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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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구입용 ‘가짜 처방전’ 나돈다

향정신성 의약품 중독자들 인터넷서 서식 다운 받아 감쪽같이 위조

  •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입력2004-09-30 15: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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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약 구입용 ‘가짜 처방전’ 나돈다
    지난 3월15일 서울시 은평구와 서대문구, 지난해 10월 강원도 원주시, 지난해 9월27일 서울시 강동구….

    향정신성 의약품(이하 향정약품) 구입을 위한 위조 처방전이 시중에 버젓이 나돌고 있다.

    향정약품은 마약류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마약만큼 강한 환각작용과 중독 효과를 내는 의약품. 다량 복용할 경우 사망할 우려가 있어 의사의 처방전 없이는 절대 구입이 불가능한 전문의약품이다. 정부가 향정약품 관리에 관한 법률을 따로 만들어 향정약품 대장을 제대로 작성하지 않는 의료기관의 경우 영업정지, 의사의 허락 없이 이를 복용하는 사람에겐 형사처벌을 받도록 규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강한 처벌규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향정약품 중독자들은 이제 의사가 발행한 것과 거의 동일한 위조 처방전을 만들어 약국에서 향정약품을 거리낌없이 구입하고 있다.

    전국 곳곳서 발생 … 체포는 한 건뿐



    지난 3월15일 밤 8시40분 서울시 서대문구 E약국. 20대로 보이는 청년이 ‘H의원’ 이름으로 발행된 처방전을 가지고 들어와 향정약품인 아티반 42정(14일치)의 조제를 의뢰했다. 약사 김모씨(44)는 멀쩡한 환자가 향정약품을 처방받는 것이 조금 이상해 보였지만 처방전에 나타난 질병 분류기호, 약품의 성분명과 상품명, 처방일자, 요양기관 기호 등 모든 것이 너무나 정확해 약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해당 의원에 전화를 걸어보려 했으나 이미 시간은 처방전을 낸 의원이 문을 닫은 후.

    그로부터 10분 후 이 청년은 인근 A약국, 30분 후에는 은평구의 C약국에서 같은 방식으로 향정약품을 구입했다. 청년이 구입한 향정약품의 종류는 똑같은 아티반이고 처방전만 발행 의원과 의사 이름이 달랐다. 이 청년은 정교하게 처방전을 위조한 뒤, 약국에서 건강보험공단이나 처방전 발행 의료기관의 확인이 불가능한 밤시간을 교묘히 이용했다. 이들 약국이 가짜 처방전인 것을 안 것은 다음날이었다. 심사평가원에 이 약품에 대한 보험급여 심사를 의뢰하자 해당 의원들은 “그런 처방전을 낸 사실이 없다”고 부인한 것. 부랴부랴 보건소와 경찰에 신고했지만 범인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지난해 10월 강원도 원주시에서 일어난 위조 처방전 유통사건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원주 시내 5개 약국은 병원이 모두 문을 닫은 밤시간에 가짜 처방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에게 향정약품인 디아제팜 10정씩을 판매했다.

    이 밖에도 가짜 처방전을 이용한 향정약품 구입 사례는 많다. 지난해 9월 강동구 소재 3개 약국이 가짜 처방전을 들고 온 사람에게 향정약품인 할시온과 디아제팜 일주일치 투약 분량을 판매한 것을 비롯, 지난해 연말에만 경기도와 충북에서 각각 두 건의 가짜 처방전 사건이 발생했다.

