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7

2015.10.05

당신의 심장이 비트에 반응할 때

음악과 운동, 그 미묘한 상관관계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5-10-05 1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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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심장이 비트에 반응할 때
    혼자 있을 때는 늘 음악을 듣는다. 새로 나온 음악을 모니터링하기도 하고 듣고 싶은 음악을 골라 듣기도 한다. 보통은 그때그때 기분 따라 곡을 고른다. 하지만 선곡 범위가 제한될 때가 있다. 운동할 때다.

    태초의 음악은 리듬이었다. 원시시대 인간이 수학을 알았겠느냐만, 그들은 무엇인가를 규칙적으로 두드려 얻는 소리를 신성시했다. 아프리카나 아마존 원시부족이 잔치를 벌일 때 타악기가 중심이 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리듬은 심장박동이다. 음악의 뿌리가 심장박동에 있는 셈이다.

    심장박동은 운동과 함께 변한다. 활동량이 많으면 빨라지고 적으면 느려진다. 격정적인 음악은 비트가 빠르다. 처지는 음악의 비트는 반대다. 음악과 스포츠는 따라서 본질적으로 같다. 운동을 할 때 음악을 듣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몸은 음악에 반응하고, 음악은 몸과 함께 고조된다. 따라서 어떤 운동이든 그에 적합한 음악이 있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러닝머신에서 운동하거나 조깅할 때 잘 어울리는 비트는 하우스 비트로 알려져 있다. 규칙적인 심장박동과 맞기 때문이다. 시속 6km로 빨리 걷든 시속 9km 정도로 천천히 뛰든 심장박동은 130~150bpm 안쪽을 유지한다. 게다가 이들 운동은 쉽게 몰입되는 종목이기도 하다. 한때 어느 헬스장에서든 코요테나 거북이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요즘은 힙합이나 EDM(Electronic Dance Music)이 대세다. 발라드를 들으며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걸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그것대로 대단하긴 하다.

    반면 요가나 스트레칭을 할 때는 비트보다 선율 중심의 음악이 좋을 수밖에 없다. 몸을 멈추지 않고, 천천히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운동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중요하다. 지루함을 잊게 해주되, 그 대화를 방해하지 않는 음악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선율 중심의 명상음악이 좋지만 멜로디가 너무 부각돼서도 곤란하다. 명상음악가 이름이 좀처럼 기억에 남지 않는 건 그들의 음악이 애써 선명한 존재감을 피하기 때문이다. 영화음악에도 적용되는 이치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오리지널 스코어란 배우들의 연기 뒤에 존재해야 한다. 명상음악 역시 의식 뒤편에 머물 뿐 인지의 주인공이 돼서는 곤란하다.



    심장만 뛰는 게 아니라 살과 살이 부딪치고 땅에 머리가 부딪히고 얼굴에 주먹이 부딪히는 운동이 있다. 격투기가 그렇다. 이런 종목은 링의 온도를 급상승시킨다. 관중석에서도 아드레날린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쌍팔년도’ 프로 레슬러들은 헤비메탈을, 지금의 이종격투기 선수들은 하드코어를 자신의 주제가로 고른다. 이건 필연이다. 뼈와 살이 꺾이는 사나이들의 세계를 이토록 잘 대변할 수 있는 음악은 없다.

    무릇 모든 종목이 그 색깔에 적합한 음악을 고른다. 축구 주제가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이 펫숍보이스의 ‘Go West’인 까닭은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단순하고 장엄한 멜로디 때문이다. 메이저리그에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Born To Run’ 같은 음악이 사랑받는 까닭은 야구에 묻어 있는 미국 혼을 브루스 스프링스틴만큼 잘 대변하는 뮤지션이 없기 때문이다.

    음악은 생각 그 이상으로 어느 곳에나 스며든다. 몸과 정신, 소리가 결국 하나인 까닭이다. 몸의 음악이 로큰롤에서부터 EDM으로 이어져왔고, 의식을 흐트러뜨리는 음악이 사이키델릭을 창조해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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