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9

2001.06.21

사회의 썩은 환부를 치료하라

  •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입력2005-02-04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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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의 썩은 환부를 치료하라
    의사는 다리가 생명이다. 한 다리가 부러지면 다른 다리로 달리고 두 다리가 부러지면 손으로 달리고 죽기 살기로 달리고 또 달리고 죽을 때까지 달려야 한다’. 아카기 선생의 현관에는 이렇게 쓰인 가훈이 걸려 있다. 그는 또한 ‘간염 박멸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의사다. 작은 시골 바닷가 마을의 유일한 의사인 그는 아침부터 밤까지 좁은 시골길을 뛰어다니며 환자를 진찰하러 다니고, 보는 사람마다 간염이라고 진단한다. 동네사람들은 그를 ‘간장선생’이라 부르며 돌팔이 취급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사로서의 책임과 본분을 다한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공습이 계속되고 사람들은 죽어가고, 집집마다 입영통지서와 전사통지서가 엇갈려 날아든다. 배고픈 아이들은 누이에게 몸을 팔라고 졸라댄다. 그러나 아카기는 환자들에게 ‘잘 먹고 푹 쉬라’고 당부하며 전시중에 구하기 힘든 포도당을 처방해 군부의 미움을 산다. 그의 곁에서 간염 박멸을 돕는 이들은 창녀 출신의 간호사와 술에 절어 창녀와 살고 있는 승려, 실력 있는 의사지만 몰핀에 의지해 살아가는 외과의 등 하나같이 비정상적인 사람들. 사회에서 배척당한 이들은 전쟁이라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인간애를 나누며 ‘간염’으로 상징되는 파시즘과 전쟁의 광기를 치유하고자 애쓴다.

    사회의 썩은 환부를 치료하라
    영화를 보다 보면 왜 하필 ‘간’이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였는지 이해가 간다. 감독은 전쟁이라는 상황을, 몸의 해독을 담당하는 간이 제 역할을 못하는 상태에 비유하는 것이다. 여기서 간염이란 곧 군국주의에 찌든 사회가 지닌 구조적 병폐와 그 속에서 사람들 사이로 전염되는 절망과 편견의 세균 조각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히로시마에 폭탄을 투하하면서 피어오른 버섯구름을 보고 아카기는 ‘간염으로 비대해진 간 같다’고 말한다.

    이미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우나기’ ‘나라야마 부시코’ 등의 영화로 알려진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72세의 나이에 영화 ‘간장선생’을 발표했다. 이 작품 역시 감독이 오랜 세월 천착해 온 삶과 죽음, 성(性), 휴머니즘, 전쟁 반대 등의 묵직한 주제를 담았지만 전작들보다 한결 따뜻한 유머와 가벼움의 미학이 관객을 편안하게 이끈다. 감독은 영화를 선보이기에 앞서 “내 영화가 관객을 자극하지 않고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리게 하지 않으며 관객을 숨쉬게 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긴 삶의 여정을 거쳐온 노장답게 여유롭고 훈훈한 웃음의 미학으로 희망의 세포를 복제하고 있는 영화 ‘간장선생’은 비록 걸작의 반열에는 들지 못해도, 관객이 보기엔 그의 어떤 작품보다 사랑스러운 작품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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