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21

2016.01.13

박정배의 food in the city

맑고 진한 겨울 육수의 참맛

경기 북부의 냉면

  • 박정배 푸드칼럼니스트 whitesudal@naver.com

    입력2016-01-12 16: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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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은 해방 이후 남북에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됐다. 북한 공산정권의 핍박 속에서 더는 살 수 없던 많은 이가 고향을 등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분단이 반세기 이상 지속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또는 행여나 멀리서라도 고향이 보일까 가급적이면 고향과 가까운 남녘땅에 둥지를 틀었다. 함경도 사람은 강원 속초에, 평안도와 황해도 사람은 서울과 경기 의정부, 연천, 동두천 같은 곳에 모여 살면서 고향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실향민들은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냉면을 먹었다. 그래서 휴전선과 가까운 경기 북부에는 실향민들이 창업한 수십 년 역사의 냉면집이 즐비하다. 휴전선과 맞닿은 연천군에는 ‘군만면옥’과 ‘황해냉면’이 있다. 고춧가루 고명으로 유명한 의정부 ‘평양면옥’도 사실은 1970년대 초반 연천군 전곡리에서 창업해 87년 의정부로 옮긴 냉면집이다. 이 식당은 경기 북부는 물론 평양식 냉면업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곳으로, 냉면 위에 뿌린 고춧가루 고명과 얇고 꼬들꼬들한 면발, 날 선 칼처럼 깔끔한 국물로 잘 알려져 있다. 고춧가루는 육수의 느끼함을 잡아주고 감칠맛을 더하며 속을 따뜻하게 하는 등 다양한 기능을 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냉면 명가인 서울 ‘을지면옥’과 ‘필동면옥’도 바로 이곳 의정부 ‘평양면옥’ 주인의 형제자매가 만든 곳이다.
    경기 양주 송추삼거리 검문소 주변 식당가에 1980년 자리 잡은 ‘송추평양면옥’은 인근 군부대 군인들과 면회 온 가족들 때문에 유명해진 곳이다. 이 집 육수는 여느 냉면집과 조금 다르다. 의정부 ‘평양면옥’과 달리 복잡한 향과 맛이 난다. 쇠고기 육수에 꿩 육수와 동치밋국을 섞어 쓰기 때문이다. 뒷맛은 은근히 달다. 감칠맛도 상당하다. 얇은 면발도 적당히 탄력 있고 적당히 끊긴다.
    원래 평안도 사람들은 겨울이면 동치밋국을 주로 사용했다. 동치미에서 만들어진 천연 탄산의 맛은 사이다보다 쨍하고 상쾌하다. 그렇다고 평안도 사람들이 동치미의 국물만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고급 식당에서는 쇠고기 정육만으로 우린 기품 있는 국물을 먹었다. ‘우래옥’과 ‘능라도’의 육수는 이를 바탕으로 한다. 돼지고기 육수를 사용하는 집도 있었다. 서울 남대문의 ‘부원면옥’이 대표적이다. 꿩은 양식이든 자연산이든 겨울이 맛있다. 꿩 국물의 깊은 감칠맛 때문에 ‘꿩 대신 닭’이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다. 예전에는 꿩 국물을 사용하는 냉면집이 제법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송추평양면옥’은 그 꿩 국물을 우려 육수에 섞는다. 꿩 살코기를 경단처럼 다져 냉면에 넣어준다. 평양 부자들은 동치미를 담글 때 동치미에 쇠고기나 꿩고기를 넣었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동치밋국에 꿩 살코기의 단백질이 녹아들면서 감칠맛이 배가된다. 옛날 평양에서는 고깃국물을 맹물이라고 불렀다. 고기 육수는 기본적으로 탁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서울 장충동 ‘평양면옥’에서 맹물처럼 맑은 육수를 만드는 것을 봤다. 끓이고 거르고 식히고 거르고를 이틀 정도 반복하면서 불순물을 걸러내야 이슬같이 맑으면서 고기 맛은 진한 육수가 만들어진다.
    2012년 불고깃집으로 문을 연 경기 남양주 ‘광릉한옥집’이 최근 냉면 마니아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불고깃집으로 출발했지만 냉면과 육개장으로 정평이 나 있다. 묵직한 놋쇠그릇에 한우 우둔살로 뽑은 깊은 맛의 육수, 100% 메밀로 만든 면발 등 여러 곳에서 명가의 향기가 은근하게 풍긴다.
    냉면은 원래 겨울 음식이었다.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는 말도 무색하게, 요즘은 겨울철에도 냉면 명가들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분명한 사실은 육수는 겨울이 되면 최상의 상태가 된다는 점이다. 맑고 진하고 시원한 겨울 육수를 들이켜다 보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념무상의 경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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