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보아와 베이비복스, 그리고 동방신기

연습생 신화가 만들어낸 케이팝 성공 신화의 복기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9-01-07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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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아 [뉴시스]

    보아 [뉴시스]

    1990년대 중반 오아시스, 라디오헤드 같은 영국 밴드가 세계 음악시장을 주도하던 시절 영국 언론들은 이렇게 보도했다. ‘영국이 다시 음악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표현으로 지난 10년간 한국 대중음악산업을 이야기하자면 나도 ‘한국 대중음악이 내수상품에서 수출상품이 됐다’고 쓰고 싶다. 원더걸스, 빅뱅의 등장으로 아이돌 르네상스가 시작된 지 10년. 케이팝(K-pop)은 어떤 경로로 세계로 퍼졌을까.

    일본에서 보아, 중국에서 베이비복스

    베이비복스 [동아DB]

    베이비복스 [동아DB]

    1990년대 중·후반, 대중음악이 아이돌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한국 아이돌 기획사들은 더 큰 시장을 노리게 된다. 내수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MP3의 등장으로 음반이라는 음악산업의 큰 먹거리가 급격히 사라지고 있었다. 

    기술 발전에 따른 시대 변화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법. 그들은 아이돌이라는 제품을 팔 수 있는 다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일본과 중국이었다. 일본 진출에 가장 먼저 눈을 뜬 건 SM엔터테인먼트였다. 1990년대 일본 아이돌시장은 남자그룹 스맙(SMAP)으로 대변되는 대형기획사 자니스(Johnny’s)의 천하였다. 반면 걸그룹은 파고들 여지가 있었다. 모닝구 무스메의 등장과 함께 아이돌시장은 일반 대중에서 ‘오타쿠’ 대상으로 변화되는 상황이었다. 절대강자가 없었다. 

    SM은 이 기회를 틈타 S.E.S.를 진출시켰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실패했다. 후발주자인 핑클에게 한국 걸그룹 1인자 자리만 내주는 꼴이 됐다. 당시 일본은 한국 기획사가 만든 한국 아이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돼 있지 않았다. 

    SM은 고민 끝에 국적을 지우기로 했다. 현지 회사 에이벡스와 합작했다. 일본 작곡가의 곡을 받아 일본 기획사에서 앨범을 냈다. 보아였다. 보아가 한국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건 이미 큰 성공을 거둔 후였다. ‘메이드 인 코리아’이되 브랜드는 일본인, 말하자면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SM은 예기치 않은 성과를 거뒀다. 보아가 아이돌이 아닌 아티스트로 분류된 것이다. 일본 아이돌은 이미 ‘실력’보다 ‘엔터테인먼트’로 소비되는 시점이었다. 아무로 나미에를 끝으로 아이돌에게 요구되는 건 노래와 춤 실력이 아니었다. 실력은 아티스트의 조건이었다. 춤이건 노래건 어설퍼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미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아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라이브 실력으로 관객을 끌며 아티스트 반열에 올랐다.

    반면 중국 진출은 반쯤 해프닝으로 이뤄졌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진출한 한국 ‘프로덕션’은 한국의 완성된 콘텐츠, 즉 음반과 드라마 CD 판매에 주력했다. 이를 기반으로 중국에 한국 대중문화 팬덤이 형성됐다. H.O.T., 베이비복스 등이 그런 ‘암시장적 요소’를 바탕으로 공연까지 성공할 수 있었다. 

    일본 진출에 총력을 기울인 SM은 여기서 그친 반면, 베이비복스 소속사였던 DR뮤직은 새로운 기회를 봤다. 1999년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해 현지에서 음반을 발매한 뒤 1년 만인 2000년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여성그룹으로는 처음으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해 표가 매진됐다. 이어 현지 법인을 설립, 베이비복스의 중화권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1980년대 한국이 일본 문화를 동경했던 것처럼 세기말과 세기 초 중국은 한국 대중문화를 같은 시각으로 바라봤다. ‘한류’의 시작이었다.

