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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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족 떠난 곳에 노블레스족이

질적 세련미 중시하는 신귀족층 등장… ‘졸부’ 이미지 지우고 ‘품격’ 강조

  • < 차선아/ 자유기고가 carodea@hanmail.net >

    입력2005-01-28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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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렌지족 떠난 곳에 노블레스족이
    ‘VOGUE야, 넌 잡지가 아냐. 섹스도 아냐, 유물론(唯物論)도 아냐, 선망(羨望)조차도 아냐. 선망(羨望)이란 어지간히 따라갈 가망성이 있는 상대자에 대한 시기심이 아니냐. 그러니까 너는 선망(羨望)도 아냐’ (김수영의 ‘VOGUE야’ 중).

    미국의 팝스타 마돈나인지, ‘마더나’인지는 1984년 이렇게 노래했다. “현금을 (많이) 지닌 애들이 늘 최고의 남편감!”. 노래 제목도 ‘Material Girl’이다. 세속적`-`물질적인 여자라는 뜻인가. 어쨌든 마돈나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계집아이들은 9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압구정동에 몰려 들었다. ‘맥도날드 햄버거 압구정점’(이 의미는 특별하다. 맥도날날드의 한국 진출 1호점. 왜 여기부터 지점을 냈을까). 옆에 자리잡은 노점 꽃가게도 덩달아 번창했다. 계집아이들이 모여들면 사내아이들도 꼬이고, 자연 꽃가게가 잘 될 수밖에 없다. 압구정은 한국식 ‘붐 타운’의 시작이었다.

    90년대 초반 압구정이 ‘욕망의 해방구’ ‘소비의 카니발’로 불리며 한국 자본주의 소비문화를 최초로 말했다면, 이제 2001년은 청담동을 말한다. 90년대의 오렌지족`-`신로데오족이 떠나간 자리에는 밀레니엄 버전의 노블레스족 또 신귀족층(neo noblesse)이 한국 상류사회를 급격히 재편하는 상황이다. 신귀족층의 이름으로 소비문화를 대변하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오렌지에서 노블레스로’ 변화한 기호와 코드는 지난 10여 년 간의 문화적 지형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으로 눈여겨볼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 초반 압구정 골목의 대표적인 중국집은 ‘호화대반점’. 중국집조차도 호화롭지 않으면 안 된 시절이라, 중국집의 고전적 개념을 깨뜨리고 거의 최초로 등장한 서구적 인테리어 감각을 선보인 중국집이라 할 만하다. ‘압구정식 중국집’의 역사는 호화대반점에서 초대형 중국집인 중국성과 만리장성으로 이어졌다.

    이때 이곳의 지배적인 문화 코드는 단연 카페와 로바다야키였다. 카페는 커피숍과 무엇이 다른지 잘 설명되지 않았지만, 안이 잘 들여다보이는 커다란 통유리와 고상하고 화려한 인테리어가 있으면 카페라 통칭하였다. 사실 카페들이 기존의 벽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훤히 비치는 통유리를 설치한 것은 미적 감각 이전에 고도의 상술이었다. 카페 안에 ‘물 좋은’ 여자아이들이 있으면, 길을 가던 사내아이들은 통유리를 통해 이를 확인하고 기왕이면 그 카페로 들어선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집단 부킹’의 원조는 나이트클럽이 아니라, 압구정동에 산재한 수많은 카페들이었다.



    카페에서는 헤이즐넛 커피와 밀러, 칼스버그, 버드와이저 등의 외국산 맥주가 대량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커피 하면 반드시 설탕과 프림을 같이 타는 ‘다방 커피’밖에 모르던 세대에게, 설탕과 프림 없이도 커피 향 자체를 즐기는 헤이즐넛과 ‘아메리칸 스타일’의 등장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한때는 헤이즐넛을 모르면 대화에 끼여들 수도 없었지만, 이제는 헤이즐넛도 너무 흔해 시시한 것으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되었다. 헤이즐넛의 영광을 지금은 에스프레소가 이어받았다.

    말보로와 켄트, 던힐, 다비도프, 마일드 세븐, 카티에르 등의 외제 담배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6개들이 버드와이저 종이박스를 들고 모인다 해서 속칭 ‘버드 파티’라 하는 미국식 파티 문화를 도입한 것도 이때부터였고, ‘버드 파티’는 맥주를 잔에 따라 마시는 것을 ‘촌스럽게’ 만들었다. 저마다 손에 맥주병을 들고 잔이 아닌 맥주병으로 건배하며 마시지 않으면 뭔가 시대에 뒤떨어진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와코’니 ‘하루’니 ‘유키’ 같은 일본 발음 그대로 상호를 쓴 일식집과 로바다야키집이 ‘감히’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일본풍의 대대적인 선풍과 함께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류 같은 일본 신인류세대의 작가들 또한 ‘지적 허영’을 채워주는 매개체로 적절하게 인기를 얻었다. 최근 어느 이동통신 CF에 등장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이미 당시부터 ‘뭔가 고상한 느낌을 주는’ 문화적 소도구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 시절의 압구정은 뭔가 어설펐다. 미국 프로농구나 야구 복장에 모자를 눌러쓴 아이들이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흉내를 내며 노래를 부르고, ‘캘리포니아 롤’을 먹고 있어도 단순한 모방, 유행 베끼기의 냄새를 지우기 힘들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청담동의 타스트 방. 와인을 시음하는 금속잔을 상호로 쓴 이곳에서는 소믈리에 출신의 와인 전문가가 85종의 와인 리스트에 대해 충실히 조언하는 가운데 와인을 즐길 수 있다. 타스트 방은 청담동에서도 제대로 된 와인과 음식을 내놓는 것으로 정평 있는 레스토랑인 것. 일본 도쿄의 ‘타스트 방 아오야마’의 서울 지사인 탓에 도쿄와 똑같은 주방체제로 운영된다. 이 식당을 연 젊은 여사장 홍혜선씨(41)부터가 지역정치학을 전공한 언어학 석사, 동시통역사, 외교관 부인, 방송사 해외통신원 등의 이력을 자랑한다. 이력만으로 문화의 성숙성을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이제 ‘강남문화’에도 와인의 관록 같은 숙성함과 전문성이 붙기 시작한 것일까.

