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23

2016.01.27

국제

美軍 24년 만에 필리핀 복귀

전략요충지 수비크 만 해군기지 사용…남중국해 美·中 갈등 증폭 불 보듯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as.com

    입력2016-01-26 09: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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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루손 섬의 남서부 바탄 반도에 있는 수비크 만.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남중국해를 면하고 있는 수비크 만은 자연경관이 뛰어나 ‘아시아의 진주만’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무엇보다 20m 넘는 수심이 항구로서는 천혜 조건이다. 필리핀을 식민 지배했던 미국은 1898년 이곳에 있던 스페인 해군의 선박수리소를 인수해 해군기지를 만들었고, 이후 이곳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역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가 됐다. 수도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수비크 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근 클라크 공군기지와 더불어 미국의 핵심 군사기지였다. 1970년대 베트남전 당시에는 병참을 지원하는 보급기지 구실을 담당했고, 냉전시대에도 전략 요충지 기능을 했다.
    미국은 1992년 11월 이곳을 필리핀 정부에 반환하고 병력을 완전 철수시켰다. 반미 여론이 강해지자 필리핀 상원이 자국에 있는 미군기지의 조차 기간 연장을 부결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동안 수비크 만 해군기지를 다시 사용하고자 상당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토록 강하던 미국의 희망이 24년 만에 실현됐다. 필리핀 정부가 미국 정부와 맺은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이행할 수 있게 됐기 때문. 이 협정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4년 4월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양국 정부가 체결한 것으로, 당시 일부 야당 의원과 시민운동가가 협정이 의회 동의 없이 체결됐다며 필리핀 대법원에 위헌 소송을 제기하는 바람에 실행이 보류됐다. 필리핀 대법원은 1월 12일 10 대 5로 이 협정이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모래톱에 좌초한 군함, 의도적?

    이로써 미군은 필리핀의 군사시설을 이용하거나 병력을 장기간 배치할 수 있게 됐다. 영유권 분쟁이 벌어지는 남중국해에서 중국에 대한 견제를 강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이 협정에는 미군이 10년간 필리핀 군사기지와 시설을 이용할 수 있고, 배치지역에 별도 시설물을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병력 규모에 대한 상한선이 없을 뿐 아니라 기간도 상호 합의에 따라 연장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미군은 그동안 합동군사훈련을 진행할 때도 필리핀에 최장 14일밖에 머물 수 없었다.
    미국은 앞으로 필리핀 군사기지와 각종 시설을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군사 교두보로 활용할 계획이다. 중국의 적극적인 해양 진출 움직임을 저지하는 등 전략적으로 상당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 전략에 따라 미국이 항공모함과 핵잠수함, 전략 폭격기 등 해군과 공군 전력을 서태평양지역에 배치할 때 수비크 만 해군기지는 가장 적합한 곳에 해당한다. 수비크 만 기지에는 과거 미군이 사용하던 활주로와 항공 관련 시설물도 그대로 남아 있다.  
    양국 정부는 필리핀 대법원의 합헌 판결 다음 날 미국 워싱턴에서 외교·국방장관(2+2) 회담을 갖고 방위협력확대협정의 조속한 실행을 위한 방안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2012년 5월 이후 4년 만에 열린 이 회담에서 필리핀 정부는 8곳의 군사기지를 미국 정부에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수비크 만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 포로 포인트 등 옛 미군기지 3곳과 필리핀 군 총사령부가 위치한 마닐라의 아기날도 기지, 필리핀 최북단의 바타네스 공군 비행장 등이다.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제도(중국명 난사군도, 필리핀명 칼라얀 군도)와 가까운 팔라완 섬의 군사기지도 제공 대상에 포함돼 있다. 스프래틀리 제도 주변 해역에서는 중국과 필리핀 간 영유권 분쟁이 자주 발생해왔고, 중국이 만든 인공 섬들도 있다. 특히 중국은 새해 벽두부터 인공 섬인 피어리크로스 암초(중국명 융수자오)에 자국 민간 항공기를 잇달아 이착륙시키는 시험비행을 실시하고 있다. 앞으로 중국은 이들 인공 섬에 전폭기나 전투기를 배치할 개연성이 높다.
    최근 스프래틀리 제도에서 필리핀과 중국 간 영유권 분쟁이 벌어져온 곳은 북위 92도 39~48분, 동경 115도 51~45분에 있는 세컨드 토머스 숄(중국명 런아이자오, 필리핀명 아융인 섬)이다. 길이 15km, 너비 5km인 이 섬은 일종의 모래톱이다. 섬 한 귀퉁이에는 필리핀 상륙함 시에라 마드레호가 1999년 좌초된 채 정박해 있다. 당시 필리핀 정부는 이 함정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해병대원 12명을 상주시켰으며, 이후 자연스럽게 이 섬을 실효 지배해왔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필리핀 정부가 못 쓰게 된 함정을 이 섬에 보내 고의적으로 좌초시켰다면서 이 함정을 철거해줄 것을 요구해왔다.



    “I shall return”의 데자뷔

    양국은 또 2012년부터 스카버러 섬(중국명 황옌다오, 필리핀명 파나탁 섬)의 영유권을 놓고도 티격태격해왔다. 스카버러 섬은 루손 섬으로부터 서쪽으로 230km, 중국 본토로부터 동쪽으로 1200km 떨어져 있다. 스카버러 섬은 석호와 석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산호초와 암초들로 구성돼 있다. 섬 둘레는 55km로 남쪽 끝에 있는 암초(높이 3m)가 가장 높다. 남동쪽에는 바다와 석호를 연결하는 너비 400m의 통로가 자리해 태풍이 불 때 어선과 소형 군함이 피신할 수 있다.
    중국은 원나라 때 만들어진 지도에 이 섬이 자국 영토에 속해 있다고 주장해왔다. 반면 필리핀은 이 섬이 자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 내에 있으며, 자국 어선들이 예전부터 이 섬 인근에서 조업해왔다고 강조한다. 중국 정부는 필리핀의 해군력이 약하다는 점을 노려 스카버러 섬 인근 해역에 함정과 어선을 배치해 필리핀 함정과 어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중국 정부는 현재 이 섬을 사실상 실효 지배하고 있다.
    최근 필리핀 정부는 수비크 만 해군기지도 대대적으로 개·보수하고 있다. 이곳에는 이미 미국이 무상으로 지원한 경비함 2척과 지난해 11월 우리나라로부터 도입한 FA-50 경전투기 2대가 실전배치됐다. 필리핀 정부는 2년 내 FA-50 경전투기 10대를 추가 배치할 계획이다. FA-50은 최대속도가 마하 1.5로 공대공·공대지 미사일과 일반 폭탄, 기관포, 합동정밀직격탄 등 최대 4.5t의 무장 탑재가 가능하다. 배수량이 3250t급인 경비함은 함대함 하푼 미사일과 76mm 기관포, 광학식 사격통제장비 등을 탑재하고 있다.
    미군이 수비크 만 해군기지와 팔라완 섬 군사기지에 주둔하면 필리핀으로선 든든한 지원군을 등에 업은 셈이 된다. 스카버러 섬은 과거 수비크 만 해군기지에 주둔하던 미군 전투기들의 사격훈련 장소였다. 이 섬 인근 해역도 미군이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을 때는 중국 선박들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2년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극동군사령관은 일본군에 밀려 필리핀에서 철수하면서 “다시 돌아오겠다(I shall return)”고 다짐했고, 2년 뒤 필리핀을 탈환하며 약속을 지켰다. 24년 만에 이뤄진 미군의 필리핀 재주둔은 당시의 데자뷔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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