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5

2001.05.24

고엽제 환자들 ‘약 구하기 전쟁’

의약분업 후 피부염 치료제 등 찾아 대형약국 전전… 어려운 살림에 돈-시간 낭비 ‘二重苦’

  •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

    입력2005-01-28 13: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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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엽제 환자들 ‘약 구하기 전쟁’
    베트남전 참전자 L씨(54ㆍ충남 논산시)는 지난해 12월 다니던 병원을 옮겼다. 그해 7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그는 충남대병원 응급실에서 수술을 받은 뒤 곧 고엽제 후유의증(중등도) 판정을 받았지만 병원 인근 약국과 동네 약국에선 약을 구할 수 없었던 것.

    “3가지가 필요한데 처방전을 들고 대전 시내 대형약국을 돌아도 약이 없어요. 알고 보니 논산에서 버스로 2시간 거리인 대전보훈병원(신탄진) 인근 약국엔 약이 있더군요.” 5개월간 ‘약 찾기’에 진력이 난 L씨는 결국 100% 원내처방을 하는 보훈병원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도시-오지 환자들 죽을 맛

    병마에 고통받는 고엽제 환자들은 의약분업 후 치료약을 구하려 떠도는 이중 고통을 겪는다. 고엽제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은 전국 5개 보훈병원(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과 환자의 지리적 편의를 위해 별도 지정한 ‘국가유공자 및 고엽제 환자 위탁가료병원’ 88개(2001년 5월 현재).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7월 의약분업 시행에 앞서 보훈환자들을 위해 국가보훈처와의 협의를 거쳐 보훈병원을 분업 예외대상으로 정했다. 즉 이들이 보훈병원에서 진료받을 경우 전원 원내처방을 받게 한 것. 국비진료받는 고엽제 환자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위탁병원은 다르다. 고엽제 환자의 판정 등급에 따라 처방에 차등을 둔 것. 고엽제 환자는 고엽제 피해로 공식 인정한 후유증(상이등급 1∼7급 및 등외) 환자와, 명확히 규명되진 않았으나 그 가능성을 인정하는 후유의증(장애등급 고도-중등도-경도-등외) 환자로 나뉜다. 후유(의)증으로 판정하는 질병은 후두암, 폐암, 버거병, 말초신경병, 고지혈증 등 33종으로 다양하다. 위탁병원은 이중 1∼3급 후유증 환자와 고도 후유의증 환자에게만 원내처방을 한다.



    문제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 고엽제 환자들이 원외처방전을 받아 약을 구하려 해도 위탁병원 인근이나 거주지 약국에서 해당 약을 제대로 구비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이들은 위탁병원에서 쉽게 약을 받던 분업 전과 달리, 일반약국이 잘 취급하지 않는 중추신경장애 및 피부병 약을 구하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대형약국을 전전하거나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의 보훈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

    “약을 두루 갖춘 보훈병원을 둔 대도시 환자야 무슨 불편이 있겠나. 소도시나 오지 환자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사)대한민국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회장 양상규ㆍ이하 전우회) 관계자는 “고엽제 환자 중 고혈압-당뇨 등 만성 질환자들은 약을 구하기 쉽지만 중추신경장애 환자는 거동마저 불편한 경우가 많아 큰 애로를 겪는다”고 털어놓는다.

    고엽제 환자들 ‘약 구하기 전쟁’
    지역이 넓은데도 보훈병원이 없는 강원도 환자들의 사정은 가장 열악하다. 이곳의 고엽제 환자는 3000여 명.

    1969년 십자성 부대원으로 참전했다 97년 고혈압과 지루성 피부염으로 후유의증(경도) 판정을 받은 권모씨(63·원주시)는 “시내 위탁병원에서 진료를 받는다. 하지만 필요한 9가지 약을 구하려면 최소 대형약국 4, 5곳을 돌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선-양구-화천-고성-양양-평창 등 위탁병원조차 없는 지역의 환자들에겐 약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이들에겐 특히 구하기 어려운 수입 피부염 치료제 등을 위탁병원 인근 약국에 주문했다가 3, 4일 뒤 연락을 받고 찾아가는 일이 흔하다. 참다 못한 환자들은 아예 서울보훈병원을 찾지만 진료 후 약을 받아오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린다. 일자리는커녕 사회생활에 잘 적응도 못하는 이들 환자에 대한 생계비(월 20만~40만원) 지원은 턱없이 부족한데도 병원과 약국을 오가며 쏟아붓는 교통비 부담 역시 만만찮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분업 후 병원에 인접한 ‘문전약국’ 중 상당수가 고수익을 올리면서도 수십 종의 약만 비치하였다는 건 자명한 사실. 따라서 마땅히 위탁병원에서 직접 약을 내줘야 한다는 게 전우회의 주장이다.

    그러나 약사회측은 “약을 못 구한다는 건 핑계다. 도매상에서 약국에 이르는 과정에 일시적 수급 불균형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대증요법에 치중하는 대다수 고엽제 질환 약을 구하기 어렵다는 건 납득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보훈처에 의하면 1993년 제정한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원받는 국내 후유증 환자는 4075명, 후유의증 환자는 3만7799명, 후유증을 대물림한 2세 환자도 28명(2001년 3월 현재)이다. 후유의증 중 3603명은 중추신경장애 및 다발성 신경마비 환자다.

    보훈처는 지금도 월 평균 1200여 명의 참전자가 검진 등록신청을 하고 있어 고엽제 환자가 더 늘 것으로 전망한다.

    사정이 이렇지만 복지부는 ‘원칙론’을 고수한다. 복지부 약무식품정책과 관계자는 “의약분업은 본래 일정 정도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 제도”라며 “보훈병원은 특수병원이지만, 위탁병원은 일반병원이어서 이곳에 원내처방을 허용하는 건 약물 오-남용을 막자는 분업 취지에 어긋난다”고 잘라 말했다. 오히려 고엽제 환자들의 요구는 ‘지나치게 민감하리만치’ 특별하다는 것이다.

    보훈처도 미온적이다. “분업 직후 고엽제 환자의 관련 민원이 쏟아졌지만, 복지부가 일반국민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특혜’를 인정하지 않았다. 약사법 규정상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보훈처 의료지원과 관계자는 “고엽제 질환을 죽는 날까지 짊어져야 할 환자의 고통을 감안해 장기적으로 모든 고엽제 환자에게 원내처방을 해주면 좋겠지만 아직 복지부에 건의할 구체적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미군은 베트남전에서 독성 물질인 다이옥신을 함유한 1900만 갤런의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했다. 지난 4월30일 종전 26돌을 맞은 베트남전은 그러나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고엽(枯葉)처럼 기약 없는 고엽제 환자들의 투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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