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8

2001.06.14

‘문화의 세기’ 거꾸로 돌리는 1등주의

영화·출판·가요 곳곳서 줄 세우기 혈안… 문화 다양성 싹 자르고 빈익빈 부익부 심화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5-02-02 14: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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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의 세기’ 거꾸로 돌리는 1등주의
    요즘 극장가에서는 연일 흥행기록을 경신한 ‘친구’가 마지막으로 서울 관객 최다 동원기록을 깨뜨릴지 여부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투자배급사인 코리아픽쳐스측은 “지난해 ‘공동경비구역 JSA’가 세운 250만 명 기록을 깨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말한다.

    어차피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깨지는 기록도, 깨뜨리는 기록도 모두 정확성과 거리가 멀다면? 한 영화계 인사는 “영화사가 250만 명이라고 발표하면 200만 명쯤 들었구나 생각한다. 10만 명이면 20만 명, 50만 명이면 70만 명으로 부풀려 발표하는 게 영화판 생리”라고 했다. 극장에서 영화 관객수만 전문적으로 헤아리는 한 입회회사 사장도 영화사가 발표하는 수치는 신뢰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날 관객 현황은 입회요원이 나가지 않는 극장의 경우 극장측에 전화로 묻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극장마다 제각각이어서 800명 든 것을 1200명이라고 알려주는 곳도 있다.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우리는 그대로 적어 영화사에 보낸다. 그나마 정확한 숫자는 영화사만 안다. 영화사가 여기다 또 부풀려 발표해도 입회회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계약상 영화사 외에 다른 곳에 수치를 발설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 요즘은 영화사들이 흥행기록에 연연하다 보니 전회 전석 매진이어도 달성할 수 없는 관객수를 발표하곤 하는데 우리는 그런 발표를 듣고 웃는다.”

    ‘문화의 세기’ 거꾸로 돌리는 1등주의
    2년 전 ‘타이타닉’의 20세기폭스사와 ‘쉬리’의 강제규 필름은 한때 최다 관객동원 기록이냐 아니냐로 신경전을 벌인 적이 있다. 20세기폭스사는 자체 파악한 서울 관객수를 226만 명으로 발표했고, ‘쉬리’측은 서울시극장협회가 집계한 197만 명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기준이 달라 혼선도 빚었다. 결국 ‘쉬리’가 ‘타이타닉’의 226만 명마저 돌파하면서 논쟁은 싱겁게 끝났지만 그 뒤로도 비슷한 흥행기록 공방은 ‘JSA’ ‘친구’로 이어졌다. 사실 전국 입장권 통합전산망 시스템이 완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추산’에 의존하는 현재의 집객방식으로는 관객동원 기록경쟁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런데도 하루가 멀다 하고 며칠 뒤면 전국관객 몇 명에 도달한다거나, 기록경신이 열흘 앞당겨졌다는 등 스포츠 중계 방식의 매스컴 보도가 영화사 간의 무모한 경쟁을 부추겼다는 비판도 있다.

    이처럼 영화사들이 기록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쉬리’의 영향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씨네월드의 정승혜 이사는 ‘쉬리’를 통해 우리 영화계가 배급의 중요성에 눈떴다고 말한다. “요즘 한국 영화 관객은 5만 아니면 100만 명이다. 그만큼 1위가 관객을 독식한다. ‘쉬리’ 이후 영화사들은 상영관의 숫자가 기록을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는 개봉시 서울에서만 스크린 수가 40여 개나 되었다. 1편의 흥행성 있는 작품이 전국 스크린을 장악한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쉬리’ ‘JSA’ ‘친구’에 이어 기록은 계속 깨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대작들의 기록 경쟁은 다른 영화에 상대적 박탈감을 제공했다. “예전에는 10만 명만 들어도 선전했다고 자평했는데, 요즘은 50만 명이 들어도 ‘외면당했다’ 심지어 ‘망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작가주의적 영화가 설 자리가 없어졌다”(정승혜). 모 아니면 도. 요즘 문화계에 확산되는 심리다. 1등이 독식하는 것은 비단 영화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출판분야도 정도가 아닌 방법까지 동원해 1위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다. 요즘 출판계의 화두는 사재기다. “출판사가 광고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이에 비해 사재기는 비용도 적게 들고 효과는 엄청나게 크다. 그러니 쉽게 유혹에 넘어간다.”

