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4

..

권노갑씨, 한 건으로 싸게 때울까

DJ 정권 출범 이래 의혹 배후로 단골 거론… ‘판도라 상자’ 개봉 남은 과제는 검찰 몫

  •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4-09-30 15:1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권노갑씨, 한 건으로 싸게 때울까
    동교동 구파의 버팀목이 드디어 무너졌다.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이 진승현씨로부터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지난 2년간 권씨 관련 의혹은 전방위적이었다. 권씨는 ‘정현준 게이트’에서는 로비스트 오기준씨(해외 도피중)와의 관련 의혹, ‘진승현 게이트’에서는 이번 구속된 혐의 외에 측근 김방림 의원의 1억원 수수혐의, ‘이용호 게이트’에서는 이씨 장인 최갑수씨(해외 도피중)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의혹, ‘최규선 게이트’에서는 최씨가 권씨의 특보 출신이라는 점과 권씨의 문모 보좌관이 최씨로부터 고급 승용차를 받은 사실 등의 의혹이 불거졌다. 각종 게이트, 스캔들에 KKK의 일원으로 이름이 빠진 적이 거의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던 권씨가 마침내 단돈 5000만원 때문에 구속됐다. 그 배경을 놓고 갖가지 추측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출국금지부터 구속까지 일사천리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검찰 내 기류가 달라진 것은 권노갑씨가 조만간 미국 하와이로 떠날 계획이라는 언론보도가 나오면서부터였다. 최성규 전 총경을 포함해 각종 부패사건 당사자들이 줄줄이 해외 도피한 것을 왜 막지 못했느냐는 비판이 검찰로서는 부담인 터였다.



    검찰 관계자는 “권 전 고문이 미국으로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 상황을 우려했다”고 말했다. 해외 도피를 또 방조했다는 비판을 듣는 게 싫었다는 것이다. 언론보도를 접한 뒤 검찰이 권씨를 서둘러 출국금지했고, 일단 정계 거물을 출국금지한 이상 지체 없이 수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흐름이 된다.

    권노갑씨, 한 건으로 싸게 때울까
    검찰에 따르면 권씨가 돈 받을 당시 풍경은 대략 이렇다. 2000년 7월 김은성 국정원 2차장이 진승현씨와 함께 서울 평창동 권노갑씨 집에 갔다. 김은성 차장과 권씨가 집 안에서 한동안 얘기를 했고 현금 5000만원이 든 진씨의 가방은 권씨 집에 두고 나왔다. 이는 김은성씨와 진승현씨의 진술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검찰수사 과정에서 상반된 얘기가 튀어나왔다. 그날 김은성씨를 수행해 평창동 집에 함께 갔던 국정원 직원 문모씨는 “진승현씨는 보지도 못했으며 김은성씨는 노란 봉투만 갖고 권 전 고문 집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5000만원을 담기엔 노란 봉투는 너무 작아 보인다.

    검찰은 일관성이 없다며 문씨의 진술을 무시했다. 영장 실질심사를 맡은 법원도 7시간의 고민 끝에 검찰 판단에 동의했다. 권씨의 범죄가 명쾌하게 증명됐다고 할 수만은 없는 셈이다.

    수사라인과 여권 핵심 교감 있나

    김대중 대통령 가족과 민주당 새로운 실세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서둘러 권씨의 구속카드가 나왔다는 것이 음모론의 얼개다. 그런 음모가 실제로 있었다면 서울지검 박영관 특수1부장-서울지검 김회선 3차장-이범관 서울지검장-이명재 검찰총장으로 이어지는 검찰 수사라인 중 어느 한 곳과 권력 핵심 사이에 의사소통이 있어야 한다.

    우선 출신 지역으로 보았을 때 이들 간부는 전남(박영관)-경기(김회선)-경기(이범관)-경북(이명재)에 해당한다. 특별히 지역적인 일사불란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김회선 3차장은 최근까지 국회에 파견되어 있었으며 이명재 총장과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도 외부 변호사를 영입한 경우다. 청와대 등 여권 핵심 실세가 권씨 수사라인에 비공식적 창구를 열어두고 있다는 징후는 아직 없다. 이범관 서울지검장은 현 정부 들어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재직한 경험이 있다. 그는 2001년 5월 신승남 당시 검찰총장과 대통령 처조카 이형택씨가 서울 강남 M호텔에서 만나도록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차정일 특별검사팀 수사 결과) . 권씨의 구속을 수사 검사 단독으로 결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검찰 간부들의 의사결정에 외부 압력이 들어왔는지 여부가 관건이다.

    권노갑씨, 한 건으로 싸게 때울까
    김은성 전 차장은 여권 실세들의 백궁·정자 지구 특혜분양 문제를 탄원서에서 언급하는 방식으로 외부에 공개했다. 김 전 차장이 권씨의 5000만원 수수 사실을 진술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한다. 진승현씨나 김은성 전 차장의 궁극적 목표는 자신들의 조기 석방이며 그 수단으로 폭로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가까웠던 권씨와 김은성 전 차장은 이 때문에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다.

    김 전 차장이 권노갑씨 구속에 결정적 기여를 하자 권씨도 작심한 듯, 포토라인에서 김 전 차장이 자신에게 준 것은 5000만원이 아니라 국정원 정보라고 ‘방어 겸 공격’을 했다. 김 전 차장이 국가정보원법 위반으로 형량이 추가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권노갑 파일 있을까

    권씨가 구속되자 ‘권노갑 파일’의 정체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권씨가 압수수색에 대비해 구속 전 비밀 자료들을 모처에 옮겨두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권씨는 ‘여권의 경리’로 통했다. 여권으로 들어오는 돈과 나가는 돈의 ‘정거장’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본인의 입으로도 그렇게 얘기했다. 권씨는 또한 지난 수년간 각종 선거의 공천, 공기업 요직 배분 등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그가 ‘또 다른 몸통’이나 개별 국회의원들의 돈문제 등 약점에 대해 많은 정보와 물증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온다.

    권씨의 파일은 미국으로 도피한 경찰청 특수수사과 최성규 전 총경 이상의 파괴력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를 활용할 경우 구속 수감된 권씨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대선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권노갑 수사, 본류가 틀렸다?

    단지 5000만원 수수건만으로 구속된 것이 권노갑씨에게 반드시 불리하지는 않다는 견해도 있다. 그의 측근 말대로라면, 역설적으로 권씨는 5000만원 단위로는 돈을 받지 않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5000만원 한 건만으로 법의 심판대에 오르는 것은 그동안 제기돼 온 모든 의혹들에 대해 사법기관이 공식적으로 면죄부를 주는 셈이 된다.

    따라서 검찰이 현재의 혐의만으로 기소하느냐, 아니면 그를 인신구속한 상태에서 추가 혐의를 더 밝혀내느냐 하는 것은 권노갑 구속의 진정한 의미를 가늠할 잣대가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권노갑씨가 싸게 때웠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검찰 수사는 ‘권노갑 살려주기였다’는 의혹에 휩싸일 공산이 커진다.

    정치권에선 권노갑 수사의 본류는 이번에 권씨를 구속한 서울지검 특수1부가 아니라 서울지검 공안1부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즉 권씨가 민주당 의원들에게 준 자금 명세와 권씨가 그 자금을 마련한 경위를 밝히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검찰은 DJ 정권의 ‘판도라 상자’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의 문제는 검찰이 그것을 여느냐, 그대로 덮어두느냐에 달려 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