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9

2001.04.12

영국 신흥 부유층 “귀족이 따로 있나”

IT 중심 백만장자 젊은 기업가 고급 사교클럽 성황 … 문화적 소양 쌓기 열중

  • 입력2005-02-23 15: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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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신흥 부유층 “귀족이 따로 있나”
    폴은 영국에서 가장 인기 좋고 수입이 많은 금융회사 투자 전문가로 30대 중반의 독신이다. 연봉은 100만 파운드(18억5000만원 정도). 영국에서 폴과 비슷한 연봉을 받는 사람은 4000여명밖에 안 된다. 폴은 포르셰를 몰고 다니고 노팅힐에 있는 호화 아파트에서 살며 프랑스에 별장을 가지고 있다. 하루 저녁 식사로 200 파운드(40만원 정도)는 가볍게 쓴다.

    그는 직장생활 10년쯤까지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쁘고 즐거웠다. 그러나 이제 그는 비슷한 무리와 어울리기 위해 소설도 읽고 예술에 관심을 가지며, 좋다는 포도주를 모으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 3월13일 영국 ‘싱크 탱크’ 집단의 하나인 ‘미래 재단’(Future Foundation)이 발표한 조사 통계는 소득 정도에 따라 영국 사람들이 여가 시간을 보내는 풍속도가 어떻게 다른지 보여준다. 이 보고에 따르면 영국에서 가장 유동자산(부동산, 연금, 보험 등을 제외한 순수 금융자산)이 많은 사람들은 부동산을 상속받고, 1980년대와 90년대 금융시장에서 목돈을 벌었으며, 자녀들을 다 출가시켜 지출이 줄고, 직장에서 은퇴했지만 영국에서 제일 발달한 산업인 투자 금융 덕으로 유복한 노후를 즐기는 가장이다.

    이들은 비슷한 무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해 회원 관리가 까다로운 클럽 활동에 다른 계층보다 월등히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영화관보다는 연극이나 음악회에 더 자주 간다. 외식이 다른 계층보다 월등히 잦은 반면(바로 밑의 계층보다 두 배가 넘는다)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일은 훨씬 적다. 이들은 또 다른 계층보다 봉사활동에 2배가 훨씬 넘는 시간을 바친다.

    인구의 한 줌밖에 안 되는 이들은 가장 적게 일하면서도 가장 많이 벌고 행복지수조차 제일 높다는, 불공평하고도 전통적인 통계 수치를 지켜왔다. 그러나 최근 이들이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정보 산업을 기반으로 한 젊은 기업가와 여성의 약진이 두드러진 까닭이다. 이들은 새벽별 보기를 밥먹듯 하며 일에 파묻혀 사는 일벌레들이다. 또한 진보적이고 자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 지극히 보수적인 기존 부유층과 차별된다. 하지만 나이가 많든 적든,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일하는 시간이 얼마이든 간에, 이들 돈 많은 사람은 몇 가지 공통적인 생활 패턴이 있다. 저녁 시간을 집보다 밖에서 즐긴다는 점이다.



    영국 신흥 부유층 “귀족이 따로 있나”
    고급 사교 클럽은 이들 혜택받은 계층끼리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중요한 수단이다. 모임이 없는 날이면 가족이나 친지들과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기며 연극이나 영화, 음악회에 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느냐는 것. 최근 장안의 화제인 보티첼리 전시회에 가 본 이야기를 단테의 ‘신곡’이며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지식과 엮어 재치있게 소화할 수 있으면 상류 사교계에서 인기를 얻는 데 별 무리가 없다.

    45년 만에 새로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마이 페어 레이디’에 대해서는 조지 버나드 쇼의 원작 희곡 ‘피그말리온’과 줄리 앤드루스 주연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할리우드가 만든 오드리 헵번 주연 영화가 어떻게 다른지 세련된 식견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음악회 단평도 문화적 소양을 드러내는 단골 소재. 새로 떠오르는 별이 누구인지, ‘아이다’는 로열 알버트 홀에는 왜 맞지 않는지, 조목조목 그러나 감칠맛 나는 어휘로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

