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74

2019.01.25

“수술실서 일회용 기구를 여러 번 재사용”

동아일보-대한전공의협의회 공동기획 - ‘2018 전국 수련환경 병원평가’

  •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19-01-25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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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자 최선 진료 못 했다”는 전공의 10명 중 8명 “위해(危害) 가능성” 정부 및 병원 지침 탓…영상·혈액검사 등 필요한 조치 못 해

    #1 내과 전공의 2년 차 A씨는 자신이 담당한 방광염 환자에게 적절한 처방을 못 했다. 의대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라면 퀴놀론 계열의 항생제를 1차적으로 처방해야 한다. 하지만 이 계열의 일부 항생제를 사용할 수 없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서 정한 보험급여 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 약제처방에 대한 급여를 신청해도 심평원에서 삭감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A씨는 병원 방침에 따라 보험급여 대상에 포함돼 있는 2차 항생제부터 처방했다. 

    #2
    고무 또는 금속으로 가늘고 길게 만든 삽입관 ‘카테터(catheter)’는 비뇨기과 수술에 흔히 쓰이는 시술기구다. 보건당국은 마찰에 의한 천공이나 균 감염의 우려 때문에 일회용 카테터를 권장하고 재사용을 금한다. 하지만 비뇨기과 전공의 3년 차 B씨가 그동안 수술실에서 겪은 현실은 전혀 다르다. 카테터를 한 차례도 아니고 수차례 재활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 B씨는 “수술 과정에 꼭 필요해 사용했는데도 심평원 보험급여 심사과정에서 삭감되는 경우가 많아 재사용하는 것 같다”며 “환자의 안전을 생각하면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할 병폐”라고 말했다. 

    ‘환자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의료 현장 최전선에서 뛰고 있는 전공의들의 목소리다. 전국 각급 병원에서 수련 중인 전공의는 모두 1만2000여 명. 동아일보와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가 이들을 대상으로 ‘2018 전국 수련환경 병원평가’(병원평가)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가 ‘환자에게 최선의 진료를 하지 못했다’(그래프1 참조)고 답했고, 이로 인해 ‘환자에게 위해가 발생할 것’(그래프2 참조)이라고 우려했다.

    전공의 5명 “성폭행당했다” 응답

    병원평가는 지난해 9월 2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온라인 설문조사 방식으로 진행했다. 병원평가에 참여한 전공의는 5000여 명. 42%를 웃도는 높은 응답률이다. 이들 가운데 응답자 수가 극히 적은 일부 병원과 문항별 양극단 값, 중복 값 등을 제외한 82개 수련병원 전공의 4986명의 응답 내용을 분석했다. 

    그렇다면 전공의들이 환자를 제대로 진료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응답자 중 가장 많은 1116명(64.10%)이 ‘정부 지침’을 꼽았고, 그 뒤를 이어 ‘병원 방침 혹은 상급자 지시’ 263명(15.11%), ‘관행적 이유’ 185명(10.63%) 순으로 나타났다(그래프3 참조). 여기서 ‘정부 지침’이란 심평원의 보험급여 기준 등 정부의 정책 전반을 의미하고, ‘병원 방침’은 야간에 검사가 필요한데 검사실이 야간 운영을 하지 않거나 항암제를 투약할 의사가 없는 경우 등 병원 시설 및 인력운용 방침 등을 뜻한다. 



    의학적으로 필요한 ‘영상검사’를 못 했다고 응답한 전공의가 520명(29.87%)으로 가장 많았고, ‘일반 치료 약물’ 처방을 못 했다는 전공의가 287명(16.48%), ‘수술용 의료기기 및 장비(시술용 의료기기 포함)’ 사용을 못 했다는 전공의가 279명(16.02%), 심지어 ‘혈액검사’를 못 했다는 전공의도 128명(7.35%)이나 됐다. 더욱이 병원에서 가장 기본적인 드레싱키트와 알코올솜 등 소독 물품이나 장갑, 가운, 초음파 젤 등 무균물품이 부족했다는 전공의가 각각 118명(6.78%)과 73명(4.19%)이나 됐다. 그만큼 진료환경이 열악하다는 의미다. 

    수련병원 내에서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폭언과 폭행, 심지어 성폭력도 여전히 자행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병원 내부 구성원으로부터 폭력을 당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전공의 403명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해당 항목 응답자 4006명의 10%에 해당한다. 10명 중 1명꼴로 폭력을 당했다는 것이다(그래프4 참조). 

    폭력 형태별로 보면 폭언을 당했다는 전공의가 362명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서 폭행 194명, 성희롱 43명, 성추행 21명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성폭행을 당했다는 전공의도 5명이나 됐다. 성폭행 피해 이후 처리 결과는 설문 내용에 포함되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다. 

    병원 내 폭력 가해자로는 ‘상급 전공의’와 ‘교수’가 각각 210명, 192명으로 비슷하게 지목됐으며 펠로(전문의) 46명, 동료 전공의 22명, 간호사 21명 순으로 조사됐다. 