    이제 압구정의 신화는 ‘강남특별시’의 이름으로 확대, 변질해 새로운 문화를 생산한다. 서울 강남구 갤러리아 명품관과 학동 사거리, 청담동 사거리를 꼭지점으로 하는 부채꼴 모양의 거리, 행정구역상 강남구 청담 1동에 속하는 이른바 청담동 ‘여피거리’가 그 물결의 시원이다. 1990년대 초 20대 오렌지들이 30대의 고소득`-`고학력 전문직 종사자가 되면서, 그들의 고급 취향과 기호에 맞는 공간을 새로 건설한 것.

    압구정동과 청담동의 문화적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첫번째 기호는 공간과 정경의 차이. 보행자들이 넘실대는 압구정과 달리 청담동에서 보행자를 발견한다는 것은 낯선 일이다. 쇼윈도 디스플레이의 어법에서도 차이를 드러낸다.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의 쇼윈도가 시간과 공간을 축소 복사한 시대정신의 반영이었다면, 청담동의 루이 비통과 구치, 질 샌더 쇼윈도는 말 그대로 ‘이미지의 정신’으로 구현된 기능에 충실하다.

    두 번째는 일상문화 코드들의 문제다. 오렌지족이 일상의 카니발, 이벤트를 추구하는 쾌락을 추구했다면 신귀족들은 일상을 취향의 연속선상에 두고 있다. 이들은 누벨 퀴진, 퓨전 레스토랑, 바, 와인, 흑맥주, 미니멀리즘 등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과시한다. 음식을 먹어도 음식의 유래와 종류,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스타일의 문제를 다루며 남들과는 다른 차별성에 의미를 부여한다. 퓨전 레스토랑의 효시격인 ‘시안’과 ‘빠진’에서 발 밑으로 물고기가 지나가는 중국풍 술집 ‘치나 바’, 500여 가지의 인도식 차를 파는 티살롱 ‘르 살르 드 마티네’, 이탈리아 시골집 같은 식당 ‘안나뷔니’, 퓨전 중국식당 ‘미스터 룽’, 청담동 제일의 ‘카페 드 플로라’…. 이들은 이전의 카페나 식당과는 다른 맥락에서 소비된다.

    인테리어의 유행은 유럽 모더니즘의 감각으로 바라본 동양 정서를 추구하는, 일본어 선(禪)에서 따온 ‘젠’(zen) 스타일. 퓨전 푸드의 열풍과 더불어 미국 뉴욕에서 유행한 미니멀 스타일이다. 가장 보편적인 ‘젠 스타일’은 영화 ‘정사’에서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가 보여준 것처럼 고급 소재를 단색조로 재질감을 드러내어 ‘물성’(物性)을 강조한다. 흰색 벽에 장식 없는 짙은 색의 나무 마감과 대나무의 사용, 패브릭의 질감 조화 등이 대표적이다.

    세 번째로는 색다른 취향의 무국적`-`다국적 문화의 동시혼재. 청담동의 문화적 상품들은 세부적인 상황으로 재조명된다. ‘카페 드 플로라’와 애견 카페 ‘이글루’ ‘라 살르 드 마티네’ 등은 졸부 2세의 감각과는 차별되는, 가치 있는 공간을 지향한다. 양적 소비보다는 질적 소비에 주안점을 둔 절제된 세련미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는 비단 카페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고 패션과 인테리어에도 적용된다.

    이른바 청담동 스타일이라는 패션 트렌드는 단정한 명품 정장을 선호하며 프라다, 루이 비통 핸드백과 페라가모 구두, 에트로의 액세서리가 기본이다. 화려하게 드러내는 자기 과시보다는 은근히 눈치챌 수 있거나, 아는 사람은 아는 ‘상호이해의 과시’에서 발생한 스타일. 이것은 앞서 언급한 미니멀 스타일처럼 최소한의 표현으로 차별되고자 하는 경향으로, 자극적인 대중문화와 거리를 두려는 고급 문화적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청담동 문화가 넓은 의미의 압구정 문화에 포함되지만,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로써 ‘스노브 이펙트’(snob effect)로 기능한다는 사실이다. 스노브 이펙트는 ‘자기만이 소유한 물건’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소비의 또 다른 행태로 정의된다. 청담동 문화의 주도층은 항시 자신만의 특별함으로 차별성을 추구하며, 중산층이 자신들의 공간을 침범하고 모방하려 들면 그들은 소리 없이 또 다른 공간을 찾아 떠난다. 남들이 쓰지 않는 물건, 희소성이 보장되는 재화를 소비함으로써 만족을 추구하고, 그것이 대중적으로 확산할 경우 소비를 줄이거나 외면한다. 이것이 바로 청담동 유행의 핵심 키워드이자, 그들만의 소통에서 핵심이 되는 문화적 코드다.

    그러나 졸부의 이미지가 강한 압구정동이나 품격을 강조하는 청담동이나 근원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든 사치는 낡아빠지고, 유행은 지나간다는 놀라울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교훈 말이다. 그런데도 모든 유행과 시대적 조류는 타고 남은 재에서부터, 그 실패로 줄기차게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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