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9

2000.04.13

당국자 회담으로 대화 ‘물꼬’

베를린 선언 계기 ‘정상회담’ 길 닦기…“올 하반기-내년에 못하면 물 건너 간다”

  • 입력2006-05-04 12: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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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국자 회담으로 대화 ‘물꼬’
    2001년 8월15일 평양 김일성광장. 수많은 인파가 빈틈없이 들어선 가운데 주석단에 김정일 당총비서가 나타났다. 조명록 군총정치국장과 김영춘 군총참모장, 김일철 인민무력상 등 군부 핵심인물들과 김용순 등 당비서들이 도열해 있다. 이어 등장한 김대중대통령이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연단 앞으로 나와 김총비서와 나란히 섰다. 통일부장관 등 한국의 국무위원들과 대통령비서실장도 뒤편에 자리를 잡고 있다.

    자뭇 비장하면서도 긴장감이 감도는 모습이지만 은은하게 나오는 미소 속에서 전날 가졌던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우리측 파견 경호원 250명 중 주석단 주위에 배치된 10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혹시 모를 돌발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인파 속에서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다.

    김대통령이 마이크 앞에 섰다. “남북동포 여러분, 김총비서와 함께 남북이 힘을 합해 이산가족문제를 해결하고 서로 경제협력을 추진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하기로 했습니다. 남북정상은 92년 발효된 기본합의서를 구체화하기 위해 분야별 공동위원회도 가동키로 합의했습니다. 이제 남북은 세계로 향해, 하나로 향해 나가기 위해 굳게 협력할 것입니다.”

    김대통령과 김총비서가 서로 감격적으로 포옹하는 장면을 생중계된 TV화면을 통해 지켜보던 국민은 모두 가슴 속에 벅차오르는 감격을 느꼈다. 특히 평생 고향과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던 실향민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고 있었다.

    이상은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간의 현안을 해결키로 약속하는 모습을 가상으로 그려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내년 광복절이 지나기 전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우리 정부가 구상하던 모든 문제들이 순조롭게 해결될 수 있을까.



    김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3월초 당국간 대화를 통한 남북관계 개선에 초점을 맞춘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던 김대통령은 3월31일 동아일보 창간 80주년기념 특별회견에서는 “선거가 끝나면 국민과 야당에 설명하고 본격적인 남북 당국자회담과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선거후에는 중동특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북한특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김정일 총비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어쨌든 당과 정부, 군을 끌고 가고 있고 그래서 대화의 상대로 평가하고 있다”며 김총비서를 상대로 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굳은 의지를 나타냈다.

    김대중정부는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남북경협이 상당한 궤도에 올랐지만 이산가족문제 등 남북당국간에 해결할 문제들은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정부는 당국자회담이 남북고위급회담과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물론 남북정상회담이 남북관계에서의 목표가 될 수는 없지만 정상회담이 남북간의 현안을 가장 포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향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북정상회담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까. 정상회담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보통 정상적인 경우라면 두 나라 실무당국간의 협상이 마무리된 상태에서 최고지도자가 만나 상징적으로 성사된 합의를 확인한다. 또 하나는 실무급에서 협상이 난항을 겪을 경우 최고지도자들이 커다란 그림을 그린 뒤 돌파구를 만들어내 실무급의 협상으로 이어가는 방식이다. 김대통령은 양국 실무협상 단계를 거쳐 이뤄지는 첫 번째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베를린 선언이 당국간 경제협력이라는 실무급 접촉의 출발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 이는 과거 정권이 사용했던 방식인 정보당국의 책임자를 활용한 방법이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만약 국정원장이 특사로 나서 북한측과 정상회담문제를 논의하다가 북한이 정상회담에 대한 대답을 주지 않을 경우 하위 레벨의 어떠한 대화도 진전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위험부담이 큰 것”이라며 “게다가 요즘같이 정보가 개방된 상황에서 국정원장의 움직임은 사전에 노출될 가능성도 높다”고 말한다.

    문제는 정부가 구상하는 남북당국간 대화나 남북정상회담의 시간표에는 이것저것 따질 만큼 여유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김대통령의 집권 5년이라는 시간표로 볼 때 올해 하반기나 내년에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진전이 없다면 더 이상 정상회담이 성사될 가망성이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5년차에 실질적인 일을 추진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는 점에서도 올해 상반기 북한의 태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것이다.

    정부는 현재 남북당국간 대화와 정상회담을 위한 준비를 하나 둘씩 착실히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대통령은 동아일보 회견에서 “현재 비공식 접촉이 여러 경로를 통해 진행중”이라며 “대규모 북한특수로 중소기업들이 상상할 수 없을 규모로 투자의 길이 열릴 것”이라며 남북간의 접촉이 상당 수준 이뤄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정부는 올해의 경우 남북차관급 수준의 당국간 회담을 상반기에 시작해 신뢰를 구축한 뒤 빠른 시일 내에 장관급 등 고위급회담으로 발전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올해 하반기나 내년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는 기초를 닦는 것이다.

    정부가 염두에 두고 있는 회담형식은 지난해 차관급회담을 본뜬 것이 될 공산이 크다. 북한의 호응을 얻어내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이라는 평가가 많기 때문. 다만 지난해에는 회담개최합의 발표(6월3일)와 회담개최 날짜(22일) 사이의 시차가 커 연평해전(15일)이라는 변수가 끼여든 점을 고려해 남북회담 개최 합의시점과 회담개최일과의 시차를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정부는 현재의 북한 내부상황이 남북관계에 호응해 올 것이라는 정부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은 98년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를 열어 헌법을 개정하고 김총비서의 권력승계를 마무리했다. 김일성전주석의 3년상(94년 7월 사망)도 끝냈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김정일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가기 위해 이제 주민들에게 경제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할 시기가 됐다는 것이다. 최근 각종 대북접촉채널로 전해지는 북한의 구체적인 지원요청도 북한이 경제회복을 위해 어느 정도 실용주의적 노선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남북문제 해결에는 북한의 태도가 중요하다. 북한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고 나오는지에 따라 베를린 선언이 그야말로 역사적 전환점이 되느냐, 아니면 과거 수많은 선언의 하나로 사라지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북한은 북-일 수교 교섭을 통해 경제건설에 필요한 자금력을 어느 정도 확보할 것으로 보인다. 또 북-미 고위급회담 개최에 이어 북-미관계 개선이 일정 부분 궤도에 오를 경우 북한이 남북대화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 남한과 마주치지 않아도 지원을 얻어낼 수 있다면 굳이 당국간 회담에 매달릴 필요도 없어 보인다. 따라서 북한이 당국간 회담에 나오더라도 단순히 비료 등 대북지원을 희망하는 수준의 대화만을 고집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점에서 ‘베를린 선언’을 구체화해야 할 정부로서도 고민이 늘어가고 있다. DJ정부는 이를 어떻게 해결해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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