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9

2015.12.30

독일 난민캠프의 불안한 희망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36개국에서 유입…현지 통합이 관건

  • 이유종 동아일보 기자 pen@donga.com

    입력2015-12-29 13: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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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베를린 남부 옛 템펠호프 공항. 1923년 문을 연 이 공항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베를린을 방어하는 독일 공군의 본거지 노릇을 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공산주의에 맞서는 상징물이었다. 48년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했을 때는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연합군이 서베를린 시민들을 위해 수십만t의 식량과 연료를 수송한 ‘베를린 공수작전’의 중심지였다.
    2015년 12월 7일 오후 6시 기자가 찾은 옛 공항의 격납고는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36개국에서 유입된 난민 2200명이 몸을 의탁한 수용시설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11월 중순부터 머물기 시작한 난민들은 격납고 3곳에 대형 천막이나 칸막이를 치고 생활하고 있었다. 베를린 시는 갑자기 넘친 난민을 수용하고자 이곳 외에도 옛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본부 건물, 대형 전시장 ‘메세 베를린’, 유소년체육회관 등을 수용소로 쓰고 있다.

    인당 생활비 109유로

    템펠호프 공항 격납고 앞에서는 보안요원 4명이 삼엄하게 출입자를 통제하고 있었다. 난민 신분증을 제시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독일 정부는 민간 난민전문관리업체 ‘타마자’에 템펠호프 공항 난민수용소 운영을 위탁했다. 난민전문관리업체 직원 45명이 난민수용소 운영을 책임지고, 케이터링업체 직원 50명이 난민들의 식사를 맡는 방식이다.
    보안요원 76명은 크고 작은 비상상황에 대비해 항상 대기하고 있다. 의료진도 24시간 대기체제를 갖췄다. 격납고 3곳 중 한 곳에는 대형 천막 75동이 놓여 있고, 나머지 2곳에는 대형 칸막이가 세워졌다. 천막 안에는 2층 침대가 배치됐으며 모두 12명이 함께 지냈다. 천막은 독일 연방군에서 설치했다. 베를린 시는 수용소가 만들어진 지 한 달여가 지난 12월 7일 현재 난민 생활비로 인당 109유로(약 14만 원)를 지급했다.
    수용소 전체에서 퀴퀴한 냄새가 풍겼지만 분위기는 밝고 희망이 넘쳤다. 시리아 출신 대학생이라는 아마르 사이드(20) 씨는 “레바논, 터키, 그리스, 마케도니아 등 10개국을 거쳐 한 달 만에 가까스로 독일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미래가 불안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전혀 불안하지 않다”며 “지금 독일어를 배우고 있는데 이곳에서 반드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리라 확신한다”고 답했다.
    밖으로 나서자 이동화장실과 샤워실이 보였다. 다른 수용 공간 2곳에는 성인 남자 키를 훌쩍 뛰어넘는 커다란 칸막이가 설치돼 있었다. 천막 안처럼 역시 2층 침대를 배치하고 10명 안팎 난민이 함께 생활했다. 천막에는 가족 단위 난민들이 입주하고, 칸막이는 혼자 들어온 사람들이 차지했다.
    두 번째 방문지인 베를린 서부 메세 베를린을 찾은 것은 이튿날인 12월 8일 오전 10시. 이곳은 본래 각종 박람회와 전시회 등이 열리는 대형 전시장으로, 26동 중 3곳에 2000명 정도가 머무는 난민수용소가 마련돼 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자 기다란 탁자와 의자가 보였다. 식당으로 쓰이는 곳이었다. 배식시간은 아니었지만 마땅히 할 일이 없는 난민들이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라크에서 아내와 자녀 4명을 데리고 탈출했다는 나자르 알마미(39) 씨는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그는 “폭격으로 큰아이가 다리를 크게 다쳤다”며 “독일 땅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는다 해도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독일에 체류 중인 난민 100만 명 중 70% 이상이 선진국에서의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며 고국을 등진 젊은 남성들로 집계된다. 난민들은 1951년 7월 체결된 제네바 조약에 따라 난민 지위를 법적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한다. 지위를 인정받으면 독일에 체류할 수 있고, 합법적으로 취업해 돈도 벌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 아타울라 크넨잔(18) 씨는 친구들에게 빌린 8000달러(약 940만 원)를 난민 브로커에게 주고 부모와 형제를 남겨둔 채 독일로 들어온 경우다. 그는 “작은 보트를 타는 등 큰 위험을 감수했지만 독일에서의 새로운 삶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12월 10일 오후 5시 독일 북부 소도시 슈베린(인구 약 12만 명)의 한 유소년체육회관. 지역 사회봉사단체 ‘카리타스’가 이곳에서 독일 유입 난민을 환영하는 ‘웰컴카페(welcome cafe)’를 열었다. 카리타스 회원 등 시민 10여 명이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서 온 난민 20여 명을 맞아 간단한 다과와 커피, 차 등을 함께 먹고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시리아 출신 난민 알리 모하마디(17) 씨는 “따뜻한 환영은 생각지 못한 일”이라고 말했다. 슈베린에서만 이런 웰컴카페가 6곳이나 운영되고 있다.

