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8

2015.12.23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세월호 이후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5-12-22 14:4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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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세월호 청문회는 참담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기억이 없다”는 말을 거만한 행진처럼 이어갔다. 학생들이 철이 없었다는 뻔뻔한 말도 있었다.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새누리당 추천 위원들은 전원 불참했다. 증인들은 끝까지 떠넘기고 회피했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2014년 4월 16일, 뒤집힌 채 수면 위에 떠 있던 선체를 다시 보는 듯했다. 그 이후 며칠, 아니 몇 달의 어두움과 괴로움이 떠올랐다. 괴로웠다. 그 후 1년 8개월 동안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아무것도 규명된 게 없는 한국 사회의 민낯이었다. 지상파에서는 결코 보여주지 않은 부끄럽고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한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준, 그 사회 구성원 모두를 슬프게 한 사건은 대중문화로 형상화된다. 활자가 아닌 정서로 각인된다. 예를 들면 미국 9·11테러가 있을 것이다.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된 후 뭔가가 변했다. 아니 많은 것이 변했다.
    나는 그 직후 뉴욕 음악계의 흐름을 기억한다. 스트록스, 화이트 스트라이프스로 대변되는 개러지 록 밴드의 흐름에 인터폴, 더 워크맨 같은 팀이 더해진 것이다. 1970년대 후반 영국 음악계를 상징하는 조이 디비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그들의 음악은 어두웠다. 활기찬 리듬을 가진 곡에서마저 멜로디의 조도가 낮았다. 9·11테러 이후 맨해튼 거리 곳곳에 묻었을 쌍둥이빌딩의 먼지가 그들의 성대와 기타에도 묻은 듯했다.
    여타 뮤지션들도 다르지 않았다.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록 뮤지션 가운데 한 명인 존 메이어는 라이브 앨범 ‘Any Given Thursday’에서 ‘Covered In Rain’을 불렀다. ‘세상이 점점 차가워지는 요즈음’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존 메이어는 9·11테러 당시 느꼈던 감정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사라져버린 표지판 아래 서서’라는 가사가 그라운드 제로를 연상케 하지만, 무엇보다 막연한 상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은 5분여 동안 울어대는 그의 기타 연주다. 소닉 유스는 2002년 앨범 ‘Murray Street’를 통해, R.E.M.은 ‘Around The Sun’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당시의 소회를 잔잔하게 묘사했다. 말로 채 표현할 수 없는 뉴욕 시민들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게 아니었을까.
    세월호 사고 이후 우리 음악인들도 감정을 뿜어왔다. 유희열부터 에프엑스(f(x))까지 애도로 표현했다. 비교적 직후의 일이었다. 달라진 게 없는 지금, 그래서 계속 나온다. 애도도 있다. 하지만 분노도 있다. 답답함도 있다. 은유와 직설의 경계에서 계속 세월호에 대한 노래가 나온다.
    지난달 허클베리핀은 ‘사랑하는 친구들아 안녕 나는 너희들이 모르는 사이에 잠시 지옥에 다녀왔어’를 발표했다. ‘푸른 바다 높은 탑/ 젖은 몸의 널 기다리며/ 깊은 잠에 빠진 널/ 멀리에서 그저 바라보는’이라고 그들은 노래한다. 최근 새 앨범(사진)을 TV 홈쇼핑을 통해 발매해 화제가 된 루시드폴의 타이틀곡은 ‘아직, 있다.’이다.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축 처진 어깨를 하고 교실에 있을까’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제목은 마침표로 끝난다.
    12월 16일, 8년 만에 컴백한 언니네 이발관은 ‘혼자 추는 춤’을 통해 이렇게 노래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난 꿈을 꾸지/ 여기 아닌 어딘가에 있는 꿈을/ 작은 희망들이 있는 곳/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곳/ 내가 살아가고 싶은 곳/ 누구도 포기 않는 곳.’ 보컬 녹음까지 끝마친 이석원이 서울 광화문광장을 지나다 ‘그 풍경’을 본 후 바로 가사를 수정해 다시 부른 노래다. ‘헬조선’의 거울이다. 세월호의 결과다. 희망을 노래하기에, 우리는 너무나 끔찍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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