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9

2000.06.22

거리 ‘점령’한 플래카드

  • 입력2006-01-25 13: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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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 ‘점령’한 플래카드
    필자가 연구하고 가르치는 연세대학의 교정은 아름답다. 봄이면 봄대로 화사하고, 가을이면 가을대로 그윽하다.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연희관은 돌건물의 단아함을 보여주고, 청송대는 참나무와 소나무 이파리로 싱그럽다. 아침 저녁으로 학교의 동문(東門)으로 출퇴근하는 나는 차없이 걸어다니는 사람의 행복을 마음껏 누린다. 대학이 배출해내는 인재는 그 대학의 숲의 깊이에 비례한다는 말을 나는 매일 되새기곤 한다.

    그러나, 이런 마음의 평정은 학교의 정문(正門)으로 출근을 하는 날이면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백양로를 걸어 올라오는 길 양 옆으로 늘어선 플래카드들 때문이다. 한 번은 하도 플래카드가 어지럽게 걸려 있어, 그 수를 세어보았다. 정문에서 연희관까지 오는 사이 무려 54개가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물론 그 내용이야 옛날에 비하면 많이 순화된 편이다. 1980년대 백양로에 걸려 있던 플래카드는 대개 두 부류였다.

    ‘전두환을 처단하자’ ‘노태우를 타도하자’는 ‘붉은’ 깃발이 있는가 하면, 그 정반대로 ‘이재옥토플’ ‘운전면허특강’ 하는 식의 ‘어용’이 있었다. 그 내용은 바뀌었지만, 플래카드의 수는 훨씬 더 많아지고 다양해진 셈이다.

    플래카드의 홍수는 대학만이 아니다. 지금 현재 세종문화회관 앞뒤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의 수만도 42개에 달한다. 그 옆의 정부종합청사마저 10m짜리 대형 플래카드 두 개를 늘여놓고 있다. 종합청사 바로 앞 도로에는 ‘생각을 바꾸면 당신도 신지식인이 될 수 있습니다’와 ‘기본을 바로세워 일류국가 이룩하자’는 구호가 사각기둥에 세워져 있다. 경복궁의 담, 예술의전당도 쓰레기 같은 플래카드로 덕지덕지 뒤덮여 있다. 한 나라의 정신을 대표해야 할 기념관이나 공연장, 대학, 나아가서는 정부의 종합청사까지도 플래카드로 뒤덮이는 피폐한 정신상태 속에 오늘의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생각컨대, 플래카드는 눈으로 듣는 외마디 소리다. 항의 아니면 외침, 교시조의 구호가 대부분이다. 인간적인 ‘깊은 눈’과 사회적 성숙을 응시하는 ‘먼 시선’은 찾아볼 길이 없다. 전국적으로 일회용 플래카드를 만들기 위해 지출되는 그 비용은 차치하고, 그것은 한국 국민의 정신을 황폐화시키는 하나의 주범임에 틀림없다.

    1960, 70년대에는 박정희정권이 플래카드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전국의 육교마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건설’이니 ‘국적있는 교육’ ‘국민총화’ 같은 구호들을 걸어놓고, 개발과 독재를 맞바꿀 것을 강요하였다.

    이제 그 독재에 맞서 항거하던 대학과 문화단체들도 그 싸우는 과정에서 박정희정권을 똑같이 닮아갔다. 이제는 국민의 개인적인 삶에까지 그대로 침투되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호텔의 백일잔치, 칠순잔치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플래카드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5000년 역사와 유구한 정신문화를 자랑한다. 물질문명은 서구에 뒤졌지만, 정신문화는 앞섰노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을 나눌 수 있다는 얘기는 허구이다.

    물질문명이 뒤진 나라가 정신문화에서 앞설 수 있다는 얘기도 필자는 신뢰하지 않는다. 역으로, 정신문화가 뒤진 채 앞선 물질문명을 건설하고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늘 대한민국의 전국토를 뒤덮고 있는 플래카드를 보면서, 과연 우리가 정신문화에서 서구를 앞서고 있는 나라인지 심각하게 되묻는다.

    혹시, 이 칼럼을 읽고 전국의 플래카드 업자들이 필자의 연구실에 험악한 플래카드를 걸어놓지 않을까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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