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39

2016.05.25

과학

멸종 위기 바나나를 구하라 ‘유전자 가위’ 특공대

박테리아에서 착안한 3세대 기술…“생명윤리 기준 세워야”

  • 이우상 동아사이언스 기자 idol@donga.com

    입력2016-05-23 11:5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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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불러봤을 법한 노래 가사다. 그런데 1960년대를 기준으로 볼 때 오늘날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그 전에 먹던 바나나와 같은 품종이 아니다. 60년대까지 세계를 석권한 바나나 품종 ‘그로 미셸’이 파나마병이라는 곰팡이로 순식간에 멸종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파나마병에 강한 ‘캐번디시’ 바나나를 먹고 있다. 문제는 오늘날 또 다른 파나마병이 유행해 캐번디시종이 생존에 위협받고 있다는 것. 과학자들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경우 빠르면 10~20년 내 인류가 바나나를 더는 먹지 못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바나나가 이토록 한 가지 질병에 취약한 까닭은 유전성질이 모두 비슷한 쌍둥이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유전자를 지녔다면 파나마병에 강한 유전자의 바나나가 살아남을 수 있지만, 캐번디시종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파나마병에 취약한 유전자를 제거하면 어떨까. 가위로 ‘싹둑’ 자르듯 말이다.

    김진수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이 바로 이 연구를 계획하고 있다.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바나나를 구하는 것 말이다. ‘다음 세대도 바나나를 먹을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김 단장은 지난해 ‘바나나 세이빙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파나마병을 일으키는 곰팡이는 특수한 경로(수용체)로 바나나를 감염시킨다.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이 경로를 만드는 유전자를 제거하는 게 김 단장의 목표다.





    ‘유전자 가위’로 난치병 고친다

    유전자 가위가 대체 무엇이기에 이런 작업이 가능할까. 먼저 밝혀둘 것은 유전자 가위가 날붙이로 된 가위는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생물 DNA에서 원하는 유전자만 잘라낼 수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DNA란 생명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든 설계도로, 길이가 2m에 이른다. 실패 구실을 하는 요요 모양의 히스톤 단백질에 감겨 세포 하나하나마다 들어 있다. 그리고 유전자는 리본처럼 긴 DNA 위에 군데군데 존재한다. 유전자 가위는 바로 이 DNA 위에서 원하는 유전자를 스스로 찾아낸 뒤 잘라내는 기능을 한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3세대 유전자 가위로 통한다. 박테리아(세균) 면역체계에서 파생된 것으로, 외부에서 침입한 바이러스의 DNA를 찾아 잘라내 파괴하는 박테리아 면역체계를 응용했다. 이전 세대 유전자 가위에 비해 정확도가 높고 실험 방법이 간단해 실험실 어느 곳에서나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지난해 글로벌 학술금융비즈니스 정보기관인 톰슨로이터는 3세대 유전자 가위 개념을 제안한 두 연구자, 엠마누엘레 샤펜티에르 스웨덴 우메오대 교수와 제니퍼 다우드나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캠퍼스 교수를 노벨 생리의학상 예상 수상자로 지목했다. 그만큼 유전자 가위에 대한 과학계 안팎의 기대가 크다.

    유전자 가위를 통해 특정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고칠 수 있게 되면 다양한 변화가 가능해진다. 한 예로 혈우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혈우병은 상처 부위 피를 굳게 만드는 혈액응고인자가 선천적으로 부족한 경우 발생하는 유전병이다. 혈액응고인자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따라 중증과 경증으로 나뉜다. 지난해 김 단장과 김동욱 연세대 교수, 김종훈 고려대 교수팀은 최신 줄기세포 기술과 유전자 가위 기술을 융합해 혈우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에 대한 논문은 줄기세포 분야 학술지 ‘셀 스템셀’에 실렸다.

    연구팀은 혈우병 환자 소변에서 채취한 세포를 줄기세포로 만들었다. 이후 해당 줄기세포에서 혈우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유전자 가위로 교정한 뒤 혈액응고인자를 생성하는 혈관내피세포로 분화시켰다. 그다음 혈우병을 앓는 쥐에게 이식하자 체내에서 혈액응고인자가 만들어져 꼬리가 잘린 과다출혈 상황에서 생존 시간이 늘어났다. 김동욱 교수는 “중증 혈우병 환자의 경우 혈액응고인자가 조금만 더 만들어져도 위험한 상황을 넘길 수 있다. 앞으로 환자 세포를 이용한 맞춤형 치료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난치병을 고치는 것 외에도 유전자 가위가 활용될 수 있는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최근에는 유전자 가위로 체내에서 만들어지는 근육량 제한을 풀어버린, 이른바 ‘슈퍼돼지’가 탄생했다. 근육이 일정량 이상으로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는 관련 유전자를 제거한 것이다. 미국 연구팀은 뿔 없는 젖소를 만들기도 했다.



    판도라 상자의 열쇠?

    유전자 가위는 지카바이러스를 옮기는 이집트 숲모기 개체 수를 줄이는 데도 쓰이고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유전자 가위로 유전자를 교정한 이집트 숲모기를 플로리다 주 키스 제도에 풀어놓는 실험을 3월 승인했다. 영국 생명공학기업 옥시텍이 개발한 이 모기가 야생 모기와 교배해 알을 낳으면 성체가 되지 못하고 유충 상태에서 사망한다. 모기 DNA에 스스로 죽게 만드는 유전자를 끼워넣은 것이다. 지난해에는 같은 방식으로 말라리아 저항 유전자를 가진 모기를 미국 연구팀이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유전자 가위가 풀어야 할 숙제도 많다. 과학자들은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결과부터 말하면 실패했다. 캐나다와 중국 공동연구팀은 유전자 교정을 통해 HIV가 면역세포(T세포)를 감염시키지 못하게 하려 했다. 바이러스가 출입할 수 있는 통로(수용체)를 만드는 유전자를 바꾸려 한 것이다. 교정 직후에는 효과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효과는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변화무쌍한 성질을 가진 HIV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또 다른 경로로 사람 면역세포를 감염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HIV는 매년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는 독감 바이러스보다 돌연변이 능력이 훨씬 더 뛰어나다.

    유전자 가위는 영화 ‘가타카’(1997)에 등장한 유전자 맞춤형 아기를 만드는 데도 응용될 수 있다. 부모가 유전병을 갖고 있다 해도 배아 단계에서 이를 교정할 경우 2세는 유전병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를 어느 선까지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기술적 숙성에 이르기에 앞서 유전자 가위를 현명하게 사용하기 위한 충분한 윤리적 논의가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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