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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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生춤死’ 춤에 미친 팔방미인

  • 입력2006-01-25 11: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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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生춤死’ 춤에 미친 팔방미인
    빨간 구두를 신고 빙글빙글 돌기를 30시간. 낮에 촬영장에 들어가 다음날 저녁이 돼서야 CF촬영이 끝났다. 몸은 젖은 솜처럼 무겁고, 저절로 눈이 감길 때마다 박명수씨는 이런 생각을 하며 기운을 차렸다.

    “재즈댄스 배웠지, 고등학교 선생님-대학강사 모두 해봤지, TV출연도 해봤지, 미국에 가서 유명가수들 백업댄서도 해봤지, 누드사진도 찍어봤지, 거기다 CF주인공까지…. 내가 원하던 모든 것을 하게 됐어!”

    한 인터넷쇼핑몰 TV광고에서 검정 슬립드레스를 입고 열정적으로 춤을 추던 이가 바로 박명수씨다. 하지만 이 CF를 찍은 뒤 그는 쓴맛을 보았다. 막상 방영된 CF에는 얼굴이 한번도 비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비로소 자신은 목숨 걸고 하는 춤을, 사람들은 단지 소모품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콜라텍이다 DDR다 해서 신세대는 춤에 열광하지만, 기성세대는 여전히 백업댄서를 가수의 ‘액세서리’ 쯤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가수 박미경과 클론의 백업댄서, 엄정화의 안무자. 이쯤 하면 박명수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그의 춤은 떠올릴 수 있다. 박씨는 자서전 ‘춤에 美친 여자’(디자인하우스)를 통해 한국 제1의 백업댄서로서의 자존심을 세상에 외쳤다. 그는 “대학에서 강의하는 사람은 백업댄서 하면 안되나?”로 말문을 연다.

    “춤이란 자유 그 자체다. 나는 백업댄서가 실력이 모자라 가수 뒤에 서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리고 싶다.”

    세종대 체육학과 대학원(학부에서 리듬체조, 대학원에서 체육심리학 전공)시절 88올림픽 매스게임 안무를 맡았고, MBC예술단에서 7년간 안무자로 일하면서 그는 줄곧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현재 국내에서 알아주는 춤꾼들은 대부분 박씨를 ‘선생님’으로 모신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서른을 넘긴 나이에 새로운 춤을 찾아 미국으로 떠났고, 이곳에서도 뮤직케이블TV에 출연하는 등 ‘춤 잘 추는 악바리 동양여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귀국하자마자 클론을 만났다. 클론의 뮤직 비디오에서 ‘다리 잘 찢어지는 여자’ 박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바라던 대학강단에도 서게 됐다(현재 서울예술대, 한양대에서 강의). 그는 학생들에게 “선생은 껌이다”고 말한다. 단물 빠질 때까지 묻고 배우라는 뜻이다. 그리고 공부고 뭐고 소질만 믿고 춤꾼이 되겠다고 덤비는 철부지들에게 “춤은 몸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 “진정한 예술가가 되려면 반드시 공부를 하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자서전을 쓰면서도 마지막 장에 춤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과 미국 유학 가이드까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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