    문제 핵심은 일자리

    슈베린이 주도인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는 독일 연방정부의 결정에 따라 2015년 난민 2만 명을 받아들였다. 슈베린은 그중 2000명 이상을 수용했다.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의회는 전체 71석 중 5석을 극우정당인 국가민주당(NPD)이 차지하고 있다. NPD가 독일 16개 주 가운데 의석을 확보한 곳은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가 유일할 정도로 이 지역은 외국인의 정착을 꺼리는 분위기가 상당하다.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슈베린 중앙역 앞에선 극우주의자 300〜400명이 모여 ‘난민 대혼란 중지! 여긴 우리 땅이다. 메르켈 총리’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난민정책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물론 일반 시민 모두가 외국인의 정착을 꺼리는 것은 아니다. 카리타스 회원 클라우스 욀러킹(57) 씨는 “저출산으로 이미 인구가 줄고 있는 독일에서 난민 수용은 장기적으로 노동력 부족을 채울 현실적인 대안”이라며 “이들이 독일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우리 몫”이라고 말했다.
    슈베린 시청은 부시장을 팀장으로 지역 경찰, 연방군, 노동청 등이 참여하는 난민대책 태스크포스(TF)를 꾸렸고 지역 적십자사, 시민·종교단체 등이 현장에서 난민들을 맞았다. 난민들은 군부대 유휴시설, 학교 등에 일단 수용됐다. 가족을 동반하지 않은 만 18세 이하 청소년을 24시간 집중 관리하는 특별시설도 운영한다. 자원봉사자로 시민 100여 명이 나섰다.
    슈베린 시는 2016년 난민 3000명 이상이 더 들어올 것으로 전망했다. 안드레아스 룰 슈베린 부시장은 “난민은 결국 독일 사회가 포용해야 할 과제다. 해결책은 이들이 독일 사회에 융합(integration)되는 것인데, 그러려면 적절한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난민 대부분은 독일어 구사 능력이 부족하다. 별다른 기술도 없다. 당장 직업을 구하는 게 어렵다는 의미다. 독일 정부는 난민들이 사회에 안착하도록 직업교육학교, 평생교육원 등에서 직업 교육과 독일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적극 추진하고 있다. 슈베린상공회의소는 직업교육의 실무를 맡아 교육생과 직업학교, 실습기업을 연결해주고 있다. 최근 직업교육 과정을 소개하는 홍보 책자를 아랍어로 만들기도 했다. 페터 토트 슈베린상공회의소 직업교육국장은 “서비스업 같은 진입장벽이 낮은 직종부터 일자리가 제공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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