미 위에서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면, 무엇을 바라서가 아니더라도 베푼 쪽의 마음이 얼마나 흐뭇하겠는가를. 터키인들이 한국에 대해 느끼는 친밀감은 상상 이상이다. 88올림픽 당시 ‘형제의 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이라 하여 터키 텔레비전이 24시간 생중계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한국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 정성에 호응해 슐레이마놀루라는 역도 선수가 터키 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며 터키인들을 열광케 했다.

    근대사의 한 모퉁이에서 중국과 터키는 이 땅에서 만난 적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터키는 유엔군의 한 축으로, 중국은 반대편으로 이역만리까지 날아와 총칼을 맞댔다. 그 두 민족이 50여년 만에 축구공을 사이에 두고 평화와 상생과 화합의 축제를 벌인다. 그 경기장이 서울이라는 점도 더할 나위 없이 상징적이다.

    터키가 중국을 물리친다면 코스타리카 대 브라질 경기 결과에 따라 16강 진출도 바라볼 수 있다. 터키가 16강에 오르면 상암경기장은 터키 밖에 자리한 터키 민족의 성지가 되고, 만약 중국이 한 골 혹은 그 이상을 득점한다면 중국인들은 상암경기장을 역사적 발걸음을 내디딘 의미 있는 장소로 기억할 것이다.

    같은 날 저녁 오이타에서 벌어지는 멕시코 대 이탈리아전과 요코하마에서 열리는 에콰도르 대 크로아티아전도 초미의 관심사다. 에콰도르의 탈락이 확정된 가운데 16강행 티켓 두 장을 놓고 세 팀의 강호가 죽음의 한판 승부를 벌이는 서바이벌게임. 이 경기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16강 상대를 낙점하는 시합이기 때문이다. 첫 경기에서 크로아티아를 잡고 희희낙락하던 멕시코는, 크로아티아가 이탈리아를 격파함으로써 다시 진창으로 굴러떨어졌다. 2승을 거두고 있기는 하지만, 이탈리아에 지고 크로아티아가 에콰도르를 물리치면 골 득실로 승자를 가리는 비정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재까지의 골 득실은 멕시코가 +2, 이탈리아가 +1, 크로아티아가 0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번 미국 대통령선거 때보다 훨씬 더 미세한 승부를 보게 될지 모른다. 그야말로 눈 터지는 계가바둑, 반 집짜리 승부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승자와 패자를 결정해야 한다.

    처절하기로 치자면 오리지널 ‘죽음의 조’ F조다. 나이지리아가 탈락한 가운데 스웨덴 잉글랜드 아르헨티나가 벌이는 필사의 경주도 압권이다. 한발만 삐끗하면 그대로 탈락이라는 점에서 스웨덴과 아르헨티나의 결전은 결승전에 버금가는 긴장감으로 90분을 채울 것이다. 나이지리아와의 대전을 앞둔 잉글랜드가 상대적으로 편한 것이라고? 천만의 말씀. 창졸간에 2패를 당하고 무너졌지만 3전3패로 물러서기에는 94, 98년 연속 16강에 빛나는 나이지리아의 콧대가 너무나 높다. 어차피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겠지만 16강판을 난장판으로 만들 충분한 능력이 있다. 나이지리아의 역할은 좀더 강한 팀이 16강에 진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14일 벌어지는 조별예선 마지막 네 경기는 축구에 관한 한 영원한 변방 취급을 받아왔던 아시아의 희망을 싣고 있다. 서울 삼성동 프레스센터 근처에서 만난 한 말레이시아 기자는 “한국팀은 더 이상 한국 국민만의 팀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아시아 사람들이 당신들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는지 아는가. 우리의 꿈과 우리의 희망을 그대들에게 의탁한다. 아시아의 명예를 위해 최선을 다해달라”며 한국팀의 승리를 기원했다. 한국팀의 경기는 광화문에 모인 30만 인파를 넘어 6000만 동포를 하나로 묶고, 나아가 광활한 대륙 전부에 한 줄기 빛을 던져준다. 비기기만 하면 1차리그를 통과할 수 있지만 월드컵 본선에서 쉬운 상대란 없다.

    튀니지를 상대하는 일본의 행보가 100% 즐거운 행마일 수 없는 것은 그러한 까닭에서다. 마음의 고삐를 다잡아 매고 실족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인 승리로부터 평정심을 회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 러시아전에서 1대 0의 승리에 취해 일본의 일레븐이 대사를 그르칠 수도 있다. 한 칸만 벌릴 곳에서 두 칸을 건너뛰고, 날 일(日)자 행마가 필요한 곳에서 눈 목(目)자로 욕심내다 제풀에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다. 상대가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못해서 패배의 쓴 잔을 들이켜야 한다면 그보다 억울한 일은 다시 없으리라. 14일 저녁 일본 16강 진출 확정 오사카발 승전보가 한국의 인천발 화답으로 이어지기를. 모든 아시아인이 함께 손잡고 더불어 신천지로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이것은 정녕 아름다운 꿈이다. 장엄한 합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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