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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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배의 food in the city

깊고 진한 국물에 알싸한 그 맛

부산 인근 구포국수

  • 푸드칼럼니스트 whitesudal@naver.com

    입력2016-03-14 13: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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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 중 국수를 싫어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매끈하고 날렵한 면발과 깊고 구수한 국물이 한데 어우러진 그 맛은 사시사철 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랑을 받아왔다. 멸치 국물에 소면을 말아 먹는 가락국수는 1970년대 최고 인기 외식 메뉴 가운데 하나였다. 전국 어디를 가도 소면을 만드는 소규모 국수공장들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국수를 사다 잔칫날에 끓여 먹거나 장날에 해 먹었다. 잔치국수나 장터국수는 그렇게 탄생했다.
    경상도 사람들은 멸치 육수에 국수를 말아 먹었다. 소화 흡수력이 좋은 국수는 양껏 먹을 수 있는 만복(滿腹) 음식이었다. 세월이 흘러 대기업이 지역의 작은 공장을 인수하면서 레시피가 획일화되고 다양성을 잃은 아쉬움은 있지만 국수의 인기는 여전하다. 다행스럽게도 대구와 부산처럼 예로부터 국수로 유명했던 고장에는 아직도 작은 공장들이 남아 있다.
    부산 구포는 조선시대부터 물산이 모여드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1920년 경부선 구포역이 개통되자 부산지역 곡물은 물론, 북한지역 곡물까지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30년대에는 한반도 최대 밀 산지인 북한 사리원에서 기차를 타고 건너온 밀들이 구포역을 가득 채웠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때부터 구포역 주변으로 제분공장과 제면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부산은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한 사람들과 6·25전쟁 후 밀려든 피난민으로 인구가 급증했다. 싸고 저렴한 데다 보관과 조리가 쉬운 구포 소면은 가난한 이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구포 주변 제면공장이 수십여 개로 불어났다. 아낙네들은 구포국수를 머리에 인 채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팔았다. 1960년대 본격화된 혼·분식장려운동과 70년대 공업화 여파로 인근 농촌에서 몰려든 젊은 노동자들 덕분에 구포국수는 일대 전성기를 맞는다.
    1980년대 이후 먹거리가 다양해지면서 구포국수는 침체기를 맞지만 구포 등 부산지역에서는 아직까지 국수 전문점들이 명맥을 잇고 있다. 구포시장 입구에 있는 ‘이원화 구포국시’는 구포국수를 만들던 공장 사람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좀 더 세련된 구포식 국수를 만들면서 한창 인기몰이 중이다. 구포와 멀지 않은 부산 금정구 남산동의 ‘구포촌국수’는 구포국수의 전통을 이어온 집으로 인기가 많다. 메뉴는 물국수 하나지만 양으로 보통과 곱빼기, 왕으로 나뉜다. 일반 소면보다 좀 두꺼운 면을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멸치 국물은 멸치 내장을 제거해 경쾌하고 깊은 맛을 낸다.
    구포에서 낙동강을 건너면 바로 김해 대동마을이 나온다. 행정구역으론 김해지만 생활권은 구포와 한 몸이다. 대동마을은 국수의 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조이자 터줏대감 격인 ‘대동할매국수’를 중심으로 작은 마을에 국수 전문점 대여섯 곳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는 국수를 육수에 넣어서 내지 않는다. 국수와 육수를 따로 준다. 구포 바람에 말린 졸깃한 국수 위에 부추(정구지), 검은 김, 채 썬 노란 단무지와 붉은 양념장이 올려져 있다. 국물을 부으면 이내 국수와 한 몸이 된다. ‘대동할매국수’는 멸치 내장을 제거하지 않은 통멸치를 사용해 강하고 구수하며 쌉싸래한 맛이 동시에 난다. 이 지역 사람들은 대개 국수에 알싸한 땡추(아주 맵고 작은 고추)를 넣어 먹는다. 깊고 진한 국물에 알싸한 맛이 더해지면 봄날 노곤해진 몸과 마음이 생기를 얻는다. 그 어떤 맛도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승려들은 국수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난다 해서 승소(僧笑)라고 불렀다. 봄날 승려들의 환한 미소를 닮은 것이 구포의 국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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