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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47세 아파트의 울분

서울시 ‘통개발’ 마스터플랜에 발목 잡혀… “10년을 기다렸는데 또 같은 상황”

  • 입력2018-10-02 11: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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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1971년 완공돼 재건축 사업 추진 가능 연한인 30년을 훌쩍 넘긴 단지다. [동아DB]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1971년 완공돼 재건축 사업 추진 가능 연한인 30년을 훌쩍 넘긴 단지다. [동아DB]

    여의도를 서울의 맨해튼으로 바꾸겠다던 박원순 시장의 공언은 8월 26일부로 공수표가 됐다. 박 시장이 “여의도를 통째로 개발하겠다”고 말한 지 한 달 만의 일이다. 서울 집값이 신기록을 달성하듯 천정부지로 치솟자 박 시장은 “주택 시장이 안정될 때까지 여의도·용산 개발계획 발표와 추진을 보류하겠다”며 일단 한발 물러섰다.

    여의도 내 재건축 예정 아파트 입주민들은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여의도 개발에 맞춰 아파트 재개발을 허가하겠다고 한 서울시가 계획 취소 이후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주민들은 서울시의 입장 표명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상황이다. 그사이 아파트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점점 더 낡아가고 있다.


    시범아파트 정비사업 변경 신청, 안건 상정조차 안 돼

    여의도에서 재건축 추진 속도가 가장 빠른 단지는 시범아파트다. 1971년 12월 완공된 시범아파트는 총 24개 동, 13층 규모로 179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올해로 지어진 지 47년째 되는 아파트 단지로 서울 서초구 반포동 주공1단지(1973년), 송파구 잠실동 주공5단지(1978년),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1979년) 등 서울시내 유명 재건축 예정 아파트 가운데서도 큰형님 격이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재건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 차례 아픔을 겪었다. 2008년 재건축추진위원회가 설립됐다가 오세훈 서울시장의 ‘한강 르네상스 사업’으로 인해 재건축 추진이 무산된 것. 이후 2017년 6월 정비사업위원회(이하 정사위)가 사업시행자를 한국자산신탁으로 지정하고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제3종 일반주거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정사위는 기존 용적률 230%를 법정 상한인 300%로 늘리려고 한다. 이 경우 13층 아파트를 최고 35층까지 올릴 수 있고, 가구 수도 2370가구로 대폭 늘릴 수 있다.



    정사위는 이러한 내용의 정비계획 변경안을 6월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이하 도계위) 안건으로 올렸다. 그러나 서울시는 “여의도 마스터플랜과 정합성을 유지해야 한다”며 심사를 보류했다. 정사위는 서울시가 여의도 마스터플랜을 올해 안으로 발표할 것으로 보고 이를 기다렸다. 그런데 전면 보류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연기된 마스터플랜 사업 재개를 마냥 기다릴 수 없었던 정사위는 9월 4일 같은 내용의 정비계획 변경안을 도계위 안건으로 상정할 것을 신청했다. 6월과 상황이 달라졌으니 결과도 다를 것이란 기대감이 높았다. 그러나 9월 19일 도계위는 해당 정비계획 변경안을 안건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이제형 여의도 시범아파트 정비사업위원회장은 “서울시의 판단을 전혀 납득할 수 없다. 여의도 마스터플랜 사업이 언제 재개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개별 재건축 추진을 막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서울시 관계자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듣고, 다시 같은 내용으로 신청하는 등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재건축 추진 가능 연한인 30년을 훌쩍 넘었다. 국토교통부가 재건축 추진 가능 연한을 40년으로 늘린다고 해도 사업 추진이 가능한 곳이다. 단지 여의도에 위치한다는 것만으로 재건축 추진이 번번이 무산돼 주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특히 아파트 노후화로 인한 주민의 불편은 심각한 수준이다. 정사위가 최근 3년간 취합한 ‘여의도 시범아파트 내·외부 구조물 보수 및 안전사고 현황’에 올라간 심각한 수준의 피해 사례만 50여 건에 달한다. 

