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 인사이트

안된다고 했지만, 결국 해냈다

2018년 대한민국 축구, 반전에 반전의 순간

  • 홍의택 축구칼럼니스트

    releasehong@naver.com

    입력2018-12-31 11: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독일전에서 손흥민이 골을 기록하고 기뻐하는 모습. [동아DB]

    독일전에서 손흥민이 골을 기록하고 기뻐하는 모습. [동아DB]

    대한축구협회가 2018년 12월 18일 ‘2018 대한축구협회(KFA) 시상식’을 열고 한 해를 마무리했다. 이날 사회를 맡은 배성재 SBS 아나운서의 말대로 올해는 “한국 축구의 격동기”였다. 수십 년을 돌아봐도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간 해는 흔치 않다. 

    러시아월드컵 본선 조별리그에서 2연패를 당한 뒤 손흥민(토트넘 홋스퍼)은 “저희가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국민 여러분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며 흐느꼈다. 하지만 며칠 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인 독일을 제압했다. 여기에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에서 말레이시아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으나 황의조(감바 오사카)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의 활약으로 금메달을 땄다. 이어 출범한 파울루 벤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체제가 순항하고 있다.

    16강 실패했지만 잘 싸웠다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 새령탑을 맡은 파울루 벤투 감독. [뉴시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 새령탑을 맡은 파울루 벤투 감독. [뉴시스]

    한국 축구 팬들이 꼽은 2018년 최고의 경기는? 단연 러시아월드컵 독일전이다. 대한축구협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53.1%가 이를 꼽았다. 최고의 골은 독일전에서 손흥민이 질주해 빈 골문으로 밀어 넣은 쐐기 골로, 54.4%의 호응을 받았다. 이를 기점으로 국내에서 열린 A매치 4경기 모두 매진을 기록했으니 한국 축구 부흥의 상징적 순간이었다. 

    여정의 시작은 2017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태용 감독이 러시아월드컵 대표팀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 자체로 도박이었다. 월드컵 본선행은 아슬아슬했고, 본선까지는 1년이 채 안 남은 상황이었다. 여기에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 한국으로 향할 수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한국 축구가 뿌리째 휘둘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신태용 감독은 사석에서 “(한국 축구와 히딩크 전 감독) 중간에 낀 작자의 농간 아니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시커멓게 변한 피부는 이미 푸석푸석해져 있었다. “스트레스성 탈모 때문인지 신태용 감독의 정수리가 휑하더라”는 말까지 돌았을 정도다. 



    대한축구협회는 기존 코칭스태프에 스페인 대표팀과 레알 마드리드를 거친 인물들을 추가로 인선했다. 하지만 급조된 조합이 썩 매끄럽지 않았다. 준비 과정이 미흡한 팀은 보통 불안한 행보를 자주 보인다. 예상대로 조별리그 1, 2차전 모두 패했다. 첫 경기 스웨덴전에 모든 걸 걸었으나 역풍만 불었다. 신태용 감독이 야심 차게 내세운 김신욱(전북현대모터스)의 원 스트라이커 선발 출격은 대실패였다. 깜짝 카드가 이도 저도 아닌 내용과 결과로 치닫자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2차전 멕시코와 경기까지 무너진 뒤에는 자포자기였다. 독일전 모토는 ‘지더라도 잘 지자’가 됐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2004년 친선경기에서 3-1로 완승한 것처럼 한국은 독일을 희생양으로 삼고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 신태용 감독은 벤투 감독에게 자리를 넘겼다. 최측근에게 확인한 바로는 K리그 모 클럽은 물론, 일본과 중국 클럽 진출도 타진했다고 한다. 다만 확실히 성사된 건 없다. 연말 여러 행사에 참석한 신 전 감독은 축구계 동료와 후배들을 만나 근황을 묻곤 했다. 유쾌한 성격은 여전했다. “요새 어디서 뭐 하느냐. 논다고? 나도 놀잖아”라며 우스갯소리를 늘어놨다. 그는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해설로 새해 일정을 잡았다. 이영표 KBS 축구 해설위원 말대로 ‘한국 축구의 자산’인 그가 언제 또 일선으로 돌아올지 궁금하다.

