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21

2016.01.13

20대 총선 특별기획 | 민의 왜곡 주범 ARS를 어찌할꼬

500명=안정권 1000명=공천 확정?

전화응답 대기자 확보로 변질한 당내 경선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6-01-11 14:38:07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아빠, 나 오늘 여론조사에 응답했다.”
    “응? 초등학생인 네가 어떻게 여론조사에 참여해? 거짓말하면 나빠요.”
    “아니야. 진짜야. 집에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선생님은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남자면 1번, 여자면 2번을 누르세요’라고 해서 1번을 눌렀어. 우리 선생님은 남자거든.”
    “뭐라고? 그럼 나이는?”
    “‘선생님 나이가 몇 살입니까’라고 묻기에 2번을 눌렀지.
    우리 선생님 나이가 올해 서른다섯 살이야.”
    “…?!”



    8세 여아가 30대 남성으로 둔갑

    몇 해 전 초교 1학년이던 김○○ 양의 경험담을 대화체로 각색한 것이다. 김양의 아버지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여론조사 회사의 간부다. 위 사례는 자동응답시스템(Automatic Response System·ARS) 방식의 여론조사가 오염된 샘플에 얼마나 쉽게 노출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덟 살에 불과한 김양이 “선생님 나이가 몇 살이냐”는 녹음 질문에 자신의 담임교사를 떠올려 30대로 응답한 것은 애교로 봐줄 만한다. 착오에 따른 응답일 뿐 일부러 한 거짓 응답은 아니기 때문. 그러나 선거에서 ARS 여론조사로 당락을 가를 경우 특정 후보 진영에서 조직적으로 60대가 20대로 응답하고, 70대가 30대로 둔갑해 거짓 응답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전화면접조사든 ARS 조사든, 조사 방식에 상관없이 60대 이상 고연령 응답자는 표본 수에 비해 많이 응답하고, 20대와 30대 응답자는 표본 수를 채우지 못하는 게 일반적인 현상. 그러다 보니 이 같은 여론조사 속성을 꿰뚫고 조직적으로 나이를 속여 조사에 응하는 오염된 샘플이 섞일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나마 전화 목소리로 응답자의 연령을 짐작할 수 있는 전화면접조사는 형편이 나은 편이다. 전화면접조사였다면 초교생 김양의 샘플은 비적격 표본으로 처리됐을 개연성이 높다. 그렇지만 적격, 비적격을 판별할 수 없는 ARS 조사에서는 8세 김양의 응답이 ‘30대 남성’의 응답으로 유효 처리됐을 공산이 크다.
    김양의 아버지는 “응답자가 속이려고 맘먹으면 얼마든지 거짓 응답이 가능한 ARS 조사가 갖는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론조사에서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은 표본조사 과정에 오염된 샘플이 끼어들 여지를 판별하고, 이를 제거할 수 있는 통제 장치가 있느냐 여부”라며 “ARS 방식은 거짓 답변은 물론, 초등학생의 엉뚱한 응답조차 통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지방선거 때 기초단체장 선거에 나섰다 당내 경선에서 낙선한 A씨. A씨는 휴면 유선전화번호 임대를 통한 여론조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A씨는 경선 직전 “KT 휴면전화번호를 대량으로 임대해 착신전환을 하면 당내 경선에 유리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2014년 6월) 지방선거가 끝난 뒤 수도권과 영남 몇몇 지역에서 휴면전화번호 임대와 착신전환으로 선거운동원들이 여럿 사법처리된 것을 보면, 유선전화 임대→착신전환 방식으로 여론조사를 악용한 사례가 적잖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A씨는 “수백, 수천 회선이라도 선거운동에 필요한 2~3개월 동안만 휴면전화를 임대하는 것은 큰돈이 들지 않는다”며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조사 결과를 얻기 위해 콜센터를 만들어 수백 개의 유선전화를 착신전환해 거짓 응답하면 민의와 크게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전화 오거든 저 좀 눌러주이소”