    동방신기의 성공이 가져온 효과

    동방신기 [동아DB]

    동방신기 [동아DB]

    이렇게 열린 케이팝의 동아시아 수출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베이비복스의 성공에 자극받아서일까. SM은 중국시장을 겨냥해 새로운 남자 아이돌그룹을 만들어낸다. 동방신기였다. 팀명은 물론, 멤버들 이름부터 중화문화권을 겨냥했다. 

    하지만 그때 마침 보아가 일본에서 터졌고 전략이 수정됐다. 동방신기는 일본으로 갔다. 보아가 일본 회사의 전폭적 지원으로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었다면, 동방신기는 말 그대로 바닥부터 시작했다. 한국에서 차트 1위를 찍은 후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가 소규모 라이브 하우스에서 공연하는 날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오리콘차트 주간 

    1위를 찍고, 도쿄돔 공연 티켓이 매진되는 톱 아티스트 반열에 올랐다. 보아로 획득한 아티스트 이미지를 극대화하고자 기획 단계부터 연습생 중 메인 보컬만 모아 팀을 만든 전략이 주효했다. 

    동방신기를 기점으로 한국 아이돌그룹은 일본에서 입지를 단단하게 굳혔다. 드라마로 파생된 중년층 여성 팬이 아닌, 젊은 세대가 한국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SS501, 카라, 소녀시대로 이어진 ‘한류 열풍’은 일본 대중문화시장 주류의 문이 열렸기에 가능했다. 

    일본에서 한국 음악이 큰 지분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건 명확했다. 한국 기획사의 아이돌 제조 능력이 선진국에 수출할 만큼의 수준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즈음 중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시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모바일 시대가 개막하면서 음악시장이 빠르게 스트리밍으로 전환됐고 중국시장도 강력한 구매력을 갖게 됐다. 

    중국인 멤버를 영입해 중화권 현지화를 노리는 전략은 이때부터 본격화됐다. 아예 ‘유닛’ 단위로 한국과 중국을 분리한 EXO를 비롯해 미쓰에이, 에프엑스 등 중국인 멤버가 포함된 그룹이 현지에서도 안착하기 쉬웠다. 보아가 ‘제조국’을 지운 OEM 방식이었다면, 그 후 아이돌은 한국이 기획과 제작을 맡고 현지인 멤버가 ‘부품’으로 투입되는 형태의 제작 방식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한국 아이돌그룹이 케이팝으로 불리며 아시아를 넘어 중남미와 유럽에서도 의미 있는 지지 기반을 획득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와패니즈’로 불리는 해당 지역의 일본 대중문화 마니아층이 오리콘차트 및 일본 방송에서 본 한국 아이돌그룹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된 이 현상은 자연스럽게 케이팝을 세계 서브컬처시장의 주요 카테고리로 자리 잡게 했다. 

    2011년 SM타운의 프랑스 파리 콘서트는 케이팝이란 단어가 한국 언론에서 공식적인 표현으로 쓰이는 계기이자, 기성세대와 언론이 더는 아이돌을 ‘10대 위주의 서브컬처’가 아닌 ‘문화수출상품’으로 받아들이는 전환점이었다. 

    한국 음악시장은 아이돌 시스템이 진화, 발전하는 데 최적의 환경을 가졌다.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가 주도한 아이돌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아이돌은 10대 문화를 넘어 방송·광고시장에 ‘젊음’을 공급하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로 변화했다. ‘틴 팝’이나 ‘오타쿠 상품’으로 취급되는 타국과 달리 주류 엔터테인먼트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건 한국의 연습생 시스템 때문이다. 중학생, 빠르면 초등학생 때부터 기획사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트레이닝을 거치는 과정에서 그들의 일상적 관계는 배제된다. 아역 배우조차 정해진 교육과정을 소화해야 하는 서구와 달리, 한국에는 그런 의무가 없다. 엘리트 스포츠 교육의 시스템이 고스란히 엔터테인먼트로 전이된 셈이다. 

    기획사는 자신들의 컨베이어벨트에 백지 상태의 재료를 올려 다른 나라에서는 만들 수 없는 제품을 생산해낸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아이돌은 데뷔 전부터 형성된 팬덤을 교두보 삼아 세계를 누비며 활동한다. 청소년의 꿈을 고스란히 녹여 한국 아이돌 댄스는 케이팝 로드를 타고 세계로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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