    ‘인맥 축구’ 오명 뒤집어쓴 아시아경기

    2018년 10월 12일 우루과이와 평가전에서 득점 후 기뻐하는 황의조. [동아DB]

    2018년 10월 12일 우루과이와 평가전에서 득점 후 기뻐하는 황의조. [동아DB]

    러시아월드컵에서 지핀 불씨가 광야로 퍼진 건 8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였다. 이 대회에 출전한 대표팀 역시 매끄럽지 못한 수순을 밟고 있었다. 1월 중국에서 열린 2018 AFC U-23 챔피언십 이후 저조한 경기력 등을 이유로 감독 교체를 강행했다. 후임자는 K리그 명장으로 꼽히는 김학범 감독. 아시아경기는 월드컵보다 부담이 덜했다. 하지만 우승해야만 주어지는 특별한 뭔가가 있었다. 바로 ‘병역 혜택’. 

    자연스레 ‘손흥민 군대’가 대회 키워드로 떠올랐다. 한국 축구를 짊어진 이 선수가 군 입대로 경력 단절에 처한다? 당시 BBC를 포함해 영국 유력 매체에서도 손흥민의 병역 문제가 화제가 될 정도였다. 결국 김 감독에겐 손흥민을 살려내라는 특명이 떨어진 셈이다. 하지만 반년도 채 안 남은 상태에서 팀을 꾸리기가 어디 쉬울까. 선수 개개인의 사정 때문에 ‘완전체’는 대회 직전인 8월 초가 돼서야 만들어졌다. 신 전 감독처럼 김 감독도 축구 인생을 담보로 걸었다. 

    김 감독은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그는 축구계에서 비주류였다. “2006년 성남 일화(현 성남FC) 우승 후 국가대표팀 감독이 될 기회가 있었지만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던 그의 고백이 그랬다. 선수로선 유명하지 않았던 그는 “내 말이 맞다”는 걸 결과로 증명해 보여야 했다. 

    아시아경기 축구대표팀의 몇몇 포지션은 구멍이 나 있었다. 최전방 공격수도 그중 하나. 줄담배를 태우며 고민하던 김 감독은 성남FC에서 짧게나마 인연을 맺었던 황의조를 떠올렸다. 그 이름 석 자가 나오자 언론매체와 축구평론가들은 ‘인맥 축구’라고 비판했다. 그는 “학연, 지연, 의리 이런 것 없다”며 부인했지만 싸늘한 시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랬던 황의조가 팀을 정상까지 올려놓은 일등공신이 됐다. 손흥민이 집중 견제에 시달리는 동안 황의조는 해트트릭 두 차례를 포함해 총 9골을 넣으며 대표팀을 살려냈다. 황의조와 김 감독이 KFA 시상식에서 올해의 남자 선수상, 올해의 남자 지도자상을 받은 것은 2018년을 상징하는 대표적 장면이었다. 수상 직후 김 감독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남들이 ‘안된다’고 할 때 오기로 만들어낸 게 희열이 크고 멋지지 않나.” 

    개인적으로 뇌리에 강하게 박힌 건 김 감독의 눈물이었다. 선수들에게 늘 “엉덩이 빼지 말고 나가 싸우라”며 두 눈 부릅뜨던 그가 우즈베키스탄과 8강전에서 극적으로 승리한 뒤 울컥했다. 말을 더 잇지 못하고는 ‘인터뷰 그만하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산전수전 다 겪고 올라선 그에게도 아시아경기는 벅찬 여정이었다. 

    2019년 한국 축구는 벤투 사단이 59년 만에 아시안컵 정상에 도전한다. 기성용(뉴캐슬 유나이티드), 구자철(FC 아우크스부르크) 등 베테랑이 출동하는 마지막 전장이기도 하다. 여기에 프랑스 여자월드컵, U-17/U-20 월드컵이 뒤를 잇는다. 간신히 잡은 한국 축구 중흥의 기회가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