    2015년 8월 대법원은 2012년 19대 총선 당시 인천 모 지역에서 야권 후보단일화를 위해 실시한 여론조사 경선에서 ‘착신 조직’을 구성, ARS 투표 결과를 왜곡하는 데 가담한 통합진보당 선거운동원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이들은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후보 간 후보단일화 경선에서 자당 후보의 경선 승리를 위해 ARS 대상 전화번호를 대규모로 확보하고 이를 몇몇 당원의 휴대전화로 착신전환한 뒤, 자당 후보에게 중복 지지투표하도록 함으로써 지지 응답 수를 부풀린 혐의로 기소됐다. 법원은 1심과 2심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선고했고, 지난해 8월 대법원에서도 유죄를 확정했다.
    여론조사가 공천 등을 결정하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기 전까지 각 당의 공천은 오프라인 경선을 통해 결정했다. 당시에는 경선 당일 시간을 내서 투표장에 나와 한 표를 행사해줄 적극적인 지지자를 조직하고, 이들을 실어 나를 차량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 선거운동이었다. 이 때문에 차떼기 경선, 조직 동원 경선의 폐해가 적잖았다.
    오프라인 조직 동원 경선의 폐해를 극복하겠다며 당내 경선에 여론조사 방식을 도입했지만, 이제는 전화기 앞에 붙어 앉아 언제 걸려올지 모르는 여론조사에 응답해줄 ‘착신 대기조’를 확보하는 변형된 조직선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수도권에서 출마를 준비하는 한 정치신인은 “당내 경선에서 여론조사는 필수 항목이 됐다”며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를 받지 못하면 본선에 진출할 수 없기 때문에 지역구를 돌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여론조사 전화가 걸려오거든 제 이름을 꼭 눌러달라’고 당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남지역에서 한 중견 정치인을 돕는 한 인사도 “지역구를 돌며 ‘전화가 오거든 ○○○ 좀 눌러주이소’라고 읍소하는 게 선거운동의 전부”라며 “전화 응대자 확보가 가장 중요한 선거운동이 됐다”고 말했다.
    총선 선거운동원들 사이에서는 ‘여론조사 때 후보자를 찍어줄 지지자 500명을 모으면 당내 경선 통과 가능성이 50%를 넘고, 1000명을 모으면 본선 진출이 거의 확정적’이라는 얘기가 회자될 정도다.


    다른 지역 유선전화도 샘플에 포함될 가능성

    특이한 점은 출퇴근하는 사무직 종사자들은 현행 여론조사 경선 방식에서는 찬밥 신세를 면키 어렵다는 점. 여론조사가 실시되는 낮 시간에 대부분 지역구를 떠나 있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자영업자와 노인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지역구에서 가게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자영업자와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긴 노인들이 전화 여론조사에 답할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결국 선거운동은 자영업자와 노인들을 타깃으로 한 ‘전화응답 대기자’ 확보에 치중하게 된다고 한다.
    선거운동, 특히 당내 경선 준비가 전화 응대자 확보로 흐르면서 여러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종래의 유선전화를 활용한 여론조사가 몇 가지 맹점을 안고 있기 때문. 첫째, 상가 등에 설치된 유선전화 가입자가 해당 지역에 거주하지 않는 비거주 응답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서울 서대문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C씨의 실제 거주지는 마포구다. 그러나 C씨가 가게로 걸려온 여론조사에 응답하면 서대문구 유권자를 대표해 응답한 것이 된다. 또 다른 문제점은 서대문구에서 가게를 하던 C씨가 종로구로 음식점을 옮긴 경우. C씨가 단골들의 전화 예약을 놓치지 않으려 기존 전화번호를 종로구에 위치한 가게로 그대로 옮겨와 사용하면 C씨에게는 서대문구 관련 여론조사 전화가 걸려오게 된다. 즉 이 같은 전화번호 월경(越境)은 전국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유선전화번호를 활용한 여론조사는 지금까지 지역별로 부여된 고유 식별 국번으로 지역을 구분해왔다. 그런데 광역단체 내에서 이동할 경우 국번 변경 없이 과거 전화번호를 그대로 쓸 수 있게 되자 지역 대표성 문제가 희석됐다.
    국회의원 선거구가 여럿 있는 대도시의 경우 최소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 회선 이상의 유선전화가 선거구와 다른 지역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영남의 한 대도시에서 선거운동 중인 D씨는 “우리 지역구 유선전화로 알려졌지만, 실제 전화를 걸어보면 인접 지역구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적잖다”며 “자체적으로 파악해본 바로는 지역을 옮겨 사용되는 유선전화가 최소 1000개 회선 이상 된다”고 말했다. 해당 지역구가 아닌 인접지역에서 사용하는 유선전화에서 여론조사 샘플이 추출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여론조사로 민심이 왜곡되는 것을 막으려면 ‘안심번호제’ 채택이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ARS든 전화면접이든 조사 방식과 상관없이 현재 유선전화를 활용한 여론조사로는 정확한 민심을 담아내는 데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 정한울 고려대 평화와 민주주의 연구소 교수는 “인터넷 전화 보급률이 월등히 높아지고, 유선전화보다 무선 휴대전화를 더 빈번히 사용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가입자의 거주지와 연령을 정확히 알고 표본을 추출할 수 있는 안심번호제가 현재로서는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여야 정치권은 휴대전화 안심번호제 도입을 뼈대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2015년 12월 31일 통과시켰다.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당내 경선 등에 안심번호제를 도입해 여론조사의 공정성을 높일 수 있는 법적 토대는 마련됐다. 그러나 안심번호제는 의무 사항이 아닌 선택 사항. 당내 공천에 여야가 공정한 여론조사를 위해 안심번호제를 채택할까. 각 정당의 공정하고 객관적 공천에 대한 의지를 가늠할 척도가 안심번호제 채택 여부가 될 전망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