    전공의가 진료 중 환자 및 보호자가 휘두른 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일도 많았다. 해당 항목 응답자 3999명 중 1998명이 ‘환자 및 보호자로부터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응답 비율로는 50%에 가까워 2명 중 1명꼴로 피해를 입은 셈이다. 피해 전공의 1914명(95.94%·복수응답)이 폭언을 당했다고 응답했고, 폭행을 당했다는 전공의도 517명이나 됐다. 또 224명이 성희롱, 68명이 성추행, 1명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응답했다. 이 같은 환자 및 보호자의 폭력은 결국 전공의의 정확한 진단을 방해하는 주요 원인이 되는 만큼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전공의들의 폭력 피해를 구제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 아직 미흡하다는 평가다. ‘병원 내 폭력 사건 처리 절차가 확립돼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78.8%가 ‘그렇다’고 했지만, ‘처리 절차를 신뢰하느냐’ ‘피해자 보호가 잘 이뤄지고 있느냐’는 두 질문에서 모두 65% 넘는 응답자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전공의법, 현장에서 잘 지켜지지 않아”

    전공의들의 과도한 업무시간과 업무량도 환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다. ‘현재 또는 과거 근무 중 환자에게 적절한 의학적 처치가 불가했던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43%에 해당하는 1725명이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응급상황 동시 발생’(1084명·복수응답), ‘인력 부족’(947명), ‘과중한 업무량’(923명), ‘과도한 환자 수’(839명), ‘병원 내 인프라 한계’(655명), ‘타 과와 협력 문제’(625명) 등 대부분 인력 부족에 따른 과도한 업무량과 직결되는 항목을 지목했다. 

    실제 이번 설문조사에 참여한 전공의들의 1주일 최대 근무시간은 평균 89.27시간인 것으로 나타났다. 주 6일을 기준으로 하루 15시간 이상 근무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행히 1주일 평균 근무시간은 79.32시간으로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전공의법)에서 규정한 주당 80시간보다 적다. 지난해 초 발표된 ‘2017 전국 수련환경 병원평가’ 결과 1주일 평균 근무시간이 85.5시간이던 것과 비교하면 크게 줄어들었다. 서연주 대전협 홍보이사는 “전공의법 시행과 함께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매년 진행하는 전국 수련환경 병원평가 덕분에 수련환경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공의법에서 규정한 ‘최대 연속 수련시간인 36시간을 초과해 근무한 적이 있다’는 전공의가 응답자의 34.44%(1504명)나 되고, 전공의 인당 ‘당직 근무 시 최대 담당 환자 수’가 72.6명에 달하는 등 여전히 개선돼야 할 부분이 많아 보인다. 

    이승우 대전협 회장은 “전공의법이 시행된 지 2년이 됐음에도 현장에서는 여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전공의들이 수련 기간에 전문의로서 충분한 역량을 쌓을 수 있도록 체계적인 수련 프로그램을 만들고 수련과 관련 없는 업무를 줄이는 등 수련환경의 질적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전국 수련환경 병원평가 순위는?
    규모별 1위는 삼성서울, 건국대, 서울의료원, 광명성애 등 4개 병원

    ‘2018 전국 수련환경 병원평가’는 △근로 여건 △복리후생 △수련 교육 △전공의 안전 △환자 수 및 업무 부담 △무면허 의료행위 등 교육환경 6개 분야에서 모두 102개 문항에 걸쳐 주·객관식으로 전공의들로부터 답변을 받아 진행했다. 또 전공의 수에 따라 500명 이상은 대형병원(6개), 200~499명은 중대형병원(15개), 100~199명은 중소형병원(29개), 100명 미만은 소형병원(32개) 등 규모별로 분류해 평가했다. 

    그 결과 삼성서울병원(대형)과 건국대병원(중대형), 서울의료원(중소형), 광명성애병원(소형) 등 4개 병원이 각각 규모별 수련환경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규모별 순위를 보면 대형병원에서는 삼성서울병원에 이어 2위 서울아산병원, 3위 가톨릭중앙의료원, 4위 서울대병원, 5위 고대의료원, 6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순으로 평가됐다. 

    중대형병원에서는 인하대병원과 계명대 동산의료원, 경북대병원, 경희대병원 등이 각각 2~5위로 좋은 평가를 받은 반면, 충남대병원과 순천향대병원, 차의과학대 분당차병원, 이대목동병원 등은 12~15위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 

    중소형병원에서는 한림대 강동성심병원과 인제대 상계백병원, 분당서울대병원, 중앙대병원 등이 2~5위를 차지했고, 고신대복음병원과 연세대 강남세브란스병원, 연세대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중앙보훈병원 등은 최하위권인 26~29위에 머물렀다. 

    마지막으로 소형병원에서는 원광대 산본병원과 국립재활병원, 부산광역시의료원, 계요병원 등이 2~5위, 인제대 서울백병원, 근로복지공단 대전병원, 한림대 동탄성심병원, 한국원자력의학원 등은 최하위권인 29~32위에 이름을 올렸다. 병원 규모별 상세 순위는 대한전공의협의회 인터넷 홈페이지와 닥터브릿지.com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18 전국 수련환경 병원평가’ 순위

    ◆ 대형병원(500명 이상)
    1위 삼성서울병원
    2위 서울아산병원
    3위 가톨릭중앙의료원
    4위 서울대병원
    5위 고대의료원
    6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 중소형병원(100~199명)
    1위 서울의료원
    2위 한림대 강동성심병원
    3위 인제대 상계백병원

    ◆ 중대형병원(200~499명)
    1위 건국대병원
    2위 인하대병원
    3위 계명대 동산의료원

    ◆ 소형병원(100명 미만)
    1위 광명성애병원
    2위 원광대 산본병원
    3위 국립재활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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