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37

2016.05.11

사회

“목성을 주웠어요” 허언증 놀이에 빠진 누리꾼들

스스로 자랑하는 거짓말로 너스레 떨기…웃음과 재미 뒤에는 현실에 절망하는 심리 자리해

  • 김지현 객원기자 bombom@donga.com

    입력2016-05-10 11: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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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오바마랑 식사하고 왔습니다. 오바마가 어릴 적 저희 학교로 전학 와서 친하게 지냈습니다. 이 친구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처음 같이 하는 식사라 많이 긴장했는데 옛날하고 하나도 안 변했네요. 몰래 한 컷 찍었는데 다행히 경호원들에게 안 들켰네요.’

    1월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허언증 갤러리’에 올라온 게시물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도시락을 먹는 사진과 함께 등록된 이 글은 누가 봐도 농담 섞인 ‘거짓말’이다. 하지만 누리꾼들은 이 글을 재밌어 하며 ‘거짓말 댓글’을 이어갔다. ‘그때 같은 자리에 계셨던 아시아 분이구나~ 반갑습니다. 저도 한국인인데 기억하시나요?’ ‘이 친구가 오바마군요. 4년 전 저에게 원조 부탁했던 그 녀석이 오바마였다니….’ ‘제가 경호원인데 웬 동양인이 사진을 찍기에 뺏으려다가 참았습니다.’  

    누리꾼들이 ‘허언증 놀이’에 푹 빠졌다. 허언증(虛言症)이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믿는 병’을 뜻한다. 즉 처음에는 허구임을 알고 거짓말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짓말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허언증 갤러리’는 실제 허언증 환자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농담 섞인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재치 있게 받아치는 공간이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풀고픈 ‘자기과시욕’

    국내에 ‘허언증 놀이’가 확산되기 시작된 것은 1월 디시인사이드에 ‘허언증 갤러리’가 생기면서부터다. 이곳은 한 달 만에 게시물이 2만 건 이상 올라올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도 허언증 방이 생겼다.



    누리꾼들은 ‘레전드(전설)급’이라 부르는 인기 게시물을 따로 선별해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기도 한다. 또한 특징에 따라 유사한 게시물을 모으고 그것을 즐기기도 한다.

    허언증 글의 가장 큰 특징은 ‘능력 과시’다. 자신의 능력이 보통 사람 이상이라는 자랑 투의 글이 많다. 그중 ‘하버드 합격했습니다’라는 제목의 카카오톡 화면 캡처 사진이 대표적이다. ‘하버드 총장’과 ‘나’의 대화는 대략 이렇다. ‘합격 축하드립니다.’ ‘네? 정말 합격인가요?’ ‘네 실화입니다. 축하합니다.’ 사진 아래에는 ‘내일 출국합니다. 개학이 3월 2일이라더군요’라고 쓰여 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카카오톡을 통해 한국어로 합격 소식을 알릴 리 없지만, 누리꾼들은 이러한 거짓말도 애교 있게 받아들이며 ‘축하한다’는 댓글을 남겼다. 이 밖에도 ‘페라리 차를 뽑았다’고 자랑했지만 실제론 다른 차량의 사진을 올리거나, 1만 원짜리 지폐 세 장을 이어 붙여 숫자 ‘10000000000’을 만들고 ‘제 자산 일부입니다’라고 쓴 게시물도 누리꾼 사이에서 유행처럼 퍼졌다.  

    능력 과시의 일환으로 역사적 유물을 자기 소유물처럼 표현하는 글도 인기다. 이집트 스핑크스 사진을 올리고 ‘요즘 취미로 키우는 고양이’라고 묘사한 게시물이 그 사례다.

    ‘종은 스핑크스인데 매우 아담하고 귀여워요. 집으로는 이집트가 적당한 것 같아서 선물했는데 꽤나 실망한 모양입니다. 지구 하나를 줘도 좁을 텐데 제가 동물학대를 하는 것 같네요.’

    이 밖에 이집트 피라미드를 두고 ‘파도가 쓸어가기 전에 모래성을 만들어봤다’고 하거나, 진시황릉 병마용이 ‘내가 수집한 미니어처’라고 자랑하는 글도 인기 허언증 게시물이다. 망상에 가까운 자기 자랑이지만 누리꾼은 이러한 글을 퍼 나르며 즐긴다.

    최명기 청담하버드심리센터 연구소장은 ‘허언증 열풍’에 대해 “어린 시절의 자기도취, 자기과시가 인터넷상에서 표출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최 소장은 “유아기 때는 무슨 꿈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지만 성인이 되면서 현실이 녹록지 않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비싼 물건을 사거나 이를 남에게 과시함으로써 만족을 얻는다. 인터넷상에서는 언어나 행동이 더욱 자유롭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기도취나 과시 욕구를 표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대망상 허언, 알고 보면 신세 한탄

    말도 안 되는 ‘난센스’ 게시물도 허언증 갤러리 이용자 사이에서 인기다. ‘목성을 주웠다’는 제목의 게시물은 대리석 무늬의 공 사진을 올려놓고 다음과 같은 설명을 써놓았다. ‘편의점 갔다 오다가 목성이 떨어져 있기에 주웠어. 하늘을 보니까 목성 자리가 비어 있더라. 사촌형이 김정은이라 아는데 미국이 핵폭탄 실험하다가 떨어뜨린 것 같아. 일단 냉장고에 넣어봤는데 행성 주워본 경험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알려줘라.’

    또 축구선수 호날두가 자신의 서명과 함께 한국어로 ‘항상 행복하세요’라고 썼다는 인증 사진도 난센스 게시물이다. ‘포장마차에서 호날두를 만나서 술을 마셨는데, 호날두가 호남인이라서 그런지 더욱 정감이 간다’고 쓴 글에 누리꾼들은 ‘재밌다’고 댓글을 달며 게시물을 공유했다.

    허언증 글에는 젊은 세대의 현실 비관적 측면도 엿보인다. 노벨상 메달 이미지를 올리고 ‘노벨수학상을 받았는데, 9급 공무원 시험에 가산점 있나 궁금하다’는 글은 누리꾼의 마음을 은근히 울렸다. 이 글에는 ‘9급 공무원시험에 고작 노벨상으로 가산점 받으시려는 생각은 아니겠죠?’ ‘가산점도 안 주는데 수상 거절하고 와야겠습니다’는 댓글이 달렸다.

    이러한 허언증의 재미와 풍자 요소는 젊은 누리꾼의 관심을 끈다. 허언증 갤러리를 즐겨 보는 한모(35) 씨는 “시답잖은 농담이라도 재밌으니 자꾸 찾게 된다. 거짓말이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니 ‘즐기면 된다’는 생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유모(26·여) 씨는 “자기과시형 제목이라도 클릭해보면 신세를 한탄하는 글이 많다. ‘나만 사회에서 뒤처진 게 아니구나’란 생각에 위로를 받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측면이 있다”며 허언증 갤러리의 장점을 설명했다.

    최명기 소장은 “‘허언증 놀이’는 현실에 절망한 젊은 세대의 심리를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최 소장은 “옛날 영국에서는 주인이 집을 비울 때 하인들끼리 서로 귀족 호칭을 써가며 귀족놀이를 했다고 한다. 현재의 허언증 문화 역시 이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된다. 젊은이들이 현실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고, 그들의 삶이 점점 각박해지다 보니 허언증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허언증 놀이가 현실 풍자와 해학적 요소를 담고 있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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