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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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한평생 소외된 이웃을 위하여”

시민운동권 대부 정학씨… 젊은 시절 ‘필봉’ 접고 봉사의 삶 투신

  • 입력2005-02-24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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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한평생 소외된 이웃을 위하여”
    피맺힌 노래 하나 네 가슴에 묻어두고/ 잠깨기 전에 그냥 갈란다/ 바깥 날씨가 너무 차서 네 목도리 하나 빌려 떠나니/ 당분간 써늘함이야 내 있었던 흔적으로/ 한 겨울 그렇게 지냈으면 한다/ 그러다 보면 곧 冬天(동천)도 풀릴 거고/ 누리 가득히 봄기운 돌면/ 눈물로 덮고 가는 내 쓰라린 노래도/ 비린내 가시고 피어날지 모르지/ (99년 소록일기 중)

    “부끄럽다”며 못내 거절하다 술 한 잔 하고 어렵사리 트인 회고담에는 고단한 삶의 ‘흔적’이 그대로 녹아 있다. 정학(61). 이미 30년 전 시인이기를 중단한 그이지만 소록도를 들를 때만큼은 매 한 편의 ‘일기 같은 시’를 남긴단다. ‘들꽃’이란 그의 시가 왠지 주인의 인생을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국내 최대의 시민단체인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3년째 맡고 있는 시민운동권의 대부(大父)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시민운동 진영에서나 유명하지 그의 이름을 아는 일반인들은 거의 없다. 남다른 언론기피증 때문에 한번도 왁자하게 이름이 오르내린 적이 없는 데다, 그의 주 활동 무대가 대구-경북 지역이라 언론의 조명이 미치지 못한 탓도 크다.

    “나도 기자 생활을 2년쯤 했었지 아마. 글을 쓴다는 게 부끄러운 시대였어요.” 시민운동권 내부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의 언론기피증은 사실 그 자신의 기자 생활에서 비롯됐다. 1973년 옛 대구일보의 문화부 기자로 있던 그는 ‘통제된 죽은 글’을 쓰는 것에 절망한 뒤 펜을 놓았다. 당시 문학계에서 구상 시인의 ‘문학적 장자(長子)’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지만 시도 그만 쓰기로 했다. 서슬 퍼런 유신정권은 그에게 절필을 강요했고, 그는 시 대신 사회운동을 선택했다.

    “‘글이 도대체 사회정의에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라는 근본적 회의가 몰려들더군요.” 그는 신문사를 그만둔 뒤 바로, 당시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대구지역 기독학생운동권의 대학생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조직의 이름은 ‘어떤 모임’. 정식 이름을 가졌다가는 ‘간첩단’으로 몰려 붙잡혀가기 일쑤였던 암울한 시기의 상징적 단체명이었다. 독재권력에 맞선 민중저항운동과 소외된 이웃에 대한 봉사활동, 양자택일을 강요하던 당시 운동권의 시대상황에서 그는 양쪽을 모두 선택했다. “사회 불의는 증오나 말살의 대상이 아니라 순치와 개혁의 대상입니다.” 그는 대학생이 중심이 된 ‘어떤 모임’에서 사회적 모순을 연구하는 성경 연구회를 이끄는 한편, 대구 근교의 고아원과 양로원에 대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 바람에 재야운동권에서는 ‘개량주의자’로 낙인찍혔다. 그도 괴로웠지만 당장 소외된 이웃을 방치할 수 없었다.



    “독이 깨졌다고 당장 독을 새로 만들 생각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을 계속 부어가면서 독을 새로 만들어야 했지요.” 교사였던 부인에게 생계를 맡긴 그는 두 아이의 우유 값이 없어도 봉사활동은 거르지 않았다.

    1980년 그의 시민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 외부 세계로는 정보가 철저하게 차단된 상황에서 그는 광주지역의 이야기를 손바닥처럼 보고 있었다. 대구에 있으면서 비밀리에 광주에서 수배를 받고 도망하던 인사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기 때문. ‘어떤 모임’ 출신의 운동가와 직장인들이 이를 도왔다.

    “광주를 보면서 이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80년대 들어 재야운동권과 시민운동 진영의 ‘대타협’이 이루어지면서 수백명으로 불어난 ‘어떤 모임’을 ‘참길회’로 명명하고 본격적인 시민운동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참길회의 스터디 그룹은 80년대 대구지역 민주화 학생운동권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고, 자원봉사활동은 아동-노인복지시설뿐 아니라 전과자의 갱생원인 재활원까지 영역이 확대됐다. 회원도 나날이 늘어갔다.