    지난 4월26일자 ‘동아일보’에 박재환씨(전 도서출판 이끌리오 대표)가 기고한 ‘출판사의 책 사재기’라는 제목의 칼럼은 4년 전(97년) 주간 ‘도서신문’이 폭로한 ‘출판사 베스트셀러 조작’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 폭로된 내용을 보면 출판사는 사재기 전문 아르바이트생까지 고용해 하루에 수십 부씩 책을 사들이고 그것을 다시 출판사가 수거해 가는 수법으로 순위조작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주요 서점이나 언론사의 베스트셀러 선정 원칙을 바꾸게 하는 등의 긍정적 효과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쉬쉬 하면서 물밑에서 행한 사재기를 출판사 마케팅의 관행으로 정착시키는 역효과도 낳았다. 출판계 불황이 계속되자 사재기는 슬그머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출판사 사재기는 펌프질에 비유된다. 펌프질을 할 때 먼저 한 바가지 물을 붓고 시작하는 것과 같다. 대중성이 강한 책은 초기에 사재기로라도 일단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려놓으면 다음부터는 관성에 따라 독자가 몰린다는 이치다. 한편에서는 출판사가 자기 돈 써가며 베스트셀러 만들기에 나서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문제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난히 베스트셀러 추종현상이 심한 우리 문화계에서 인위적인 베스트셀러 만들기는 다른 출판물의 기회를 박탈해 출판시장 자체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

    창해출판사의 김영호 기획실장은 “출판계가 불황일수록 사재기가 횡행하는 것은 그만큼 베스트셀러 효과가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두 권 살 책을 한 권 살 때 기왕이면 베스트셀러를 사는 게 소비자의 심리기 때문이다. 불황 속 출판계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 책이 안 팔린다고 아우성인데도 지난해에는 밀리언셀러가 3종(‘가시고기’ ‘해리포터’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이나 나왔다. 교보문고 종합순위 10위권의 평균 판매권수는 전년보다 78.6%나 늘었다.

    “판매가 안 좋을수록 베스트셀러 만들기는 오히려 쉽다. 최근에는 기존 서점 외에도 대여점, 대형 할인점, 인터넷 서점 등 시장이 세분화하면서 한 군데서 몇 십 권만 집중적으로 사재기를 하면 쉽게 1위를 만들 수 있다. 상황이 어려운 출판사들이 1위 만들기 유혹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푸른숲 이동흔 영업부장). 이처럼 출판물의 순위 조작설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정확한 집계 시스템이 없다는 데 있다. 책의 정확한 판매량은 출판사도 모른다. 출판사는 출고 권수로 부수를 발표하지만, 그렇게 나간 책들이 수개월 후 심지어 몇 년 후 돌고 돌아 반품되어 오면 그만이다. 그러니 주요 대형 서점들이 그날그날 최종 소비자에게 팔리는 양을 토대로 집계한 순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사재기꾼들이 개입하면서 쉽게 순위를 조작한다.

    최근 문화계에 만연한 주먹구구식 순위경쟁에 대해 가장 먼저 제동을 건 것은 대중음악계다. 문화계 NGO를 중심으로 해 결성한 ‘한국대중음악개혁을위한연대모임’은 먼저 공중파 방송의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를 주장했다. 이들은 기획사가 10대 팬클럽을 동원해 순위 경쟁을 일삼고 방송은 이를 부추기며 음반유통질서까지 왜곡한다고 비난하면서 적극적인 폐지운동에 들어갔다. 실제로 가요순위 경쟁은 음반 판매량과 직결된다. 지난해 50만 장 이상 팔린 음반 중 5위까지를 꼽아 보면 조성모의 ‘아시나요’ ‘가시나무’, GOD의 ‘거짓말’,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 HOT의 ‘아웃사이드 캐슬’이다. 서태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뻔질나게 방송에 얼굴을 내민 경우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 하지만 한국 문화계에 만연한 1등주의는 문화의 세기를 거꾸로 돌린다.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에 문화계는 오히려 줄 세우기를 통한 1등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베스트셀러를 추종하는 부끄러운 소비자 의식도 한몫 한다. 아직도 서점에 가서 “요즘 잘 나가는 책이 뭐냐”고 묻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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