    배관이 녹슬어 가구 내 개별로 설치한 정수기에는 누런 찌꺼기가 쌓여 있고, 건물 바닥과 외벽은 움푹 파이거나 금이 가 땜질식으로 보수공사를 해둔 상태다. 겨울만 되면 수도관이 동파돼 온수 공급이 중단되고, 여름이면 배관 파열로 가구 내 누수가 진행돼 곰팡이가 생기는 등 계절 변화에 따른 불편 사항도 심각한 수준이다. 

    단지 내 상가는 천장의 중앙부가 내려앉았고, 비가 내리면 전선을 타고 빗물이 흘러 감전 사고 위험도 있다. 또한 건물 고층부 균열로 콘크리트 조각이 떨어지는 등 입주민뿐만 아니라 행인도 안전하지 않다.  

    누수, 감전, 균열 등 건물 노후화 심각

    단지 곳곳에서는 금이 가고 깨진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단지 내 배관이 녹슬어 가구별로 정수 기기를 갖추지 않고서는 샤워를 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샤워기 손잡이 부분의 정수 필터는 누렇게 변색됐다. [사진 제공 · 여의도 시범아파트 정비사업위원회]

    단지 곳곳에서는 금이 가고 깨진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단지 내 배관이 녹슬어 가구별로 정수 기기를 갖추지 않고서는 샤워를 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샤워기 손잡이 부분의 정수 필터는 누렇게 변색됐다. [사진 제공 · 여의도 시범아파트 정비사업위원회]

    입주민들은 재건축 사업으로 시세 차익을 노리는 것보다 주거 환경을 하루빨리 개선하고 싶은 욕구가 더 크다고 한다. 이제형 회장은 “각 동 지하에 변전실이 약 20곳 있다. 그 안에 6000볼트짜리 변압기 50여 개가 돌아가고 있다. 외부 기관에 안전성 검사를 의뢰했는데 누전과 감전으로 인한 폭발 위험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주민 대다수가 짧게는 10년 길게는 수십 년간 거주한 이들인데 이주할 생각이 없는 분들이다. 서울시가 이런 주민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재건축 추진을 허락해주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서울시가 여의도 시범아파트 재건축 사업 승인을 번번이 보류하는 이유는 여의도 내 아파트 단지를 주거지역으로만 재건축하길 원하지 않는 데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아직까지 ‘여의도 마스터플랜’의 세부 내용이 공개된 적은 없다. 그러나 10년 전 오세훈 시장 때의 계획과 유사한 형태가 되리라는 전망이 많다. 

    2009년 오 시장 재임 당시 서울시는 한강의 스카이라인을 바꾸는 ‘한강 공공성 회복 선언’을 발표하면서 여의도를 전략정비구역으로 지정했다. 그 일환으로 여의도 시범·삼부·삼익아파트 등 11개 단지를 지구단위계획구역으로 묶어 통합 재건축을 추진했다. 그런데 기부채납 비율을 40%까지 올려 입주민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이후 2011년 박원순 시장으로 바뀌면서 통합 재건축 계획은 백지화됐다. 

    박원순 시장은 전임 시장과 마찬가지로 여의도와 용산 재개발 계획안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다. 8월 한 서울시 관계자에 따르면 여의도·용산 재개발 계획은 늦어도 올해 안에 발표될 예정이었다. 박 시장은 7월 리콴유 세계도시상을 받기 위해 싱가포르를 방문한 자리에서 여의도를 통으로 재개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여의도 내 새로 지어지는 건축물을 최고 50층까지 올려 수변 스카이라인을 조성하고, 주거·상업·녹지 공간이 어우러진 초고층 국제 금융 도시로 탈바꿈할 것을 시사했다. 

