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9

2000.04.13

“주가조작 96년부터 시나리오 있었다”

역외펀드 이용 계열사 부당지원…‘밑빠진 펀드에 돈 붓기’ 7000만달러 쏟아부어

  • 입력2006-05-04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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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가조작 96년부터 시나리오 있었다”
    이익치회장 구속으로까지 이어졌던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은 검찰 수사과정에서 드러났던 계열사들의 조직적 주식 매입뿐 아니라 이미 96년부터 역외펀드를 이용해 계열사 주가를 관리하는 방안이 광범위하게 검토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내용은 ‘주간동아’가 입수한 ‘역외펀드 설립을 통한 그룹사 주가관리 방안’(96년 7월, 현대증권 작성)이라는 대외비 보고서에 따른 것이다. 이 보고서는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 수사 당시 검찰에 의해 압수됐던 서류 중 일부다.

    현대증권은 이 당시 작성된 내부 보고서에서 최근 기업들이 주가 관리 방안으로 자주 사용하고 있는 자사주 매입이나 자사주 펀드 참여 방식보다 역외펀드를 만들어 계열사 주가를 관리하는 방식이 훨씬 실효성이 크다고 보고 구체적인 역외펀드 조성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다.

    최근 기업들이 주가관리 방식으로 선호하는 자사주 매입 방식과 달리, 역외펀드를 만들게 되면 기업들은 의결권이나 신주인수권 등 주주로서의 권한을 누릴 수 있고 해외 차입 비용이 적어 낮은 금융비용으로도 커다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또 자사주 취득 방식이나 자사주 펀드 조성 방식은 계열사 주식 매수가 불가능한 데 비해 역외펀드 방식은 외국인 투자한도 내에서는 계열사 주식 매수가 자유롭기 때문에 현대측은 계열사 주가를 의도적으로 띄우기 위해서 이러한 방식을 채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대측이 이 당시 역외펀드를 선호했던 이유는 이 펀드를 기반으로 무보증 차입을 할 수 있는 등 이른바 레버리지(leverage)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역외펀드를 조성하면 이 펀드 명의로 자본금의 3, 4배까지 무보증채권을 발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현대증권은 이 주가관리 보고서에서 ‘7∼10개사가 출자했을 때 레버리지 효과가 크다’며 구체적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으로 일반 투자자들이 손해를 입었다며 민사소송을 내기도 했던 참여연대측은 이 문제를 지난 3월24일 현대중공업 주주총회에서도 집중 거론했다. 참여연대측에 따르면 현대측은 지난 96년 9월 현대전자, 증권, 상선, 자동차, 종금 등 5개 계열사가 출자한 컨티넨탈 그로스 인베스트먼트(COGI)라는 역외펀드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 펀드의 부실 운용으로 1년여만에 청산 위기에 처하자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출자하지 않았던 현대중공업 등 현대 6개 계열사가 주식 연계형 채권을 사주는 방식으로 7000만달러를 이 부실 덩어리 역외펀드에 쏟아부었다. 현대중공업이 COGI 펀드를 살리기 위해 투입한 ‘생돈’만 해도 235억원에 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는 현대증권이 96년 5월 설립한 KOMA라는 역외펀드가 중개 역할을 수행했다. 현대 계열사들이 KOMA가 발행한 주식 연계형 채권을 사주는 대신, KOMA는 이 대금을 이용해 COGI의 주식을 주당 10달러씩 705만5000주를 사주는 방식으로, 사실상 청산 절차에 들어가 있는 COGI에 무려 7000만달러를 투자했다. 말하자면 현대 5개 계열사가 출자한 역외펀드가 부실화되자 현대증권을 매개로 해서 다시 계열사의 자금을 쏟아붓는, 순환식 내부 거래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KOMA펀드의 채권을 사들인 현대 계열사들은 이에 대해 “98년 6월, 235억원 상당의 채권을 매입한 것은 프랑스의 크레디리오네 증권의 투자 권유 때문이었으며 KOMA가 현대증권의 100% 출자로 만들어진 펀드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달 현대중공업 주주총회에서 참여연대를 대표해 이 문제를 추궁했던 김주영변호사는 “현대측이 크레디리오네 증권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 회사는 운용사에 불과하고 실제 채권의 발행 주체는 현대증권이 100% 출자한 KOMA”라면서 “주가조작 관련 대책회의까지 가졌던 현대측이 KOMA의 실체를 몰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난했다.

    현대측이 이 역외펀드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현대증권의 대외비 보고서를 정밀 분석해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현대증권 보고서는 역외펀드를 통한 계열사 주가관리 방안을 제시하면서 펀드 주주의 노출 가능성이나 내부자 거래 의혹이 제기될 경우에 대비해 상세한 대응방안까지 분석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역외펀드가 국내 증시에 투자하기 위해 투자 등록을 할 때 펀드의 주주가 공개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면서 주주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펀드 납입 당일 유통시장에서 실질투자자에게 매각하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문제’ 발생시 대응방안도 제시

    또한 펀드 운용과정에서 제기될 수 있는 위장 지분 취득이나 내부자 거래 의혹에 대해서도 ‘펀드의 종목당 투자한도가 총자산의 20%로 제한되어 있고, 실질적으로 외국인 투자자의 이름으로 등록이 되기 때문에 문제 발생의 소지가 없다’고 정리해놓고 있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현대 계열사들이 주가조작 사건에 동원된 역외펀드의 실제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판단할 수 있는 증거는 현재로서는 당사자들의 증언 이외에는 없다. 그러나 참여연대측이 현대측을 상대로 내놓은 민사소송이 아직 진행중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재판 과정에서도 또한번 논란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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