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낸시 펠로시, 反트럼프 선봉장 나서나

민주당 중간선거 승리로 차기 하원의장 유력

  • 입력2018-11-19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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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7일(현지시각) 낸시 펠로시 미국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가 마라톤 연설을 하고 있다. [C-SPAN]

    2월 7일(현지시각) 낸시 펠로시 미국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가 마라톤 연설을 하고 있다. [C-SPAN]

    “우리의 드리머들(DREAMers·어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에 불법이민 온 청소년들)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확실성이란 잔인한 구름 아래 있습니다.” 

    낸시 펠로시 미국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가 2월 7일(이하 현지시각) 하원 본회의장에서 드리머들을 구하자는 내용으로 8시간 7분간 쉬지 않고 마라톤 연설을 했다. 펠로시 대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른바 ‘다카’(DACA·Deferred Action for Childhood Arrivals)를 폐지하겠다고 밝히자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드리머’ 법안 입법을 촉구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2년 행정명령을 통해 다카를 시행했다. 다카는 불법이주한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온 청소년에게 일정 기간 추방하지 않고 학업 또는 취업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다. 2년마다 갱신해야 하며, 미국에서 70만여 명이 이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다. 78세 고령임에도 4인치(약 10.2cm) 굽의 하이힐을 신고 연단에 오른 펠로시 대표는 약간의 물로 목만 축여가며 드리머들의 사연을 절절이 소개했다. 연설을 끝낸 펠로시 대표가 연단에서 내려오자 여야 의원들이 일제히 기립해 박수를 쳤다.

    첫 여성 하원의장

    펠로시 대표의 연설은 1909년 챔프 클라크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가 5시간 15분간 연설한 기록을 깬 것으로, 클라크 전 대표는 관세법을 둘러싼 갈등 문제로 단상에 올랐다. 미국 하원은 상원과 달리 필리버스터(filibuster·합법적으로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의장과 원내대표 등에게 연설 시간의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펠로시 대표의 이번 연설을 필리버스터에 빗대어 ‘다카버스터’(다카 입법을 위한 필리버스터)라고 불렀다. 펠로시 대표의 격정적인 연설 덕분인지 연방 항소법원은 11월 8일 트럼프 대통령의 다카 폐지가 잘못됐다고 판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불복해 연방 대법원에 상고할 방침이다. 

    민주당이 11월 6일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함에 따라 펠로시 대표가 하원의장으로 선출될 것이 유력시된다. 이에 따라 펠로시가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을 강력하게 견제할 것으로 보인다. 펠로시는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치른 여전사로 불린다. 그는 미국 정계의 ‘유리천장’(여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을 깬 인물로 꼽혀왔다. 2002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로 선출됐고, 2007년 1월부터 2011년 1월까지 4년간 첫 여성 하원의장을 지냈다. 

    펠로시 대표는 다섯 자녀와 손주들을 둔 어머니이자 할머니이기도 하다. 하원의원에 처음 당선된 때도 47세였을 정도로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1940년 볼티모어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의 5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난 그는 워싱턴 트리니티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곧바로 결혼해 금융업에 종사하는 남편을 따라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섯 자녀를 양육하며 전업주부로 생활했다. 그러다 1987년 샌프란시스코 연방 하원의원이던 샐라 버튼 의원이 암으로 숨지자 펠로시는 미국에서 진보 색채가 강하다는 제8선거구(캘리포니아)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볼티모어 시장 및 민주당 하원의원을 지낸 부친과 볼티모어 시장을 역임한 오빠를 보며 젊은 시절 꿈꿨던 정치인이 되겠다는 소망을 뒤늦게 실현하게 된 셈이다. 



    펠로시 대표의 의정 활동은 거침이 없었다. 교육, 가족, 노동, 보건·의료 분야에서 정부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해왔다. 이라크 전쟁 반대에도 앞장섰다. 오바마 전 대통령 재임 때는 민주당 내부 반발을 잠재우고 공화당을 설득해 ‘오바마케어’(환자보호 및 부담적정보험법)를 통과시켰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지만 동성 간 결혼과 낙태에 적극 찬성하는 등 민주당에서 가장 진보적이란 평가를 받아왔다. 역대 최장 기간인 10년간 하원 정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2007년 7월 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될 때 의장으로서 주요 역할을 했다.

    하원의장은 대통령직 승계 서열 2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식 날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왼쪽)와 악수하고 있다. [미국 백악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식 날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왼쪽)와 악수하고 있다. [미국 백악관]

    펠로시 대표는 내년 초 하원의장 선거에 출마한다. 민주당 현역의원과 당선인들에게 하원의장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하원의장은 관례적으로 다수당 원내대표가 당내 추대를 거쳐 맡아왔다. 하원의장은 대통령 유고 시 상원의장(부통령)에 이어 대통령직 승계 서열 2위로, 미국 내 권력 서열에서 세 번째인 중요한 자리다. 17선(選) 경력을 자랑하는 펠로시 대표는 법안 추진력과 협상력, 방대한 인맥 등으로 볼 때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게다가 민주당에서 16년간 당권을 유지하는 등 강력한 카리스마 소유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민주당 의원들 가운데 3분의 1이 반대하고 있다. 너무 오래 당의 간판을 맡아 여론 피로감이 클 뿐 아니라 고령(78세)이라는 점에서다. 일부 의원은 “민주당은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며 “펠로시는 노욕(老慾)을 버리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원의장으로 선출되면 미국 의정 사상 하원의장을 두 번 역임하는 세 번째 인물이 될 펠로시 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의 독주를 견제하겠다면서 벌써부터 각을 세우고 있다. 그는 “민주당이 하원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트럼프 정부를 견제할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 2년간 국민을 위해 강하고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의회를 복구하겠다”고 밝혔다. 북한 인권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등 민주당 내에서도 대북 강경파로 손꼽히는 펠로시 대표가 하원의장이 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협상 전략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펠로시 대표가 앞으로 미국 의정사에 새로운 기록을 세울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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