    이중 범인이 잡힌 것은 강동구 사건뿐. 나머지 사건은 장기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들 사건은 각 보건소가 약국들의 신고 내용을 보건복지부와 서울시 등 상부기관에 전혀 보고하지 않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향정약품을 구입한 사람들은 누구고, 이토록 정교한 처방전은 어떻게 만든 것일까. 대한약사회 오성곤 전문위원은 “향정약품의 의존성(중독성)이 강해 대부분 중독자들이 저지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개중에는 이를 대량으로 빼내 시중에 유통시키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면서 “향정약품은 다량 복용할 경우 수면제 역할(기절, 무호흡)을 하는 것이 많아 부녀자 납치 강간과 같은 각종 범죄와 자살 용도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 강동구에서 가짜 처방전을 이용해 향정약품을 구입하다 발각된 김모씨(31)의 경우, 경찰 조사 결과 자살용 약품을 구입하기 위해 이 같은 행동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특히 경찰 조사에서 가짜 처방전을 단 10분 만에 만들어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강동경찰서 형사계의 한 직원은 “인터넷에 들어가 처방전 서식을 다운 받은 뒤 자신이 아는 의원의 이름과 의사이름을 써 넣고, 다시 한번 검색을 통해 향정약품에 관련한 내용을 채워 넣으니 금방 위조 처방전 한 장이 만들어졌다”고 전했다. 김씨가 처방전을 다운 받은 사이트는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법률상담 사이트. 현재 의료기관에서 발행하는 처방전은 의료법(제18조 2항)에 따라 규격화되어 있기 때문에 ‘의료법 시행규칙’만 검색하면 서식을 다운 받기는 ‘누워서 떡 먹기’. 향정약품 목록도 약품검색 사이트를 이용하거나 심사평가원 사이트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채워 넣을 수 있다.

    범죄·자살용으로 쓰일 우려 높아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설사 위조 처방전을 만들어 약품을 구입했다 해도 의료법상으로는 전혀 처벌할 수 없다는 점이다. 복지부와 서울시에 위조 처방전에 의한 통계가 전혀 집계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 따라서 각 보건소는 약국에서 위조 처방전 발견 신고가 들어와도 신고만 받을 뿐, 적극적인 대처에 나서지 않는다.

    복지부 의료정책과의 한 관계자는 “그런 일이 있는지 전혀 파악조차 못했다. 의약분업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가짜 처방전 유통에 대해 처벌규정이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의문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는 “행정적으로는 규제할 수 없지만 경찰이 사문서 위조죄와 향정약품 관리법을 적용하면 이들을 충분히 처벌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서울시 강동구에서 발생한 위조 처방전 유통사건 처리 과정에서 경찰이 보인 모습을 보면 이런 기대는 너무 섣부른 듯하다. 경찰은 한 약사가적발해 넘긴 범인 김씨에게 사문서 위조죄만 적용했을 뿐, 향정약품 관리법은 전혀 적용하지 않았다. 김씨가 위조 처방전으로 사려고 한 약들이 향정약품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 더욱이 경찰이 사문서 위조 혐의로 신청한 구속영장은 검찰에서 기각돼 김씨는 별반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났다.

    강동경찰서 형사계의 한 관계자는 “김씨가 ‘자살하기 위해 수면제를 사려 했을 뿐’이라고 해 그런 줄 알았지, 그 약품이 향정약품인지는 알지 못했다. 우리가 향정약품 목록을 어떻게 다 기억하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김씨가 구입한 할시온과 디아제팜은 향정약품 중 중독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품목들로 신경과 전문의들의 처방 빈도가 높은 품목 중 하나다.

    결국 의약품 유통의 관리 주체인 행정당국에는 전혀 보고도 안 되고 다른 법으로 처벌하자니 처벌 주체인 경찰이나 검찰이 의약품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 효율적인 처벌은 요원한 상태다. 이처럼 향정약품에 대한 위조 처방전 사건이 연이어 터지자 대한약사회는 최근 전국 약사들에게 통신문을 보내 “향정약품이 포함된 처방전을 받을 경우 주민등록증을 꼭 대조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약사회의 한 내부 관계자는 “제약회사의 향정약품 끼워주기 관행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약국이 위조 처방전 때문에 피해 보았다 해도 신고하는 약국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이런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겁니다. 청계천시장에서 판매되는 그 많은 향정약품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의약품 블랙마켓(음성시장)에 쏟아지는 향정약품에 대한 정부당국의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단속과 대책이 시급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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