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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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폭로’ 누가 좀 말려줘요

근거 없는 허위날조 엄청난 확대 재생산…브레이크 장치 없어 선의의 피해자 양산

  • 입력2005-10-05 12: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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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 폭로’ 누가 좀 말려줘요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다고 하네요. 이 글 끝까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아침 동생을 잃었습니다… 모 병원을 고발합니다.’(ID 청선)

    ‘제 동생은 소아마비 환자입니다. 동생은 해변을 산책하던 중 H대학 학생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했습니다….’(ID 하늘천사)

    인터넷 서핑을 즐기는 네티즌이라면 한번쯤 접해봤음직한 글들이다.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브레이크 없는 폭로’의 행렬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엽기’ ‘쇼킹’ ‘대특종’ 등 하나같이 선정적인 말머리를 단 이같은 폭로성 글들이 인터넷의 엄청난 전파력을 타고 확대 재생산되면서 네티즌들의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

    물론 인터넷을 통한 폭로 모두가 날조된 허위인 것만은 아니다. 친딸이 직접 올린 ‘광주 여자파출소장 불륜사건’이나 ‘386 국회의원들의 5·17 술판사건’ ‘축구 한-중전 훌리건 난동 파문’ 폭로 내용 중 상당 부분은 사실로 밝혀져 이들은 이미 폭로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들은 또 다른 ‘고전’을 꿈꾸는 ‘아류’의 등장을 낳았다. 최근엔 ‘1950년대부터 2000년까지의 연예인 매춘 역사’ ‘Y여고 학생간부 수련회가 설악산에서 열렸는데 인솔교사가 심야에 학생들을 성희롱했다’는 식의 신종 폭로도 등장했다. 아류들의 가장 큰 특징은 ‘바이라인’(by-line·신문-잡지기사 말미에 필자의 이름을 써넣는 행)이 없다는 것이다.



    인터넷이 ‘폭로의 장’으로 변질된 이유는 간단하다. 이른바 ‘문지기’로 불리는 ‘게이트 키퍼’(Gate Keeper)가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오르는 폭로의 대다수가 허위이거나 과장이 심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저널리즘의 형식을 본뜬 이같은 폭로들은 아무런 여과장치도 없이 언론사 인터넷 게시판이나 ‘보드게이트’ ‘벼룩통신’ 등과 같은 게시판 전문사이트를 주무대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사이트 운영자들의 삭제도 물량공세를 펴는 이들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근거 없는 비방이나 허위날조 등은 삼가라’는 경고문은 익명성이라는 ‘만능열쇠’ 앞에서 말 그대로 경고에 머물 뿐이다.문제는 제대로 모니터링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속히 퍼져나가는 이같은 폭로들이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한다는 점이다. 사실관계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폭로내용’에 언급된 당사자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피해를 주고 있는 것.

    최근 법무부 홈페이지의 여성포럼 게시판 ‘자유마당’에 오른 속칭 ‘아나운서 괴담’은 인터넷 폭로가 절정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내용인즉 “모 공중파 방송사의 여자 아나운서들과 모 대학 교수들이 환락의 성(性) 파티를 벌였다. 모 교수와 선후배 사이인 모 방송사 PD가 이 아나운서들을 ‘상납’했다”는 것이다.

    모 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N씨가 1인칭 시점에서 양심선언 형식으로 작성한 이 ‘괴담’의 압권(?)은 글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 10여명의 이름이 모두 실명이라는 점. 아나운서들은 물론 N씨와 거론된 교수들마저도 모두 실명인 데다 등장인물과 정황이 너무 구체적이어서 이들은 상당한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진위 여부를 떠나 엄청난 ‘인격 모독’을 저지른 이 글은 법무부에 의해 곧 삭제됐다.

    다른 정부기관들도 실체가 없는 폭로들로 곤욕을 치르기는 마찬가지다. 광복절을 전후해 유명 사이트마다 ‘도배’되고 있는 ‘한국을 비하하는 일본 랩가수 DNP006의 노래가사와 뮤직비디오 폭로’ 내용은 한-일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문화관광부가 주일 한국대사관에 공문을 보내 사실 확인에까지 나섰을 정도다.

    문화관광부 관계자는 “실체 없는 폭로라 할지라도 정부기관으로선 조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근거 없는 소문이나 ‘설’(說)을 붙잡고 막연히 이를 추적하다 보면 시간과 인력 낭비도 엄청나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사이버 공간의 등장은 기존 대중매체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개인의 언로(言路)를 틔웠다. 하지만 잘못된 참여와 언어폭력이 방치될 경우엔 개인의 사생활권 침해와 명예훼손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이인희 교수는 월간 ‘신문과 방송’(2000년 8월호)에 기고한 ‘사이버 여론의 역기능’에 관한 글에서 “사이버 여론의 평가기준은 ‘신뢰성’이 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무차별하게 등장하는 폭로들의 악의성을 ‘폭로’해야 할 위치에 있는 인터넷 매체의 일부 구성원들조차도 ‘균형감각’이 결여돼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다음은 익명을 요구한 한 신문사의 인터넷 리포터(32)의 토로. “모든 국민이 기자가 될 수 있는 e-세상의 투명성은 좋다. 그러나 솔직히 원고료를 많이 받거나 남들보다 기사를 많이 쓰기 위해 ‘소문’을 출발점으로 기사를 쓰거나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얘기들을 조합해 인터넷에 올리는 동료들마저 있다. 이런 판에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런 글들을 ‘기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쯤 되면 ‘진정한 폭로’인지, ‘폭로를 가장한 폭력’인지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이런 가운데 소외 계층의 분노와 기존 언론이 다루지 못한 영역을 다룬다는 취지를 내세운 게시판 전용 사이트들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와 궤를 같이하며 ‘규제할 수 없는 자유세계’로 파고드는 일련의 폭로들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나눔’과 ‘열림’의 미덕에 인색했던 오프라인 세계에 대한 도전이자 테러일 수도 있다.

    ‘저는 김○○이라는 의경입니다. 이렇게 글을 올리는 건 전 오늘 죽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흠… 방금 15층 옥상에 올라갔다 왔는데, 그냥 죽으면 너무 개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글을 띄우고 죽습니다…’

    8월17일 한 지방신문사의 인터넷 독자투고란에는 경찰서 소속 한 의경이 근무지를 이탈하며 올린 ‘인터넷 유서’가 떴다. 상관과 고참들의 구타와 욕설을 고발하는 폭로내용이 담겨 있었음은 물론이다. 잠적한 이 의경의 행방은 현재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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