    박 시장의 발언을 토대로 추측건대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마스터플랜에 따라 제3종 일반주거지역이 아닌 상업지역으로 종 상향(1,2종 일반주거지역을 2종 주거지역, 3종 주거지역·준주거지역·상업지역으로 상향하는 것)하는 등의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주거지역에서는 아파트를 최고 35층까지 지을 수 있다. 최고 50층까지 지으려면 종 상향이 필수다. 특히 시범아파트는 한강변에 바로 붙어 있어 수변 스카이라인 조성 사업을 추진하려면 종 상향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실 아파트 재건축조합은 종 상향을 대부분 바란다. 잠실동 주공5단지의 경우 종 상향에 필수인 ‘디자인 특화’ 조건을 충족시켜 2017년 9월 서울시로부터 일반주거지역에서 준주거지역으로 종 상향을 승인받았다. 이에 따라 최고 50층으로 재건축이 가능하게 됐다. 당시 서울시내 재건축 아파트 가운데 최초로 종 상향이 이뤄진 경우로 큰 화제가 됐다. 반면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10여 년째 ‘디자인 특화’를 조건으로 준주거지역으로 종 상향을 추진하고 있지만 서울시로부터 번번이 퇴짜를 맞고 있다.

    주민들, 종 상향보다 개별 추진 원해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빠른 재건축을 위해 조합 방식이 아닌 신탁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은 여의도 시범아파트 정비사업위원회 사무실. [박해윤 기자]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빠른 재건축을 위해 조합 방식이 아닌 신탁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은 여의도 시범아파트 정비사업위원회 사무실. [박해윤 기자]

    이와 비교해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서울시에서 먼저 종 상향을 추진하는 셈이어서 다른 재건축조합의 부러움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주민들이 원하는 건 다르다. 이제형 회장은 “재건축 의결 기구인 여의도 시범아파트 토지등소유자위원회에서 제3종 일반주거지역 용적률 300% 증축에 뜻을 모은 상태다. 이것이 우리의 대원칙이다. 이미 10년 전 재건축 사업 무산을 경험한 이가 많다. 서울시장이 바뀔 때마다 ‘안 되면 말고’ 식의 개발 계획에 휘둘릴 수 없다. 입주민들은 지금 정해진 것을 바꾸기를 극도로 싫어한다”고 말했다. 

    재건축은 사업이 지연될수록 구성원들의 손해가 커진다. 일반적으로 조합 추진 방식을 선택하는데 재건축추진위원회 설립 이후 조합 설립 인가, 건축심의, 사업시행 인가, 시공사 선정, 관리처분 인가, 이주, 건설, 완공까지 지난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추진위 설립 후 완공까지 짧게는 8년에서 길게는 10여 년이 걸린다. 한 단계씩 거칠 때마다 그만큼 비용이 들고, 이는 고스란히 조합원이 부담할 몫으로 돌아간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재건축에 걸리는 기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탁 추진 방식을 선택했다. 이 경우 신탁사 시행자 지정, 시공사 선정, 건축심의, 사업시행 인가, 관리처분 인가, 이주, 완공 순으로 재건축 과정을 단축할 수 있다. 사업 기간이 짧아 제반 비용을 덜 수 있고, 조합 방식보다 2~3년 빨리 입주할 수 있기 때문에 입주민의 기대감이 높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는 서울시 마스터플랜 때문에 하염없이 늦어지게 됐다. 여의도 시범아파트 재건축 사업시행자인 한국자산신탁의 도시재생사업본부 관계자는 “개별적으로 재건축을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스터플랜이라는 복병이 앞길을 막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업이 늦춰지면 손해가 발생하는 것은 물론 정비사업위원회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재건축 추진은 어떻게 될까. 해당 관계자는 “서울시의 입만 쳐다보고 있을 수 없다. 입주민들이 한 차례 학습효과로 서울시에 탄원서를 넣고, 항의 집회를 여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는 등 개별 재건축 강행 의지가 높은 상황이다. 서울시도 협의 의지가 없지는 않은 것으로 본다. 최대한 빨리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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