    “우리는 자유, 평등, 정의의 혜택이 편견 없이 구현되는 사회를 지향하며 이 불변의 가치가 변이되는 어떠한 부조리도 근원적 자세에서 거부하며… 특히 우리는 가난과 유약으로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우리가 누리는 지극히 범상한 안일일지라도 그들과 더불어 나누기를 원한다….” 그가 직접 쓴 참길회의 전문에는 그의 인생을 지배했던, 또 그를 따르는 후배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 ‘절제와 나눔’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난 84년 참길회의 활동이 자리를 잡아갈 때쯤 그는 우연하게 찾아간 전남 고흥군 소록도의 선술집에서 국립소록도병원의 신정식 원장을 조우하게 된다. 한평생 나병 환자에 대한 진료봉사활동으로 소록도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그였다.

    “신원장의 초청으로 다음날 아침 병원 안을 도는데 대구에서 찾아온 나를 위해 40여 명의 나병 환자가 하모니카 합창을 하는 게 아닙니까. 그들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으니 큰 교회에서 연주를 하고 싶다는 겁니다.” 당시 2700여명에 달하는 나병 환자들은 감염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소록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들을 초청했고, 대구 삼덕교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나병 환자들의 연주에 감동의 박수와 찬사를 보내줬다. 이 때문에 교회 사용을 허락했던 교회 당회장이 미국으로 도망가는 희생을 치렀지만….

    몇 개월 후 사슴섬 소록도에는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가 1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을 데리고 나병 환자를 목욕시키겠다며 찾아온 것. 참길회 회원도 있었지만 전과자 출신의 재활원생도 10여명 끼여 있었다. 물론 소록도 병원이 생긴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진물이 흐르고 손발이 끊어져 없어진 나병 환자들을 3박4일 동안 목욕시키면서 그도 울었고 나병 환자들도 울었다.

    “평생 울어야 할 눈물을 그때 다 흘린 것 같습니다.” 소록도 첫 방문을 회상하던 그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때 생각만 하면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이후 그와 회원들은 17년째 소록도를 찾아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에는 8월 초와 1월 초 두 번으로 방문 횟수가 늘었다. 87년 이후 시민운동의 팽창기를 맞아 참길회는 서울과 부산, 안동으로 퍼져나갔고, 각 지방마다 ‘참길공동체’가 형성됐다. 나눔과 절제를 몸으로 실천하는 봉사단체이자 사회 부조리에 맞서는 시민단체의 성격을 모두 가진 대학생과 일반인의 단체였다.

    참길공동체 사업에 전념하던 그는 91년 뜻밖의 방문을 받는다. 당시 국내 최대 시민단체였던 경실련의 사무총장 서경석 목사였다. 그와는 70년대와 80년대 기독사회운동을 함께 하면서 알게 된 사이지만 별다른 왕래는 없던 터였다.

    “본격적 경제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차에 서목사의 부탁도 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게 대구 경실련이죠.” 대구 경실련의 공동대표를 함께 맡게 된 그는 그 해 봄 구미 페놀 사태가 발생하자 대구공해추방운동협의회 의장으로 추대됐고, 2년간 거기에 매달리면서 환경운동가로 변신했다.

    “나눔과 절제의 정신은 환경운동과 또 생명운동과 다른 것이 아니죠. 우리의 땅을, 자연을 절제하며 나누고 산다는 것, 그것이 환경운동입니다.” 페놀사태로 환경문제가 시민운동의 화두로 등장하던 93년 그는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으로 환경운동연합의 창립에 앞장섰고, 대구에도 대구환경운동연합을 건설했다. 낙동강 수질오염 사태 해결을 위한 싸움, 가야산 해인골프장 건설 반대 투쟁 등 크고 작은 환경운동의 틈새에서 그는 어느덧 국내 환경운동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

    ‘개혁의 파도 위에 뜬 항모’ ‘고향 앞에 선 느티나무 같은 운동가’ 그를 지칭하는 시민운동권 내부의 별칭들은 시민운동권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케 한다. 대구-경북지역 시민운동의 ‘모태’ ‘메카’ ‘대부’ 등 온갖 대명사가 따라붙지만 그가 진정으로 듣기 좋아하는 말은 ‘그늘진 사람들의 아버지’뿐이다.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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