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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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2’ 권노갑마저 파워게임 희생양?

권씨 측근들 ‘위기 탈출용’ 음모론 들먹… 97년 ‘깃털론’같은 반격 포문에 주목

  •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4-09-30 15: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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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넘버2’ 권노갑마저 파워게임 희생양?
    ”권(노갑) 고문에게 직접 말씀드리기 뭐해서 대신 전화를 했습니다. 민주당 김근태 고문에게 2000만원을 준 사건 때문에 권 전 고문을 5월19일까지 출국금지했습니다. 당시 대검에서 경선 끝나면 조사하겠다고 기자들에게 얘기한 만큼 수사를 안 할 수 없습니다.”

    4월20일경, 권 전 고문의 핵심 측근 이훈평 의원은 서울지검 모 부장검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4월17일 ‘권노갑 정치’의 상징이던 마포 사무실을 폐쇄하고 5월 초 외유를 선언한 권노갑씨를 출국금지한다는 부담스러운 내용이었다. 소식을 접한 권씨측은 아연 긴장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권씨가 “별일이야 있겠느냐”며 분위기를 수습했다.

    4월29일 권씨는 이훈평 의원 등 몇몇 측근과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휴식중 기자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검찰에서 소환, 구속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때까지 권씨측은 검찰 소환 이유를 ‘김 전 고문건’으로 알고 있었다. 기자들이 “김근태가 아니라 진승현”이라고 확인해 주자 권씨는 “진승현이라니, 도대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 측근의 설명이다. “그제서야 검찰에서 왜 전화를 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외유를 막고, 구속을 준비하고…. 오래 전부터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인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든다.”

    5월3일 권노갑씨는 전격 구속됐다. 그의 발목을 잡은 금액은 5000만원이었다. 그동안 익명 K씨로, DJ 정부의 온갖 비리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거론되던 그의 위상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액수였다.



    분노한 측근들은 즉각 ‘음모론’을 제기했다. 과연 음모는 있었는가. 권씨 주변에서도 사안을 보는 입장은 갈린다. 우선 음모론에 무게를 두는 인사들은 신주류의 등장과 최근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어렵게 하는 정치 환경에서 음모론의 실체를 유추한다. 이른바 권력 핵심부의 ‘위기 탈출용’ 음모론이다.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문제에 대한 검찰의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된 시점에 권씨를 전격 구속해 물타기를 시도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이 시나리오의 실질적 뼈대다.

    ‘넘버2’ 권노갑마저 파워게임 희생양?
    그러나 이 시각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검찰과 청와대 또는 권력 핵심부와의 유기적인 관계가 전제돼야 한다. 권씨측은 이 점을 명쾌하게 풀어내지 못한다. 음모론이 갖는 특성상 구체적 내용을 알 수 없다는 항변이 고작이다. 명예회복에 나선 검찰의 성역 없는 수사의지가 검찰청사를 뒤덮고 “검찰이 임기 말 정권을 의식할 이유가 없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권씨측의 이 같은 음모론은 급격하게 힘을 잃었다.

    그런데 권씨측은 하루 만에 두 번째 음모론을 들고 나왔다. 이른바 진승현과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의 ‘물귀신’ 작전에 의한 음모론이다. 그들이 살길을 찾으려 허위진술을 했고 검찰이 이에 속고 있다는 불만이었다. 권씨의 한 측근은 “진승현 비자금에 구멍이 난 곳이 많다고 한다. 권 전 고문을 지금에야 얘기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세상이 달라지니 권씨를 물고늘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훈평 의원은“권 전 고문이 거꾸로 김 전 차장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면 모를까, 직책상 김은성이 권 전 고문에게 금감원 로비를 부탁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며 사건이 조작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당권과 대권을 잡은 신주류의 파상공세라는, 이른바 권력 암투와 파워게임의 전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승자의 ‘패자에 대한 응징’이 파워게임론의 이론적 출발점이다. 당 운영의 대권을 잡은 신주류측이 대선에서 최대의 걸림돌이 될 각종 ‘게이트 정국’을 벗어나기 위해 권씨의 장렬한 전사를 유도하고 있다는 것. 권력 핵심부의 위기 탈출용 음모론과 비슷한 맥락이지만 대통령후보 경선을 통해 메인 스트림으로 부상한 신주류가 음모론의 주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경선을 거치며 동교동 신·구파는 물론 여러 세력간에 벌어진 파워게임은 치열했다. 이인제 전 고문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형성했던 권씨와 측근들은 이 파워게임에서 결과적으로 완패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신주류 주변으로 이동했고, 나머지 인사들은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 권력 이양기에 패자가 설 자리는 그리 많지 않다. 새로 등장한 세력은 전도(前途)를 밝히기 위한 수단으로 패자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 희생을 딛고 승자는 새로운 정치 영역을 넓혀 나가는 것이 과거 정치가 주는 교훈이다.

    권노갑씨의 구속은 본인의 정치생명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듯하다. 더 이상 재기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측근들 주변의 평가다. “진승현씨의 5000만원을 결코 받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측근들도 ‘다른’ 돈에 관한 한 침묵으로 일관한다. 40여년 김대통령의 자금관리인으로 활동한 업보가 오늘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권씨의 구속으로 생긴 권력 공백은 이제 새로운 세력이 접수할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이 동교동 구파의 핵심이었던 김태랑 전 의원은 “시대가 바뀌었다”며 신주류의 등장에 의미를 부여한다.

    어쩌면 권씨도 이런 시대적 흐름을 읽고 있었던 것 같다. 이훈평 의원은 “권 전 고문은 김대통령의 민주당 탈당을 전후해 정계은퇴 선언을 할 계획이었다”고 말한다. 마포 사무실을 접고 외유를 준비한 것도 이 같은 수순 밟기의 일환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권씨가 순리에 따른 정계은퇴의 기회를 갖기는 힘들어졌다.

    이미 검찰은 권씨를 상대로 전방위 수사를 예고하고 있다. 검찰은 김근태 정동영 전 고문을 지원했던 자금은 물론 그동안 권씨와 관련해 나돌았던 각종 정치 의혹사건 전반을 건드려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런 검찰의 움직임에 “돈가스를 팔아 마련한 정치자금”이란 권씨의 해명은 먹힐 것 같지 않다. 검찰이 작정하고 수사할 경우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강력한 후(後)폭풍에 휩싸일 가능성이 크다.

    그의 구속과 수사는 지난 수년간 ‘권력 시스템’에 의해 저질러진 각종 비리사건이 권력 말기에 본격적인 법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97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의 국정농단 문제로 나라가 어지러웠을 때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은 ‘깃털론’을 던져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급격한 권력의 이동기, 그의 버팀목이 됐던 김대중 대통령마저 민주당을 탈당했고 권노갑씨는 맨발로 칼날 위에 섰다. 그는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갈까. 그의 입에서는 또 어떤 얘기가 나올 것인가. 정치권이 숨을 죽인 채 긴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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