    클럽이나 저녁식사 모임에서 누가 먼저 최신 화제를 꺼내 얼마나 많은 지적 즐거움을 선사했는지가 그 사람에 대한 중요한 척도가 된다. 따라서 카메론 매킨토시 제작-트레버 넌 감독-조너선 프라이스와 마틴 매커친 주연의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이 재능이 검증된 이들이 올리는 작품의 경우, 지난 3월15일 첫무대 막이 오르기도 전에 이미 200만 파운드(37억원 정도)의 표가 팔려나가기도 했다. 부자들의 신문인 ‘파이낸셜 타임스’에 뉴욕 공연-전시 안내가 실리고 ‘뉴욕 타임스’에 런던 공연-전시 안내와 공연평이 실리는 것도 제트기를 타고 대서양을 넘나드는 부유층들이 저녁 시간을 좀더 멋지게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신진 재벌들은 전통적 상류사회의 문화적 두께를 감당할 수 없다. 전통파들은 언어조차 다르다. 소위 귀족 영어 (Queen’s English)를 쓰는 이들은 인구의 5% 정도밖에 되지 않고 이는 곧 사회적 신분과 대충 맞아떨어진다. 그들끼리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발음과 억양과 속도, 어휘가 있어 다른 계층의 접근을 사전 봉쇄한다. 문화계 화제도 비슷한 계층을 걸러내기 위한 그물막으로 작용한다.

    폐쇄적인 상류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확실한 자기 분야가 있어 대화를 풍부하고 유익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영국 신흥 부유층 “귀족이 따로 있나”
    유동자산 2만5000 파운드(4600만원 정도) 이상 5만 파운드(9200만원 정도) 이하의 중산층들은 저녁 여가시간을 위한 투자에 열심이다. 반면 저소득층은 배우는 데 가장 소극적이고 펍에서 음주를 즐기거나 친구 집을 방문하는 데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식인 집단이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는 중산층 대화에서는 ‘새로운 지식’이 역시 제일 중요하다. 영국 지식인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는 물론 관련 분야 저널까지 정기구독하는 까닭도 대화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다. 30대 중반인 스콧은 영국의 명문 비즈니스 스쿨 교수다. 그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주요 기술 전문지에 실린 최신 발표들과 가장 최근에 유행하는 농담 시리즈가 포함되어 있다.

    요즘 중산층 지식 노동자들의 가장 큰 바람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이다. ‘해리 포터’로 극빈층에서 부유층 귀족으로 입신한 작가 J. K. 롤링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책을 써서 목돈을 만지고 유명해지겠다는 것은 문학의 나라에서 백만장자의 꿈을 실현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기도 하다. 자기 사업을 갖겠다는 것, 인터넷 업계의 마지막 틈새시장을 노리고 있다는 것, 다 던지고 미국이나 호주, 스페인이나 뉴질랜드 같은 나라로 이민하겠다는 것도 중산층의 단골 화제다. 나만 빼고 남들은 다 잘 사는 것 같은 강박관념은 영국 중산층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 토머스 스탠리와 윌리엄 단코가 ‘백만장자 이웃’에서 설파했듯 이제 중산층은 고소득층의 성공 비결을 파헤치고 쫓아가느라 평생을 소비하는 집단으로 부각되고 있다.

    사실 요즘 영국 사람들 주머니가 두둑해졌다는 것은 거리의 자동차들을 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3, 4년 전만 해도 영국에는 작고 낡은 차가 주종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새로 나온 중대형 고급차들이 거리마다 가득하다. 영국인을 비롯한 유럽 사람들이 작은 차를 좋아하고, 오래 된 자동차를 잘 손질해 쓰기로 이름났던 것은 이제 옛날 이야기다.

    이는 통계 수치에서도 드러난다. 영국인의 가계 소득은 전년도인 2000년 1월에 비해 3.9% 늘어났고, 실업률(정부 발표 3.4%, ILO 통계 5.2%)은 25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실업률이 영국보다 낮은 미국(4.2%, ILO 통계)과 일본(4.6%, ILO 통계)의 경제 전망이 밝지 않은 데 비해, 영국을 포함한 유럽은 향후 몇 년간은 실업률이 계속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총인구의 6%인 유동자산 5만 파운드 이상의 부유층은 5년 전인 1995년에 비해 50%나 증가했다. 5년 후인 2005년이면 8%의 ‘거대 소비 집단’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1000명 가운데 한 명인 백만장자 숫자도 일년에 40%씩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고, 일주일에 한 타스가 넘는 사람들이 37억 이상의 자산 보유자로 새로 등록되는 21세기 영국에서 새로 각광받는 직업은 ‘생활설계사’(lifestyle organiser)다. 이들은 날로 늘어나는 고소득층들에 요트며 전용기, 경주마, 고급 포도주 등을 공급해주고 집사, 가정부(보통 월 370만원 급여에 숙소 제공), 운전사들을 찾아주고 온갖 집안 대소사를 챙겨준다. 프랑스 사람들은 돈을 벌어 입는 데 쓰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먹는 데 쓰며, 영국인들은 집을 가꾸는 데 쓴다는 말은 이제 흘러간 옛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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