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74

2019.01.25

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걸어서 하늘까지’도 가능하게 해줄 것 같았던 음악

일본 2인조 밴드 폴라리스의 세 번째 내한공연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9-01-28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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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라리스 홈페이지]

    [폴라리스 홈페이지]

    1월 13일 오랜만에 무척이나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을 봤다. 일본 2인조 밴드 폴라리스의 내한공연이었다. 이번이 세 번째 내한이지만, 그전과는 달랐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음향과 무대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잘 보이고 잘 들렸다. 몽환적이면서도 그루브를 잃지 않는 폴라리스의 음악에는 동심이 있다. 여전히 음악은 아름답다는 믿음이 있다. 때 묻지 않은 어른의 멜로디가 있다.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는 오야 유스케, 베이스를 담당하는 가시와바라 유즈루, 두 명으로 구성된 그들은 2002년 ‘Home’으로 데뷔한 이래 여섯 장의 앨범을 냈다. 그들을 데뷔 때부터 좋아했다. 그들의 첫 앨범을 듣자마자 어떤 밴드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가시와바라 유즈루가 폴라리스 이전에 속해 있던, 피시만즈다.

    내 가난한 젊은 날의 밴드

    오야 유스케 (왼쪽) 가시와바라 유즈루 [SYNC Music Japan 홈페이지]

    오야 유스케 (왼쪽) 가시와바라 유즈루 [SYNC Music Japan 홈페이지]

    인생의 음악이라는 질문을 받으면 무거워진다. 어떤 이름을 대야 할까. 하지만 질문의 폭을 좁힌다면, 가장 힘든 시절 곁에 있던 음악을 인생의 음악이라 칭한다면 답은 명확해진다. 피시만즈다. 대다수에겐 낯선 이름일 것이다. 나머지에겐 설레는 이름일 것이다. ‘피시맨스’가 올바른 외국어 표기지만, 피시만즈를 피시만즈라 하지 않는 것은 비틀즈를 비틀스로 표기하는 것과 같다. 그만큼 강력한 오라를 가진 이름이다. 

    1987년 메이지대 음악동아리 친구들로 결성돼 1991년 5월 ‘Chappie, Don’t Cry’로 데뷔한 그들은 레게를 기반으로 어떤 부분은 귀엽고, 어떤 부분은 몽환적이며, 어떤 부분은 그루브한 음악을 하는 팀이었다. 그러다 폴리도어에서 폴리그램으로 레이블을 이적한 후 발표한 후기 3부작 ‘空中キャンプ’(공중캠프·1996), ‘LONG SEASON’(1996), ‘宇宙 日本 世田谷’(우주 일본 세타가야·1997)를 내놓으며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밴드가 되고 만다. 

    이 시절의 피시만즈를 일본 어느 평론가는 ‘에코의 울림이 1mm만 달라져도 무너져 내리는 기적의 밸런스로 구축된 완벽한 사운드 월드’라고 설명했다. 전과 마찬가지로 레게와 솔, 펑크의 자장 안에 있으되 그 색채는 옅어졌다. 그리고 도저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그들만의 사이키델릭으로 나머지 색을 칠했다. 그들이 한국에 알려진 건 세기말과 세기 초의 흐릿한 경계 무렵이었다. 리더이자 보컬, 기타리스트였던 사토 신지가 1999년 감기로 세상을 떠난 후였다. 



    기억할지 모르겠다. 인터넷 포털사이트가 한국 인터넷 생태계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기 전에 존재하던 수많은 게시판들을. 피시만즈는 그중에서도 소수만 알음알음 모여 노는 작은 음악 게시판의 컬트였다. 그 게시판의 친구들은 퍼시만즈의 음반을 구하려고 혈안이 됐다. 일본 음악이 정식으로 허용되기도 전이었고, 일본에서조차 유명 밴드가 아니었으니 쉽지 않았다. 누군가 일본에서 CD를 구해 오면 4배속 최신 CD레코더로 구워져 친구에게 전해지고, 또 그의 친구에게로 전해지는 식으로 음악이 전파됐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막차를 놓치면 택시비가 없어 집까지 한참을 걸어야 하던 시절이었다. 돈이 없어 변변한 데이트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피시만즈는 그 시절의 배경음악이었다.

