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5

2001.05.24

개혁 부진은 레임덕 탓 아니다

레임덕은 정치가 줄 수 있는 즐거움과 묘미 ··· '임기 말 권력누수' 잘못된 인식

  • < 임동욱 / 충주대 교수 · 행정학 >

    입력2005-01-27 14: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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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 부진은 레임덕 탓 아니다
    ‘레임덕‘(lame duck)의 사전적 의미는 미국에서 재선에 실패한 임기중 의원이나 대통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의 경우 권력의 원천이 사람이 아니라 제도에 있기 때문에 비록 당대의 일이지만 차기 대통령에게 부담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정책 결정은 차기 대통령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임기가 끝나가는 대통령에게 레임덕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좋고 나쁜 가치판단의 기준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1993년 초 부시 전 대통령이 임기만료가 채 48시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라크 3차 공습명령을 내린 사실이나, 클린턴 전 대통령이 임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자신이 할 일을 다하고 영예로운 퇴임을 한 사실 등은 우리에게 미국 대통령은 레임덕이 없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정치권은 레임덕을 ‘임기 말의 권력누수 현상’으로만 규정하는 아주 잘못된 인식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통령 단임제를 채택하고 있다. 또한 대통령이 집권당의 총재직을 수행하기 때문에 견제와 균형이라는 고유한 의미의 삼권분립과는 거리가 있는 대통령 중심의 국가다. 당론을 정하면 의원들의 자유로운 교차투표도 허용하지 않는다. 제도가 이렇다 보니 총재나 대통령에 대한 항명이나 레임덕이 이상하게 보이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있다.

    하지만 레임덕은 대통령의 권한누수가 아니라 단지 정치적으로 협상-흥정하는 힘이 약해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는 어떤 면에서 ‘민주주의의 재미’기도 하다. 정치라는 행위의 즐거움과 묘미를 맛볼 수 있는 것이 레임덕이라는 말이다.

    개인으로서의 대통령이 떠난다고 해서 나라의 근본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헌법과 법이 부여한 신성한 권한과 직무는 대통령 개인이 아닌, ‘대통령 직무실’에 있다. 대통령은 그것에 의거하여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임기 말이 가까워질수록 개혁이 안 되고, 공직사회에서 일이 안 된다는 논리는 원천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법치국가에서는 나라의 법과 제도와 질서가 제대로 안 되었기 때문에 개혁이 되지 않고 일이 안 되는 것이지, 레임덕 때문에 일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원칙이다. 다만 우리의 경우 법과 제도와 질서보다, 특정한 사람 곧 대통령이 권력의 젖줄 역할을 하기 때문에 레임덕에 대한 의미도 변질되었고 여러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과거의 정권이 정한 법과 제도 때문에 현 정권이 고생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도한다. 의약분업이 그렇고, 최근에 제정한 모성보호법이 그러할 것이다. ‘선제정 후시행’의 폐해를 우리는 아주 가까이서 본다. 레임덕은 이런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어느 한 정권의 임기 내에 모든 목표를 달성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무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욕심일 수 있다. 국민들 역시 당장 모든 것을 해결하기 바라는 조급증부터 버리고, 차근차근 그러나 결코 중단 없이 개혁을 완수하기를 지켜보는 느긋함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졸업을 축하하기도 전에 주식과 수출, 환율과 물가에 모두 다시 비상등을 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교육이민으로 상징되는 교육정책의 실패, 남북교류의 교착, 실업자의 증가, 노동계의 불만, 의약분업으로 인한 의보 재정의 파탄 등 암울한 현안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이런 현상이 여당의 지방선거 패배로 이어졌다.

    최근에 여권의 후보 조기 가시화론이 고개를 든 것은 이런 상황의 돌파구로 삼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러한 논쟁의 한가운데에 대통령의 레임덕이 자리한다. 그러나 이런 논의 자체가 언어도단이고 법과 규칙에 어긋난 일이다. 대통령 후보는 법과 규칙이 정해야 하고, 이를 정할 법과 규칙이 없으면 만들고 지키면 된다.

    정계개편론 역시 마찬가지다. 나라의 참된 권력은 주인인 국민에게 있다.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즉 거짓 권력을 가진 집단과 지역끼리 이합집산하는 것은 현재의 암울한 현안을 극복하는 길도 아니고, 국민의 심판에 대한 또 다른 기만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레임덕 상황에 들어와 있다. 이를 부인한다고 해서 레임덕이 아닌 것도 아니고, 그런 상황이 나쁜 일도 아니다. 또 막으려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지금의 김대통령에게는 법과 제도가 준 것만큼 퇴임하는 그 날까지 신성한 권한과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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