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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형 간염 보균자, 억울한 ‘天刑의 삶’

일상 공동생활에서는 감염 안 돼 취업 제한 규정 삭제에도 편견 속 차별 여전

B형 간염 보균자, 억울한 ‘天刑의 삶’

B형 간염 보균자, 억울한 ‘天刑의 삶’
지난해 11월 국립보건원 방역과에 탄원서 한 통이 날아들었다. 거기엔 B형 간염 보균자로 ‘천형’(天刑)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한 시민의 뼈아픈 현실이 담겨 있었다. “이것은 국가에 의한 인권유린이고, 사회적 소외를 방조한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는 이 ‘천형’이 B형 간염에 대해 무지와 잘못된 정책으로 일관한 정부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 주장한다.

탄원서의 주인공은 부산시 금정구 부곡4동에 사는 김모씨(56). 울산 H사의 외주업체를 경영하던 그는 지난 95년 1월 신체검사에서 B형 간염 ‘건강 보균자’라는 진단을 받는다. H사는 전염병예방법 상의 ‘간염 업무종사자 취업제한’ 규정을 빌미로 그에게 공장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삶의 터전을 잃은 그는 거리로 내몰렸다. “보균자라도 전염성은 있다”는 것이 회사의 주장. 이후 김씨는 다른 회사에도 원서를 내봤으나 번번이 같은 이유로 거절당했고, 결국 지난해 생활보호대상자로 전락했다. 아버지와 같이 간염 보유자 판정을 받은 그의 아들(29)도 보건대학을 나와 각종 자격증을 소유하고 있지만 취업을 하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 생활을 전전하고 있다.

국내 보균자 300만명 추산

B형 간염 보균자, 억울한 ‘天刑의 삶’
김씨는 정부가 지난해 10월5일 전염병예방법 상의 ‘B형 간염 업무 종사자에 대한 취업제한 규정’을 시행규칙에서 삭제하자 이같은 탄원서를 냈다. 그는 탄원서에서 “그동안 시행된 취업규제는 정확한 근거도 없이 일상생활에서의 ‘전염성’을 오판한 것으로 개인에게 경제활동의 기회를 박탈하고, 사회적 소외 속에서 죽어가게 했다”고 정부를 비난했다.

B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 흔히 B형 간염 보균자로 통하는 사람들은 지난해 이 법의 개정 이전까지 실제 간염의 발병 유무와 관계없이 제3종 전염병 환자로 취급받았다. B형 간염의 심각성이 대두되던 80년대, 정부는 술잔을 돌리고 음식을 함께 먹는 잘못된 식생활이 한국을 B형 간염의 천국으로 만든다며 식생활 및 음주문화 개선을 위한 캠페인까지 벌였다. 이는 20여 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사회적 통념으로 굳었고, 이를 부정하는 시민들은 오히려 청결하지 못하고 건강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란 핀잔을 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국립보건원은 지난해 10월 이런 사회적 통념을 전면 부정했다. “B형 간염은 수직(모자) 감염, 오염된 혈액에 의한 감염, 성 접촉 등을 통한 전파 등이 가능하며 일상적인 공동생활(타액-피부 접촉, 호흡기 감염)을 통해서는 감염되지 않으므로 동 질환의 관리방법을 격리 등의 조치에서 제외함.” 지난해 11월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이종구 방역과장은 이를 다시 확인했으며, 보건원은 지금까지의 취업제한 규정이 잘못된 학설에 따른 피치 못할 규제책이었다고 해명했다.