    발이 먼저 기억하는 연주

    스튜디오 버전으로 35분, 라이브 버전으로 42분에 이르는 ‘Long Season’ 한 곡을 플레이한 후 사무실을 출발하면 끝날 때쯤 집에 도착했다. 되풀이되고 되풀이되는 신시사이저 루핑을 들으며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가끔 하늘을 쳐다봤다. 찬 밤공기 틈으로 하얀 입김이 번져나갔다. 철길에 깔린 자갈에는 드문드문 잡초가 났다. 야간신호를 반짝이는 비행기가 저 위를 가로질렀다. 피시만즈의 음악이 깔리는 하늘은 핑 도는 것 같았다. 기분은 뿌옇게 되는 것 같았다. 몸은 다른 세계로 빨려드는 것 같았다. 가난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걷지 않으면 생활에 타격을 받는다는, 견딜 만한 목적이 있는 길이었다. 

    월세도 못 낼 형편이 됐다. 밀렸다. 결국 쫓겨났다. 석관동에 사는 친구의 집으로 점령하다시피 들어갔다. 그래도 주 생활권은 홍대 앞이었다. 막차가 끊기도록 논 뒤 모두 택시를 타고 가버리면 나는 횅한 홍대 앞 거리에서 한숨을 쉬곤 했다. 석관동까지 걷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밤은 아직 추웠다. 홍대 앞에서 신촌, 이화여대, 아현동, 종로를 지나 회기동을 거치면 청량리역이 나왔다. 그때쯤이면 다시 한숨이 나왔다. 조금만 더 가면, 그러니까 40분가량만 더 가면 집에 갈 수 있다는, 그래서 잘 수 있다는 한숨이었다. 2시간 반을 걸어왔는데 40분쯤이야, 매번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도 피시만즈를 들었다. 다른 CD도 가방에 몇 장씩 넣어 다녔건만 유독 피시만즈를 들은 건 홍대 앞에서 석관동까지 걸어야 하는 순간의 기분을 피시만즈 말고는 음악으로 재현하지 못해서다. 다른 음악을 듣다가도 멈춰 서서 피시만즈의 CD로 갈아 끼우곤 했다. 그때의 피시만즈는 잠수함의 산소탱크였다. 피시만즈가 없었다면 몇 번이나 길바닥에 주저앉아 결국 울었을지도 모른다. 

    ‘우주 일본 세타가야’에 담긴 ‘Walking In The Rhythm’을 수십 번 들으면 가까스로 석관동 옥탑방에 도착했다. 온 주위가 뿌옇게 변했다. 땀이 찰 대로 찬 옷에서 김이 나왔고, 안경에도 김이 서렸다. 기분도 뿌옇게 됐다. 가난은 참 힘든 거라고, 그때마다 생각했다. 걷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다는, 견디기 힘든 목적의 걸음이었다. 걸음은 그냥 걷는 것 이상의 무엇이 됐다. 알뜰한 생활수단으로, 절박한 생존수단으로 변했다. ‘Long Season’의 그 긴 신시사이저 리프를, ‘Walking In The Rhythm’의 발이 기억하고 있다. 귀보다 짙게 기억하고 있다. 

    폴라리스는 두 곡의 피시만즈 노래를 커버해 불렀다. ‘Long Season’의 축약 버전인 ‘Seasons’와 ‘Walking in The Rhythm’을. 나도 모르게 무대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가시와바라 유즈루 바로 앞에 서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온몸으로 그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리듬을 받아 안았다. 20대 후반의 밤을 떠올렸다. 한 번의 겨울과 한 번의 여름, 걷고 또 걸으며 바라보던 하늘을 생각했다. 오직 피시만즈만이 곁에 있던 날들을 길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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