문제는 이런 식의 피해를 당한 B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국립보건원이 추정하는 국내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는 전국민의 5∼8%로 어림잡아도 300만명에 육박한다. 일반적으로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에는 간암, 간경변증, 만성 활동성 간염, 간염 바이러스 건강 보유자(이하 간염 보균자)가 모두 포함된다. 간염 보균자는 바이러스 항원을 가지고 있어 전염력은 있지만 간 기능은 정상적인 사람들로, 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다만 간염으로의 발병률이 일반인보다 조금 높다는 것 이 외에는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도 간염 보균자들은 간염바이러스 보유자라는 이유만으로 일상생활 및 취업에서 차별을 받아 온 것이다. 공무원-교사-장교 선발은 물론이고, 공기업에서까지 ‘건강 보균자’에 대한 취업을 꺼렸다. 물론 그 근거는 전염병 예방법 상의 취업제한 규정이었다. 지난해 12월 한나라당 김홍신 의원(보건복지위)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30대 대기업군의 41개 기업 중 9개 업체가 간염 바이러스 보균자를 탈락시키고 있었고, 포항제철과 한국산업은행 등 공기업도 상황은 마찬가지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법개정 이후 간염 보균자에 대한 차별은 없어진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법은 개정되었으나 굳어진 사회적 통념이 문제였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죠. 공무원 선발이나 공기업 취업은 나아지고 있지만 일부 대기업과 대부분의 기업은 그대로입니다.” 간염 보균자의 취업차별 철폐를 위한 사이트(http://user. chollian.net/~handor/)를 운영중인 서울 한빛내과 한상율 원장(내과 전문의)은 B형 간염을 또 하나의 ‘천형’으로 만드는 속박은 이제 ‘법’이 아니라 ‘간염은 무조건 전염된다’는 사회적 편견이라고 지적한다.

“주위사람에게 간염 때문에 떨어졌다는 말도 못하고, 정말 미칠 지경입니다.” 지난해 12월 서울 강남에 있는 정보통신업체 C사에 최종 합격한 김모씨(27)는 첫 출근과 동시에 퇴사당한 경우. 간염 건강 보균자로 간 기능 수치도 정상이고 직장생활에 지장이 없다는 의사소견서도 준비했다. 그러나 그가 출근 당일 회사측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B형 간염이어서 안 된다”는 말이었다. B형 간염 보유자에 대한 차별은 중소 규모의 회사나 대기업이나 다를 바 없다.

“간 기능이 정상이라 하더라도 표면 항원과 e항원이 양성이면 활동성이지 않습니까. 그럼 전염성이 높은 것이고 채용이 불가능합니다.” 국내 굴지의 L그룹 계열사들과 S기업, A항공사 등 대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은 한결같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결국 이들은 잘못된 의료지식을 가지고, 일상생활에서 간염의 전염성을 미신처럼 믿고 있었다.

특히 식품, 약품, 유통 등 서비스 업종에서의 편견은 더욱 더 심하다. K제약, S제약, L쇼핑, H식품의 인사 담당자들은 “간염 바이러스가 발견된 사람은 선발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된다”고 잘라 말한다. 그들의 논리는 단 한 가지. 국민 건강과 직결된 업종에 종사할 사람인데 전염성 바이러스 감염자를 쓸 수 있냐는 것. 이들에게 정부가 공식적으로 간염 바이러스가 일상생활에서는 전염되지 않는다고 발표한 것을 아느냐고 묻자 “취업 자원은 많고 기업은 어쨌든 더 건강한 사람을 뽑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딴소리를 했다.

B형 간염의 ‘천형’은 기업에서뿐만 아니라 군대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특수성 때문에….” 해군본부 의무감실의 한 관계자는 “간염 건강 보균자의 해군사관학교 입학과 일반장교 임관이 아직도 제한되고 있다”며 “이는 육-해-공군이 마찬가지다”고 말한다. 그는 간염 보균자의 군 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군의 특수성을 감안해 달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간염 보균자들이 처한 이와 같은 부조리한 상황을 타개할 길은 없는 것일까. 국립보건원 방역과 최철호 서기관은 “취업제한 규정을 삭제하면서 취업차별에 대한 처벌 조항을 만들지 못한 것이 실수”라며 “조만간 법 재개정을 통해 처벌 조항을 신설하면 상황이 많이 개선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밥을 혼자 먹고 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제가 차라리 뽑지 않았으면 하는 후회가 생깁니다.” 대기업인 B사 인사팀의 이모씨(36)는 자신도 간염 보균자이기에 상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간염 보균자를 채용했지만,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왕따’시키는 것을 보고 느끼는 바가 컸다고 한다. 법의 강제만으로는 이 사회에 ‘암’처럼 퍼져 있는 간염 보유자에 대한 편견을 모두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편 홈페이지(http://user. chollian.net/~drleo/)를 통해 자신도 간염 보균자임을 떳떳하게 밝히며 간염 보균자에 대한 취업차별 철폐운동을 벌이고 있는 대구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내분비과 이동욱씨(32·내과 전문의)는 이 사회의 ‘무지’와 ‘편견’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모든 사람이 간염 예방 접종을 통해 면역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간동아 2001.03.01 273호 (p44~45)

  •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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